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브런치 글에서는 세종의 찬란한 업적을 해부했습니다. 태종이 피로 구축한 흑자 재정 위에서 세종이 어떻게 150만 헥타르의 농지를 일구고, 독자적 문자를 창제하며,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군사 기술을 확보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외척 숙청이 만들어낸 정치적 무균실이 세종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토양이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성군의 이면을 들춰보려 합니다.
세종의 업적이 찬란할수록, 그 뒷면에 드리운 그림자도 짙습니다.
영월 청령포의 차가운 강물 위로 열여섯 소년의 시신이 버려졌습니다. 곤룡포를 입었던 어린 몸은 역적의 시체로 전락해 거두는 이 하나 없이 방치되었습니다. 서슬 퍼런 세조의 칼날 앞에 백성들은 숨죽인 채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둠을 틈타 영월의 호장 엄흥도만이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을 지게에 짊어지고 강가로 나섰습니다.
조선 제6대 국왕 단종. 그의 생애는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현덕왕후의 죽음이라는 저주로 시작되어, 숙부의 칼날에 쓰러진 버려진 시신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이 비극의 원인을 수양대군의 끝없는 탐욕에서 찾곤 합니다. 당연한 해석입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사약까지 내린 숙부가 1차 가해자니까요.
그런데 카메라를 한 걸음 뒤로 빼면 전혀 다른 풍경이 잡힙니다. 단종의 파멸을 설계한 진짜 건축가는 핏빛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가 아니라, 찬란한 르네상스에 취해 아버지가 세운 방어막을 스스로 해체한 할아버지 세종이었습니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개인의 야심이 빚어낸 돌발적 권력범죄가 아닙니다. 태종이 피로 구축한 '정치적 무균실'에 무임승차하여 과학과 문화라는 R&D 프로젝트에 모든 자원을 쏟아부은 세종이, 정작 조직의 내부 통제와 승계 시스템이라는 핵심 인프라를 방치한 대가로 후대에 청구된 멸문지화의 어음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창업자가 목숨 걸고 세운 회사를 물려받은 2세 경영자가 빛나는 신제품을 쏟아내며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부 감사 시스템은 방치하고, 자기 자식들한테 임원 자리를 나눠주며, 인사팀장 은퇴도 안 시키고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습니다. 정작 그 경영자가 세상을 떠나자 회사는 내부자 쿠데타로 박살이 납니다. 새로 앉힌 어린 후임 CEO는 아무런 방어막 없이 쫓겨났습니다.
세종과 단종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 구조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을 도륙하고 사병을 혁파하며 세자 외의 왕자들을 정치 현장에서 물리적으로 격리했습니다. 세종은 이 철통같은 통제선을 물려받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맹신한 나머지 아들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하사하는 기형적 조직을 설계합니다. 화려한 성취의 장막 뒤에서 자라난 2인자 그룹의 비수는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병약한 문종마저 단명한 뒤,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옥좌에 앉은 열두 살 손자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습니다.
단종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증조할아버지 태종이 무엇을 만들었고, 할아버지 세종이 무엇을 부쉈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골육상쟁의 끔찍한 비용을 몸소 치른 최고경영자입니다. 왕자의 난이라는 참혹한 내전을 겪은 그는 권력의 속성을 뼈저리게 통찰했습니다. 처남인 민씨 형제를 사약으로 청산하고 아들 세종의 장인 심온까지 고문 끝에 사사했습니다. 세자 외의 왕자들에게는 어떠한 정치적 지분도 허락하지 않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력을 국가 시스템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외척이 힘을 가지면 왕권에 좋을 일이 없다는 원칙을 피로 새긴 것입니다. 잔혹하되, 빈틈없는 리스크 관리였습니다.
세종은 이 무균실을 통째로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뿌리까지 뽑아낸 외척의 간섭, 처가의 청탁, 사병의 위협이 모조리 사라진 공간 위에서 오직 학문과 과학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의 월급, 천문 기구를 만드는 구리 값, 훈민정음을 찍어내는 종이와 먹 값. 전부 태종이 단군 이래 유일하게 기록한 흑자 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가 피 묻혀가며 채워둔 통장을 물려받아 신나게 연구비로 쓴 겁니다.
문제는 세종이 이 무균실의 벽을 스스로 허물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태종은 세자 외의 아들들에게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자 문종 외에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국정에 깊숙이 개입시키며 막강한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세종의 입장에서 이해 못 할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세자 문종은 병약했습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후계자 하나에 국가의 운명을 걸기엔 리스크가 컸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실제로 뛰어난 인재들이었습니다. 수양은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만능형이었고, 안평은 당대 최고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예술가형 왕자였습니다. 유능한 아들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기회를 주면서 통제 장치를 함께 설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종이 피로 세운 '종친 격리의 원칙'은 세종의 가족주의적 낭만 속에서 형체를 잃어갔습니다. 왕의 형제들은 이전에 없던 강력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 나갔지만, 그 지분을 감시하고 회수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온 집안을 피바람으로 뒤엎어가며 만들어놓은 안전장치를, 아들이 '우리 집 애들은 다르다'는 믿음 하나로 전부 해제해버린 겁니다.
수양대군은 아버지가 하사한 합법적 권한을 자양분 삼아 사적 권력 자본을 맹렬하게 증식시켰습니다. 유교 경전, 병법, 풍수, 불교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학문 소양을 과시하며 조정 내부에서 발언권을 키워 나갔습니다.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해 아버지의 절대적 신임을 구매하는 동시에, 막후에서는 종친들의 지지를 흡수하며 비공식 권력 네트워크의 대주주로 떠올랐습니다.
