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몇 번의 기적을 만날까? 뉴스나 영화를 보면 그저 별일 없이 사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순간은 극히 드물 것이다.
방치된 늙은 개가 좋은 주인을 만나 마당 넓은 집에서 살 확률도 그런 기적의 확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동화 속 해피엔딩에서나 가능한 기적.
2년 전 겨울, 장사하던 상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자 가구점 사장님은 몇 가지 물품을 남겨두고 가게를 이전했다. 주차장에서 묶여 지내다가 일주일에 두 번씩 나와 산책을 하게 된 열네 살 늙은 개도 주차장에 남겨졌다.
사장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쯤 들르는 눈치였고 늙은 개 흰순할먼은 주차장 개집에서 홀로 겨울을 났다.
물을 부어주고 돌아서면 몇 분도 안 돼 얼어버리는 날씨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물과 사료, 30분의 짧은 산책이 전부였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 매일 잠깐씩 흰순할먼을 찾아갔다.
그렇게 석 달여가 지나고 봄이 왔다.
흰순할먼은 한 살 더 먹어 열다섯 살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걸음걸이엔 힘이 빠지고 눈빛은 더욱 쓸쓸해졌다. 어쩌면 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동물보호협회나 SNS 그리고 온갖 지인을 동원하여 흰순할먼이 머물 만할 곳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늙고 덩치도 있는 잡종견이 갈 만한 곳은 없었다.건물의 강제집행이 시작돼서 정말 갈 곳이 없어지면 그땐 어째야 하나, 우리 집 중문 밖에라도 데려다놓을까 남편에게 의논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가 4마리나 있는 우리 집에선 동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느 주말 오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구점 주차장에 갔는데 개집이 비어 있었다.
놀란 마음에 허둥대며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바쁘게 돌아오는 옆가게 사장님을 만났다. 흰순할먼과 산책에 나서면 "잘 다녀와라." 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주던 분이었다.
나를 본 그분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흰순할먼이 갈 곳이 생겨 지금 그곳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장님의 친구분으로 마침 얼마 전 키우던 개를 잃어 흰순할먼의 상황을 듣고 선뜻 키우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사장님과 함께 찾아간 그 집은 꿈에서나그려볼 만한 곳이었다.
한적하고 넓은 마당과 나무 그늘, 그리고 어느새 준비된 깨끗한 개집과 이불, 그리고 길게 묶은 목줄까지.
마당에 들어서니 가족들이 평상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참 평화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너무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은 그분들은 담담하게 웃으며 개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오라고 말해주셨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서는 어제만 해도 세상 다 산 것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흰순할먼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곳이라고, 나 이렇게 좋은 집 생겼다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만큼 기쁘고 행복한 풍경이자, 겨우 하루 사이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노견이 입양 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흰순할먼을 잠깐씩 돌보면서도 나 역시 이 늙은 개가 입양을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첫 주인에게는 학대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두 번째 주인에게는 버림받다시피 방치당한 이 개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이 길거리나 개장수, 또는 보호소에서의 안락사가 아니기만을 희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말없이 관심을 가지고 돌봐준 많은 분들의 애정이, 없던 길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가서 본 흰순할먼은 목욕을 한 듯 깨끗한 모습이었고 그 옆에서는 손주뻘 되는 어린 강아지가 흰순할먼보다 더 격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쓸쓸해 보이던 흰순할먼의 얼굴은 어느새 웃는상으로 변해 있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자랑하고 싶은 기억이다.
그리고 흰순할먼의 기적은 열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생생한 현재 진행형이다.
이것이 말년복 넘치는 댕댕이의 진정한 견생 역전 아닐까.
(*<이웃집 늙은 개의 첫 산책>, <사는 게 힘들어도, 산책은 계속된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