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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캣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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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트린 Jan 20. 2019

스티로폼 겨울집으로도 행복하지

우리 아파트는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재활용품을 수거한다.

남편은 재활용품을 버리러 갔다가도 눈에 띄는 물건이 있으면 주워 와 언젠가 소용이 될 그날을 위해 집 안 곳곳에 모셔두었다. 반면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은 미련없이 정리해 버리는 스타일인 나는 남편이 그런 물건을 주워 오면 화를 내거나 모른 척하고 있다가 몰래 가져다버렸다.

TV에 집을 쓰레기장처럼 만들고 사는 사람들 사연이 나오면 나는 당신도 저런 호더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 놀렸고 남편은 그런 나를 두고 자기도 쓸모없어지면 내다버릴 사람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누군가 농구장 옆 화단에 실내용 개집을 가져다놓았다. 버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 몰래 버린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고양이들이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가져다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고양이 삼총사는 그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평소 같으면 누가 이런 개집을(그것도 이렇게 눈에 잘 띄는 빨간색 개집을) 여기에 버렸나 투덜거리며 처리 방법을 고심했겠지만 고양이들이 잘 써주니 개집을 가져다놓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집에서 잠자고 있던 무릎담요를 가져와 한 겹 보탰다.


아침에 밥을 주러 가보면 아직은 나를 무서워하는 고돌이가 후다닥 튀어나올 때도 있었고 낮에는 삼총사가 번갈아 앉아 털을 고르기도 했다. 푹신한 개집에 무릎담요까지 깔려 있으니 잠 많은 고양이들의 졸음쉽터로도 딱이었다.

문제는 비라도 한번 오면 완전히 젖어 버려 담요부터 꺼내 싹 말리기 전까지는 다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집 전체를 비닐로 감싸주었지만 역시나 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침 겨울도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렇다면 제대로 된 집을 만들어주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고양이 겨울집의 가장 좋은 재료는 역시 가볍고 따뜻하며 눈비에도 젖지 않는스티로폼 박스다. 그런데 박스를 구하려면 화요일 저녁에 분리수거장을 어슬렁거려야 했다.

그렇게 남편에게 하지 말라 말리던 일을 하며 사람들 사이를 오가려니 뭔가 어색하고 우습기도 했다.

남편은 캣맘 노릇 하더니 안 하던 짓을 다 한다면서도 주워 온 스티로폼 박스로 솜씨 좋게 길고양이 집을 만들어주었다.



먼저 스티로폼 박스 안을 단열시트지로 채워주고

                                                                                                                                                                                                                                      

뚜껑과 본체를 청테이프로 고정한 뒤 외벽도 단열시트로 둘러주었다.

                                                                          

이렇게 부탁의 말씀을 써 붙이면 치우려다가도 한번쯤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뽁뽁이로 다시 한번 마감하되 고양이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입구는 터주었다.  남은 스티로폼 조각으로 받침을 대주면 눈이 많이 쌓여도 안으로 눈이 들어가지 않는다.


안 쓰는 이불까지 깔아 한겨울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겨울집을 들고 그동안 물색해둔 은신처에 사람들 몰래 설치해주니 삼총사도 마음에 드는지 겨우내 그곳에서 자는 눈치였다.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고 일어나는것이 미안하게만 느껴지는 겨울, 나는 그렇게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냈다.



요즘 우리집 이불장엔 낡고 변색된 담요와 오래된 솜이불이 버려지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홑청을 뜯어 솜뭉치를 조금씩 덜어 넣고 꿰매주면 겨울집에 안성맞춤인 폭신한 방석이 만들어진다. 두부가 담겨 있던 플라스틱 포장도, 스티로폼이나 포장지로 사용되었던 뽁뽁이도 바로 재활용품 상자로 직행하지 않는다. 전 같으면 한번 쓰고 가차없이 버릴 물건들이지만 고양이들의 밥그릇이나 물그릇, 또는 보온재로 유용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하니 그걸 꼭 캣맘이 되어서야 깨달았냐며 은근히 승리의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취향이나 성격이야 사람마다 다 다른 법,  오랫동안 고집해왔던 스타일을 꺾기까지는그만큼의 성장이나 변화가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강아지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다른 누군가를 관심 갖고 돌본다는 건 그렇게 스스로의 경계를 넓히는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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