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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가비 Apr 06. 2023

스스로 작품이 되는 행위예술가

서펜타인 갤러리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2014년 여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저는 마침 런던에 있었던 터라 호기심으로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행위예술계의 대모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뉴욕에서 열린 지난 전시에서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서 줄을 길게 늘어섰다고 들었습니다. 그 줄에는 유명한 셀럽들도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어쩌면 사람이 붐벼서 입장이 힘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평일이었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전시장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 이름은 <512 Hours>였어요.

저는 전시장 입구 앞에서 모든 소지품을 직원에게 맡기고, 소음을 차단하는 헤드폰을 하나 건네받았습니다. 헤드폰을 쓰자, 진공관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적막해졌습니다. 전시실은 텅 빈 우주선 같은 공간이었죠. 먼저 들어온 관객들이 그곳에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눈 감고 서 있는 사람, 벽에 등을 기대고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 한쪽 방향으로 발끝을 보고 걷는 사람, 그리고 저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바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였죠. 그녀는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들, 달리 말하자면, 퍼포먼스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예술 작품이 된 사람들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서고, 그렇듯 자연스럽게 행동을 이끌거나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친절한 파티의 호스트처럼 말이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퍼포먼스도 관객을 초대하여 함께 예술 작품이 된다는 면에서 그날의 <512 Hours>와 유사성이 있습니다. 2010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3개월 동안 전시된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라는 퍼포먼스가 있었습니다. 마리나는 하루 8시간씩, 총 736시간을 관객과 마주 앉아서 침묵하고 있겠다는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MOMA에서는 회의를 표했죠. "뉴요커는 너무 바빠서 그렇게 한가하게 앉아있을 수 없다"며 말이에요. 그런데 막상 전시가 오픈했을 때, 뉴요커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누적 관객 수가 무려 850만 명이었다고 하죠. 이는 당시 뉴욕시 전체 인구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날의 현장을 상상해볼까요? 마리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않아요. 관객들은 순서대로 마리나 앞에 앉습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데, 시선만 교환할 수 있을 뿐, 대화도 나눌 수 없고,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없어요.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 앉아 있다가 자리를 뜹니다. 그러면 차례를 기다리던 다음 사람이 와서 의자에 앉지요. 그리고 마리나와 눈싸움을 벌이듯이 시선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건 기나긴 눈싸움 마라톤처럼 보이죠.


이 퍼포먼스는 언뜻 평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와 가장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눈빛 교환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나요?

30초? 1분?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고 할지라도, 서로의 눈만 주구창장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1분을 넘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네, 그런데 그 뜨거운 눈빛 교환이 5분 동안 지속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10분 동안 지속된다면?


고작 5분만 그렇게 있어도 상당히 강렬한 경험을 선사하는 5분이 될 것 같죠.

그래서인지, 이 퍼포먼스 중에 사람들은 기묘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5분도 못 버티고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갑자기 토를 하기도 하죠.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게 웃고, 또 눈물을 흘립니다. 관객들이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동안, 마리나는 요지부동으로 앉아 그저 변함없이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어요. 딱…한순간만 제외하면 말이죠. 단 한 번, 마리나는 움직였습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죠.


한 남자가 마리나 앞에 앉았을 때, 마리나는 동요했습니다.

마리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는, 마리나를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그건 마리나도 마찬가지였죠.

두 사람은 그날 초면이 아니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울라이.

한때, 마리나의 연인이자 동료 아티스트였죠.


그들은 소울메이트처럼 12년을 함께하고, 1988년도에 결별했습니다. 연인으로 지내는 동안 14편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The Lovers(연인)>였습니다. 그건 그들이 자신들의 이별과 헤어짐을 예술로 승화한 작품이었죠. 연인 관계의 끝ㅡ그것을 퍼포먼스 예술로 이렇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90일 동안 만리장성의 다른 끝에서 걷기 시작하죠. 그 길은 이어져 있기에 중간에 한 번은 만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마침내 마주쳤을 때, 그들은 포옹을 나누고 그대로 서로를 스쳐 다른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퍼포먼스는 원래 두 사람의 결혼을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그들이 빨리 걷는다면 그만큼 결혼을 앞당길 수 있었죠. 그런데 그들이 헤어지기로 결론을 내린 순간, 그 퍼포먼스는 이별을 위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2500km에 달하는 대장정을 오르내리는 건, 신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마음이었죠. 그들은 자주 멈추어 서고, 또 느려졌고, 때론 걸으면서도 울었습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엔 같은 문장이 맴돌았죠.


우리는 어디서부터 엇갈리고 만 걸까? 


마리나와 울라이. 두 사람의 생일은 11월 30일로 같았습니다. 운명의 장난 같았죠. 한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걷고 있다니.


만리장성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흘렀죠. 

22년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재회했습니다.

관객들이 시켜보는 가운데 MOMA 전시장에서 마주 앉게 된 겁니다. 울라이는 마리나의 전시장을 찾아갔고, 마리나는 울라이를 바로 알아보았죠. 퍼포먼스 중이던 마리나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규칙을 깼습니다. 손을 뻗었죠. 울라이와 손을 맞잡았죠. 그들은 웃었고 또 울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죠. 


그날의 재회 이후, 그들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짚어 보면 마리나의 인생 전체가 마치 행위 예술의 순간들 같죠. 마치 그녀가 예술가라서 더욱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마리나가 퍼포먼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의 삶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마리나가  그 사실을 관객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싶기 때문에 관객들을 계속 자신의 퍼포먼스 작품 속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는데, 점원과 눈이 마주친다면 그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을 떠올려보세요. 그러면 비로소, 그 평범한 눈 마주침도 평범하게 느껴질 수 없죠. 바로 여기에 예술이 있습니다. 당신이 수없이 지나쳐온 이 평범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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