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탄 공화국 북부, 천명 의료지원단(CMC) 베이스캠프]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정글의 아침은 기묘했다.
밤새 울어대던 벌레 소리가 뚝 그치고, 대신 발전기 돌아가는 웅웅거리는 소음만이 베이스캠프를 채우고 있었다.
화물기 램프 앞에 간이로 설치된 야전 테이블. 나는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휘휘 저으며 눈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밤새 50명의 '좀비 병사'들과 사투를 벌인 1기생들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컨테이너 그늘 아래, 비행기 바퀴 옆, 심지어 맨땅에 라면 박스를 깔고 자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얀 의사 가운은 흙탕물과 피로 얼룩져 걸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며 짐을 싸지는 않았다.
극한의 상황. 인간의 밑바닥을 보고 나면, 껍데기 같은 자존심은 증발하고 오직 생존 본능과 본질만이 남는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샌님'에서 '야생동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사장님. 결과 나왔습니다."
검사실 컨테이너(6호차)에서 밤을 샌 민도현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혈액 분석 차트가 들려 있었다.
"역시나입니까?"
"네. 예상이 맞았습니다. 아니, 예상보다 더 악질입니다."
민도현이 차트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혈액 내에서 미확인 합성 단백질이 검출됐습니다. 구조를 보아하니, 중추신경계의 도파민 수용체를 강제로 열어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통증은 차단하고, 공격성은 극대화하고."
"부작용은?"
"세포괴사(Necrosis)요. 이 약, 근육을 펌핑시키는 대신 혈관을 녹여버립니다. 어제 수술한 병사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어요. 길어야 한 달? 그 뒤엔 전신 장기 부전으로 사망합니다."
"일회용품이군."
나는 씁쓸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아버지는 사람을 건전지가 다 될 때까지 쓰고 버리는 장난감 취급하고 있었다.
"이 약의 출처, 천명 바이오가 확실합니까?"
민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우리 아버지가 만든 '기적의 비타민'이지."
"미친... 이건 의료가 아니라 학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 거야. 청소하러."
그때였다.
베이스캠프 외곽 경계선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멈춰! 손 들어!"
"사격 중지! 어린애야!"
박철민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달렸다. 백강우와 보안팀이 뒤따랐다.
정글 숲과 활주로가 만나는 경계선.
그곳에 한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앙상하게 마른 몸에는 환자복 같은 헐렁한 옷이 걸쳐져 있었고, 맨발은 찢어져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소년의 등이었다.
"이게... 뭡니까?"
먼저 도착한 한수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의 척추 라인을 따라 쇠못 같은 금속 단자(Port)들이 박혀 있었고, 그 주변 피부는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소년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의 눈동자는 라만 장군의 병사들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아이, 실험체야."
나는 직감했다. 이 아이는 라만 장군의 부하가 아니었다. 정글 깊은 곳, 천명 바이오의 비밀 연구소에서 탈출한 '진짜 모르모트'였다.
"옮겨! 1호 수술실로! 당장!"
[CMC 1호 수술실 컨테이너]
"환자명 미상. 추정 나이 10세. 체온 40도. 맥박 160."
좁은 컨테이너 수술실 안이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소년은 수술대 위에서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마취과 레지던트 출신인 이지영이 마취 가스를 주입했지만, 소년의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진정제가 안 먹혀요! 대사 속도가 너무 빨라요!"
"이 금속 단자들... 척추신경이랑 연결되어 있어."
나는 메스를 들고 소년의 등을 살폈다.
"이건 약물 주입구가 아니야. 데이터 포트(Data Port)다.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필요하면 전기 충격을 줘서 통제하는 목줄 같은 거라고."
"세상에...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한수진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감상은 나중에 해. 이거 제거한다. 신경 건드리면 이 아이 하반신 마비야. 집중해."
나는 마이크로 현미경을 끌어당겼다.
금속 단자는 척추뼈 사이를 파고들어서 신경 다발(Cauda Equina)과 얽혀 있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뇌척수액이 터져 나올 상황이었다.
"박철민, 환자 꽉 잡아. 움직이면 끝이야. 민도현, 바이탈 체크하면서 에피네프린 준비해."
"네!"
수술이 시작됐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컨테이너 안이었지만,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이건 단순한 외과 수술이 아니었다. 폭탄 제거 작업이었다.
'천무성...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간 거냐.'
금속 단자를 하나씩 제거할 때마다 소년의 몸이 튀어 올랐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위잉- 위잉-
[코드 레드! 코드 레드! 적군 접근 중!]
[정부군 헬기다! 전원 엄폐!]
백강우의 다급한 무전이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동시에 컨테이너가 쿵 하고 울렸다. 근처에 포탄이 떨어진 것이다.
"이사장님! 공습입니다!"
한수진이 비명을 질렀다. 수술대의 조명이 깜빡거렸다.
"움직이지 마!"
나는 소리쳤다. 내 손은 여전히 소년의 척추 신경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손을 빼면 신경이 끊어진다.
"수술 안 끝났어. 우린 안 나간다."
"하지만 폭탄이...!"
"죽어도 여기서 죽어. 메스 잡은 손 떼지 마."
