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철창을 부수고 야생으로

by 연구소장

[천명대학교 의과대학, 제1 실습실]


새벽 4시.


창밖에서는 가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실습실 안은 여전히 대낮처럼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100명의 학생들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밑은 퀭하게 들어갔고, 가운에서는 쩔어버린 땀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했다.


"매듭(Knot)이 느슨해! 다시!"


백강우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꾸벅거리던 학생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돼지 내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구석에서 묵묵히 봉합 연습을 하던 한수진이 메스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앞에는 완벽하게 봉합된 돼지 심장이 놓여 있었다. 12년 차 PA 간호사의 내공이 담긴, 웬만한 교수보다 더 정교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선배님, 완벽한데요? 벌써 10개째예요."


옆에서 쪽잠을 자던 민도현이 부스스 일어나며 감탄했다. 한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냥 고기덩어리야."


"네?"


"살아있지 않잖아. 피가 돌지도 않고, 심장이 뛰지도 않아. 내가 아무리 예쁘게 꿰매봤자, 이건 죽은 고기일 뿐이야."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린 지금 기술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니야. 의사가 되려는 거지.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면서, 그 생명을 붙잡는 감각... 그게 없으면 우린 영원히 가짜야."


실습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것은 여기 있는 100명 모두가 느끼는 불안감이었다.


지옥주 2주 차. 그들은 이론과 모형 실습에서 이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법이라는 거대한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면허도 없는 것들이 무슨 환자를 봐!"


"불법 의료 행위 신고한다!"


학교 정문 밖에서는 여전히 의사협회에서 보낸 감시단이 캠코더를 들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 학교를 무자격자 양성소로 규정하고, 학생 하나라도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들은 영원히 실습실의 유령으로 남을 판이었다.


[총장실]


나는 CCTV 화면을 통해 축 늘어진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계가 왔군요."


정혁 교수가 씁쓸하게 말했다.


"기술은 늘었지만, 임상 경험이 전무합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실제 환자가 주는 긴박함과 예측 불가능성은 배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방법이 없지."


내가 말을 받았다.


"대학병원 실습? 꿈도 못 꿔. 우리가 학생들 데리고 병원 들어가면 바로 복지부 감사 나올 거야. 그렇다고 학교 안에서 불법 진료소를 차릴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이대로 가면 이들은 '수술 잘하는 기계'는 될지언정, '사람 살리는 의사'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목표인 '아버지의 제국을 무너뜨릴 군대'로도 부족했다.


그때, 김 장로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파일이 들려 있었다.


"이사장님! 찾았습니다!"


"뭐를?"


"회장님... 아니, 천무성 교주가 최근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곳이요. 국내가 아니었습니다."


김 장로가 파일을 책상 위에 펼쳤다. 세계 지도와 함께 복잡한 자금 흐름도가 그려져 있었다.


"파이탄 공화국(Republic of Paitan). 동남아시아 내륙에 있는 신생 군벌 국가입니다."


"파이탄?"


"네. 겉으로는 '천명 바이오'가 인도적 차원에서 의약품을 지원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품목이 좀 이상합니다."


김 장로가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품목: 고농축 영양제, 근육 강화제, 대용량 혈액 냉장고, 그리고... 특수 격리 컨테이너]


"영양제랑 근육 강화제라..."


냄새가 났다. 아주 구린 냄새가.


전쟁터에 웬 근육 강화제? 그리고 혈액 냉장고가 왜 수천 개나 필요하지?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파이탄 내전이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천명 바이오가 지원하는 지역에서만 유독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소문?"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병사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들이 나타났다고요."


빙고.


아버지는 그곳을 테스트 베드(Test Bed)로 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생체 실험, 인간 병기 프로젝트를 그 무법지대에서 진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혁 교수."


"네, 이사장님."


"우리 애들, 실습장 필요하다고 했지?"


"네? 네..."


"찾았어. 지구상에서 제일 환자가 많고, 의료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곳."


나는 지도 위의 파이탄 공화국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숨겨둔 보물창고가 있는 곳."


"설마... 거기로 가시게요? 거긴 전쟁터입니다! 학생들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정혁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전쟁터니까 가는 거야.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배를 가르고 꿰매봐야 진짜 의사가 되지. 그리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에 아버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진실'이 있어. 그걸 가져와야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 장로."


"예!"


"비행기 하나 사자."


"예? 비행기요?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사람 태우는 여객기 말고, 화물기(Freighter). 제일 큰 걸로. 3일 안에 띄워야 하니까 중고 매물 알아봐."


"화물기요? 그걸로 환자를 어떻게 봅니까?"


"누가 비행기를 개조한대? 그냥 병원을 통째로 실어버리면 되지. 미군이 쓰다 버린 야전 병원 컨테이너, 그거 다 사들여."


나는 창밖의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갇혀있는 맹수들을 야생으로 풀어줄 시간이다."


[3일 후, 천명대 대운동장]


새벽 체조를 위해 모인 100명의 1기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구보를 뛰어야 할 시간인데, 단상 앞에는 여행용 더플백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었다.


"전체 차렷!"


백강우의 구령에 학생들이 줄을 맞췄다.


