그리고 보통의 순간들
제 인생의 첫 전시회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전이었습니다.
그해는 2005년도였고, 저는 고등학생이었죠.
어른이나 친구를 동반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미술관을 간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조금은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전시는 예술의 전당에 있는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어요. 프랑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전이었습니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그날 브레송의 사진 앞에 섰던 마음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땐, 숨도 같이 멈추었죠. 저는 숨은 그림찾기를 하는 것처럼 사진을 들여다봤습니다.
과연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요?
지금 와서 그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그 아이는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고, 자기자신과 세상, 그 모두에게 실망스러웠고, 그렇기에 '보통'이 아닌 '결정적'인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이런 질문을 품고 미술관을 찾았던 겁니다.
'이 보통의 삶을 넘어서는 무엇, 진실로 의미있는 무엇을 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밑 빠진 독처럼 왜 자꾸만 목이 마르지? 무엇이 나를 채워줄 수 있을까?'
영혼의 허기짐ㅡ누군가는 그 허기침을 채우고자 철학을 탐구하고, 누군가는 예술을 탐닉하며, 누군가는 창조에 몰입합니다.
저는 그 모두를 시도해봐야 했는데, 그날은 미술관에서 답을 찾아볼 차례였습니다.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추후 장기적인 모험이 되지만, 그때는 아직 그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까마득히 모르던 시기였지요. 그 여정의 첫 기착지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라니, 어떻게 보면 참 절묘하죠?
전시회 타이틀 <결정적 순간>은 동명의 작품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한 남자가 물 위에 떠 있습니다. 사다리도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방금 남자가 그 사다리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건너온 것 같죠. 그런데 사다리가 너무 짧아요. 성큼 힘차게 내딛는 남자의 발은 사다리 밖을 벗어났습니다. 남자는 사진이 '찰칵'하고 난 바로 다음 순간, '첨벙'하고 웅덩이에 빠지고 말 것 같습니다.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들 눈엔 '첨벙' 빠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보입니다. 우리는 그럴 거라고 99% 확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 결정적 순간이란 곧 '미완성'의 순간이며, '가능성'의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브레송의 사진을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숨은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수수께끼 풀듯이 골몰하면서 전람회장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브레송의 사진들을 보면 정겨워서 미소가 나오기도 하고, 가슴에 묵직한 울림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그 울림은 우리가 삶에서 숭고함을 목격할 때 느끼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브레송이 보통의 순간을 결정적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릴 때, 우리는 사진에 포착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나치고 말았을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보통의 순간에서 결정적 순간을 발견하는 것 말입니다.
브레송이 사진을 통해 전달한 이 주제를 담아낸 훌륭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2000)>는 "우리 인생 비범한 보통의 순간들"이란 주제를 담았습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 남학생은 언뜻 보기에 문제아 같기도 하고, 굉장히 진지한 성격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수시로 영상을 찍는 일이 취미이자 습관입니다. 그런데 그 남학생이 찍은 것들은 하나 같이 별볼일 없어보입니다. 바로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그 남학생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에서 아름다움(Beauty)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한편, 그 남학생을 눈여겨보고, 그의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웃집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이웃집 남학생한테서 남들이 보지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죠. 그래서 아름다움은 사랑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ㅡ달리 말해, 보통의 것에서 보통이 아닌 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모든 예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미(美)가 진리이며, 진리가 미(美)로다,
이것이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이며,
그대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리.
이 구절은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존 키츠는 아름다움과 진리가 같은 것이며, 이것만 알면 모든 게 끝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브레송은 이 아름다움과 진리가 바로 우리 보통의 삶에 녹아들어있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또 한 편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에서는 바로 이것을 "삶의 정수"라는 단어로 축약해서 언급합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18년 전, 교복을 입고 예술의 전당을 방문했던 그 아이는 과연 삶의 정수를 찾았을까요? 그 아이는 "결정적 순간"을 찾기 위해 전시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브레송 할아버지가 이것만 알면 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그저 "보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애가 그렇게도 지루해하고 넌더리내던 보통의 삶 말입니다. 저는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합니다. 브레송처럼 살아낼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고. 작품의 테마를 이해하는 것과 거기서 배운 것을 체화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니까요.
그 이후에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전은 장소를 바꾸어가며 여러 번 개최되었고, 저는 브레송의 사진전을 다른 장소에서 두 번 더 관람했습니다. 세 번째 관람했을 때, '이제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레송과 대화를 충분히 나눈 것 같았죠. 마지막 전시회에서 저는 브레송한테서 과제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브레송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죠.
'내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통의 순간에서 끊임 없이 결정적 순간을 찾아내어 셔터를 누른 것처럼 너도 그렇게 살아보렴.'
다시 말해, 보통의 일상에서 삶의 정수를 찾아내라는 숙제였죠. 그런데 이것은 영원히 끝마칠 수 없는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 한, 보통의 순간들은 계속될 테고, 저는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내야 할 테니까요.
18년 전, 교복을 입고 예술의 전당을 찾아갔을 때, 제게 그날은 보통의 순간 같았습니다. 그날이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에 아로새겨질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날 그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걸 알 것 같습니다. 이 경험 덕분에 저는 오늘도 결정적 순간을 기대하며, 보통의 순간들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보통의 순간인지,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처럼 숨을 참고, 잘 들여다보면서 살고 있어요.
숙제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겠지만, 괜찮습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