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두 번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난다. 이번 겨울 모임에서는 친구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아들을 대학에 보낸 친구가 밥을 샀다. 작년에 재수를 하여 원하던 학교, 원하던 과에 가서 다 같이 축하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밥을 먹었다.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진로 문제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한 친구는 서울대 다니는 딸을 하버드에 유학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치대에 들어간 아들 자랑을 슬쩍 비추며 딸래미는 공사를 준비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자식 얘기가 나오면 난 벙어리가 되고 만다. 얼마나 열심히 키우고 정성을 들였으면 아이들이 저렇게 부모 뜻대로 자라주는가 싶어 부럽기도 하고 남들 다 해내는 그 일을 나만 못한 것 같아 스스로 죄스럽기도 하다.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은 클럽에서 디제이로 일한다.
어려서는 운동회의 단체체조도 마지못해 따라 할 만큼 몸 쓰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대학에 입학한 뒤로 일이 년은 클럽에서 살다시피 했다. 설마 춤추는걸 즐기는 건 아닐 테고 유흥에 빠져 사는구나 싶어 걱정도 많았다. 그러더니 어느 날 말끝에 자기가 홍대의 한 클럽에서 여자 중 춤을 제일 잘 춘다고 슬쩍 자랑했다. "네가? 진짜?" 남편도 나도 놀라 어디 헌번 춰보라 했더니 쑥스러워하며 발동작만 보여주는데 잠깐이지만 그 재간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을 낳는 게 아니라더니 딸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분야에 흥미를 느끼며 나름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 다니며 열심히 알바 해서 모은 돈은 춤과 디제잉을 배우는 데 쓰고 학업은 명색만 유지했다. 휴학도 몇 번 하면서 디제이 알바도 하더니 작년 가을부터는 클럽의 막내 디제이로 정식 취업했다.
자식을 트로피 삼을 생각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 없지만 저녁에 나가 아침에 퇴근하는 직업을 가지리라고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위험하고 불안해 보였다. 엄마 입장에서야 당연히 전공 공부 열심히 하여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서 9to6의 평범한 삶을 사는 걸 보고 싶었지만 머리가 큰 자식과의 갈등은 틈만 키울 뿐,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연속 방송하는 <스카이캐슬>을 보면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우울했던 기분을 그나마 위로받았다면 너무 가벼운 감상일까?
자식을 천하제일의 일등짜리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적나라하고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드라마에도 우리 딸과 바슷한 일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하버드대생 행세를 하다가 발각되는 차세리가 바로 클럽 MD인 것이다.(클럽에서 일을 한다는 게 그처럼 극단적인 연출에나 어울린단 뜻인지도 모르겠다.)
내 딸과는 여러 면에서 디테일의 차이가 있지만 나의 감상 포인트는 차세리의 엄마가 딸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가족의 자랑이었던 딸의 실체를 알고 배신감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던 엄마는 딸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아빠에게 "우리 세리는 클럽 MD야. 기획, 마케팅, 고객 유치까지 다하는 프로페셔널! 얼마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앤데" 라고 격렬하게 외친다. 물론 이런 외침이 나오기까지 엄마는 이불 속에서 울고 딸의 방을 보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 역시 클럽 디제이로서의 딸을 받아들이기까지 숱한 마음고생의 시간을 거쳐야 했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연말을 지나면서 딸아이가 보내온 카톡엔 '디제이로서 입지 다지기'라는 올해의 목표를 어느 정도는 성취한 것 같아 뿌듯하다는 고백이 담겨 있었다.
그래, 무엇을 하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네가 행복하면 되는 거지 싶어 나도 격려의 답글을 보냈다.
그저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걷고 있었구나 싶어 기특하기도 했다.
친구 딸의 하버드 유학이 확정되고 공사 합격 소식이 전해지면 또다시 비교의 늪에 빠져 냉가슴을 앓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리가 말했듯이 남들 눈에 잘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게 뭐가 중요한가. 자기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됐지.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건, 즐겁게 살아가는 딸을 바라보며 같이 행복해하는 것 정도 아닐까 싶다. 물론 욱하는 순간이야 시도 때도 없이 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