"오늘부로 기초 군사... 아니, 기초 의학 훈련은 종료한다."


내 선언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벌써요? 아직 해부학 진도도 다 못 나갔는데요?"


"나머지 공부는 현장에서 한다. 너희들, 매일 돼지 내장만 만지니까 지겹지? 살아있는 사람 살리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지?"


학생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진짜 실습."


나는 뒤쪽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 참혹한 영상이 떴다. 폭격을 맞아 무너진 건물, 팔다리가 잘린 채 울부짖는 아이들, 그리고 치료해 줄 의사가 없어 썩어가는 상처를 움켜쥔 사람들.


파이탄 공화국의 참상이었다.


"이곳에는 법도 없고, 의사협회도 없고, 너희를 무자격자라고 욕하는 사람도 없다. 오직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환자들뿐이다."


나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한국에서는 너희가 메스를 잡으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저기서는 너희가 신이다. 너희 손끝 하나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해."


침묵이 흘렀다.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사명감이 교차하는 침묵이었다.


그때, 박철민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무장은... 지급합니까?"


역시 특전사 출신. 포인트가 다르다.


"개인 화기는 없다. 우린 의사니까. 대신 보안팀이 너희를 지킬 거다. 너희 무기는 메스와 청진기다."


"가겠습니다."


박철민이 주저 없이 말했다.


"여기서 모형이나 닦고 있느니, 차라리 지옥 가서 구르는 게 낫겠습니다."


"저도 갑니다."


한수진이 나섰다.


"더 이상 '가짜' 소리 듣기 싫습니다. 제 손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갑니다!"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굶주린 맹수들이 철창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좋아. 전원 탑승 준비."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인천공항 화물 터미널로 이동한다. 너희 전용기가 기다리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화물 터미널]


버스가 공항 활주로 외곽, 민간 화물 구역에 들어서자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눈앞에 거대한 괴물이 서 있었다.


보잉 747-400F.


창문이 하나도 없는 매끈한 은색 동체. 꼬리 날개에는 붉은색 십자가 마크가 급하게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동체 옆면에는 [CHUNMYUNG MEDICAL CORPS]라는 글씨가 스티커로 붙어 있었다.


"이게... 우리 비행기입니까?"


민도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어. 대한항공에서 퇴역하려던 화물기를 현찰 박치기로 가져왔지."


"근데... 창문이 없는데요? 안에서 숨은 쉴 수 있습니까?"


"숨은 쉴 수 있지. 근데 안락함은 기대하지 마라."


나는 트랩(계단)을 가리켰다.


"타보면 알아. 3일 만에 병원을 띄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학생들이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트랩을 올랐다.


기내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이게 뭡니까?"


내부는 일반적인 비행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텅 빈 깡통 같은 화물칸.


그 바닥 레일 위에 국방색 컨테이너 10개가 일렬로 결속(Locking)되어 있었다.


나는 컨테이너를 하나씩 두드리며 걸어갔다.


"미군이 쓰려다 불용 처리된 '이동식 전개형 의무 모듈(DEPMEDS)'이다. 김 장로가 국방부 뒷구멍으로 급하게 빼돌려왔지."


나는 첫 번째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치이익-


기압 조절 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내부가 드러났다. 좁지만 완벽하게 갖춰진 수술실이 보였다. 무영등, 마취기, 수술대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1호차부터 4호차는 수술실. 5호차는 중환자실(ICU). 6호차는 약제실 및 검사실."


나는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비행기를 개조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병원을 통째로 실어버렸지."


"허..."


박철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완전 야전 스타일이네요. 특전사 파병 갈 때나 보던 건데."


"맞아. 우린 지금 여행 가는 게 아니니까. 시트도 없고, 기내식도 없다. 그냥 틈나는 대로 컨테이너 사이사이에 침낭 깔고 자야 해."


기내는 시끄러웠다. 화물기 특유의 엔진 소음이 여과 없이 들려왔고, 바닥에서는 기름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여 났다. 하지만 그 거칠고 투박한 분위기가 오히려 학생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사장님."


한수진이 수술실 컨테이너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장비는... 최신형입니까?"


"당연하지. 껍데기는 고철이라도, 알맹이는 최고급으로 채웠다. 최신형 복강경, 이동형 CT, 혈액 냉장고 빵빵하게 돌리고 있어. 전력? 화물기 보조 동력 장치(APU) 풀가동해서 끌어다 쓰고 있다."


나는 비행기 벽면에 붙은 인터폰을 잡았다.


"최 집사, 이륙 준비해. 화물칸 여압 장치 체크하고."


[라져. 3분 뒤 이륙합니다. 다들 화물 결속 장치 꽉 잡으십쇼. 화물기라 이륙할 때 좀 셉니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자, 각자 위치로!"


내 고함에 학생들이 움직였다.


누구는 수술실 컨테이너 안으로, 누구는 약제실로.


그들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거대한 강철 새의 뱃속에 탑승한 '의료 용병'들이었다.


"뜬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중력가속도(G-Force)가 몸을 눌렀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화물칸, 오직 비상등만이 붉게 빛나는 그곳에서, 100명의 괴물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전율했다.


진짜 '야생'으로 가는 편도 티켓이었다.


제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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