나의 서늘한 눈빛에 한수진이 입술을 깨물고 다시 리트랙터(견인기)를 고쳐 잡았다.
쾅! 콰앙!
폭발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헬기의 로터 소리가 머리 위를 맴돌았다.
두두두두두!
기관포 소리가 컨테이너 철판을 두드렸다.
"젠장, 백강우! 뭐 하는 거야! 저 파리 새끼 안 잡고!"
나는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베이스캠프 외곽]
"야 이 개새끼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총질이야!"
백강우는 반쯤 미쳐 있었다.
그는 험비 위에 거치된 M60 기관총을 잡고 하늘을 향해 난사했다.
정부군의 공격 헬기(Mi-24 하인드) 한 대가 베이스캠프 상공을 선회하며 위협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수술실 안에 있는 소년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살아있는 증거'라는 것을. 라만 장군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흩어졌지만, 천명의 보안팀은 물러서지 않았다.
"팀장님! 로켓! 로켓포 쓰시죠!"
부팀장이 RPG-7 발사기를 들고 뛰어왔다.
"안 돼! 빗나가서 비행기 맞으면 우린 집에 못 간다고!"
백강우는 이를 갈았다.
"유인한다.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놈이 내려오면 집중 사격해!"
백강우가 험비의 시동을 걸었다. 그는 활주로 한복판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헬기의 기총 소사가 험비의 뒤를 쫓았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여기다! 나를 봐라!"
백강우가 험비를 급회전시키며 헬기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도발에 넘어간 헬기가 기수를 낮추며 험비 쪽으로 돌진했다.
"지금이야! 쏴!"
매복해 있던 보안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동시에, 활주로 구석에 숨어있던 박철민이 튀어 나왔다. 그는 수술실에서 환자를 잡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의 손에는 수술용 산소통과 조명탄이 들려 있었다.
"먹어라!"
박철민이 산소통을 헬기의 진로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조준 사격으로 산소통을 맞췄다.
펑-!
고압 산소통이 폭발하며 거대한 불덩어리가 헬기의 시야를 가렸다. 갑작스런 폭발에 당황한 헬기 파일럿이 조종간을 꺾었다. 헬기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정글 숲으로 추락했다.
쿵- 콰아앙!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이스 샷!"
백강우가 환호했다.
[다시 1호 수술실]
밖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잠잠해지자, 수술실의 진동도 멈췄다.
"상황 종료된 것 같군."
나는 마지막 금속 단자를 뽑아냈다.
딸그락.
피 묻은 금속 칩이 트레이 위에 떨어졌다.
"신경 반응 체크해."
"발가락... 움직입니다! 신경 살아있어요!"
민도현이 환호했다.
소년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나는 땀에 젖은 수술모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다. 마무리하고, 이 칩(Chip) 챙겨. 분석해야 하니까."
수술실 문을 열고 나가자, 화약 냄새가 훅 끼쳐왔다.
활주로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학생들은 겁에 질려 컨테이너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망치거나 울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보았다. 자신들의 동료(박철민)와 교수(백강우)가 목숨을 걸고 병원을 지켜내는 모습을. 그리고 폭격 속에서도 수술을 멈추지 않은 나를 보았다.
"다들 괜찮나?"
내 물음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님."
한 학생이 물었다.
"방금 그 헬기... 정부군 맞습니까? 왜 의료진을 공격하는 겁니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헬기의 파편을 발로 찼다.
"우리가 건드린 게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는 증거지."
나는 수술실에서 꺼내온 피 묻은 금속 칩을 들어 보였다.
"이 안에, 놈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장부'가 들어있을 거다. 정부군, 반군, 그리고 천명 바이오가 얽힌 아주 더러운 장부."
그때, 정글 쪽에서 라만 장군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닥터 천! 괜찮소? 정부군 이 미친놈들이..."
"연기 그만하시죠, 장군."
나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당신, 알고 있었잖아. 저 헬기가 올 거라는 거. 그래서 당신 병력들은 미리 숲으로 뺐고."
라만 장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릴 미끼로 쓴 건가? 정부군의 관심을 우리한테 돌리고, 당신은 뒤에서 잇속을 챙기려고?"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착각하지 마. 우리는 당신의 방패막이가 아니야.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해독제는 없다."
라만 장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의 기세, 그리고 정부군 헬기를 격추시킨 우리 보안팀의 화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알... 알겠소. 내 실수요."
"실수라니 다행이군요."
나는 뒤돌아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전원 휴식은 없다. 캠프 보수하고, 경계 강화해.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다."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어제의 그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던 초식동물이었지만, 이제는 사냥터의 냄새를 맡은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한수진, 박철민. 따라와."
"네?"
"저 아이가 깨어나면 물어볼 게 많아. 그리고..."
나는 정글 깊은 곳, 연기가 피어오르는 헬기 추락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서 살아남은 놈이 있다면 잡아와. 포로가 필요해. 놈들의 본거지, 그 '실험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니까."
이제 방어전은 끝났다.
우리는 메스를 들고, 적의 심장부를 향해 역공을 들어간다.
제1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