왕실의 최고 어른 양녕대군은 술자리에서 홀로 취하지 않은 수양대군을 가리켜 진짜 호걸이라 선언했고, 임영대군과 신빈 김씨의 소생들도 그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만취해 쓰러진 자리에서 혼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왕자. 이 장면 하나가 수양대군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압축합니다. 술 한 잔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야심가였습니다.
세종의 방임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수양대군이 도첩 없는 승려를 체포하여 호송하던 관리를 호통치고, 칼을 벗겨 승려를 사적으로 빼돌렸습니다. 국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왕자가 사적으로 징벌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경찰관이 피의자를 연행하는데 회장님 아들이 와서 "야, 놔줘" 하고 빼간 격입니다. 대간들이 이 불법 행위를 고발하며 처벌을 요구했으나, 세종의 유산을 물려받은 문종은 형제간의 우애를 방패막이 삼아 이 사건을 묵인합니다. 최고 권력자의 감사를 면제받은 2인자 그룹은 공식 관료 조직의 지휘 계통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양대군의 처소는 왕자의 사저를 넘어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적 인큐베이터로 변해 있었습니다. 훗날 핏빛 쿠데타의 총설계자가 될 한명회는 경덕궁직이라는 보잘것없는 말단 관리 신분으로 감시망을 피하며 수양대군의 그림자 내각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세종이 살아있는 동안 수양대군은 학자와 효자의 가면을 유지했습니다. 불경을 번역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던 그의 머릿속은 이미 정적을 도륙하고 옥좌를 탈취할 핏빛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종의 조직관리 실패는 왕자들에 대한 방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관료 시스템 자체에도 구조적 결함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세종은 도덕적 결함을 묵인하는 성과 지상주의를 구사했습니다. 황희와 맹사성이 뇌물을 받고 부패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며칠 만에 복직시키며 면죄부를 발행했습니다. 대간들이 매관매직을 일삼은 자의 영의정 임명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도덕적 결점을 덮고도 남을 능력이 국가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그를 앉혔습니다.
세종의 판단에 일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훈민정음 창제, 대규모 농지 개간, 천문 관측 체계 구축, 군사 기술 혁신. 세종이 동시에 추진한 국책 사업의 규모는 전례가 없었고, 이 모든 프로젝트를 관리할 역량을 갖춘 관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황희라는 검증된 총괄 책임자를 놓치는 것이 당장의 국정 운영에 더 큰 리스크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예외가 관행이 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최고경영자가 부패 관료를 중용하면 조직 전체에 어떤 신호가 퍼질까요. '일 잘하면 뇌물 받아도 봐준다.' 이 메시지가 거대 관료제 내부에 퍼지면 감사의 잣대는 무너집니다. 왕자의 월권쯤 눈감아 주는 풍토가 조성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황희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부터 육신이 부서져라 열 번 넘게 사직서를 올렸는데도 세종은 요지부동으로 은퇴를 불허했습니다. 후계자를 양성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한 명의 탁월한 개인에게 모든 국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인재의 층위를 두텁게 키우지 못한 채 소수의 천재들을 쥐어짜는 인사 구조는, 그 천재들이 사라지는 순간 조직 전체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취약한 단일 실패 지점을 만들어냅니다.
세종이 물려준 것은 화려한 업적만이 아니었습니다. 견제와 감사가 마비된 관료 시스템, 막강한 권한을 쥔 종친 그룹, 그리고 그 모든 뇌관을 감당해야 할 병약한 후계자. 폭탄 꾸러미였습니다.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두 살 단종이 옥좌에 올랐습니다. 이 소년 최고경영자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후견인이 전무했습니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소헌왕후도 일찍 사망했습니다. 왕실 내부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어린 왕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어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문종은 승하하기 전 황보인, 김종서, 남지 등 고명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어린 단종을 위해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기형적 인사 제도를 고안합니다. 후보의 자질을 파악하기 힘든 단종을 대신해, 의정부에서 미리 적합한 후보 이름 위에 노란색 표시를 해두면 단종이 그 위에 점을 찍어 인사를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신하들이 골라놓은 보기에 왕이 도장만 찍는 구조입니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신하가 다른 신하에게 권력을 하사하는 꼴이 되어 의정부의 비대화를 불렀습니다.
이 구조에는 더 깊은 문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매일 노란색 표식 위에 영혼 없이 점을 찍는 행위의 반복은 어린 단종의 내면에서 스스로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자립 의지를 거세했습니다. 아버지 문종은 아들을 보호하고자 이 제도를 만들었지만, 부모의 맹목적인 선의는 권력의 냉혹한 역학 앞에서 아들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이 제도는 야심가에게 완벽한 명분을 선사했습니다. 황보인과 김종서가 실제로 부정부패를 저질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관료의 권력 독점을 합법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왕권을 농단한다는 프레임을 씌워 계유정난의 명분을 쥐었습니다.
권력의 진공 상태를 감지한 수양대군은 이 취약한 단일 실패 지점을 정확히 타격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세종과 문종 시절을 거치며 축적한 막강한 발언권, 한명회가 구축한 정보망과 사조직, 종친들의 지지라는 정치적 자본이 빠짐없이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방어막 없는 권력은 야심가에게 가장 쉬운 먹잇감입니다.
김종서를 필두로 한 조정 대신들은 종친에 의한 왕권 찬탈을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왕위에 대한 야심이 덜하다고 판단한 안평대군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동의 원칙을 숙지한 수양대군은 적이 진용을 갖추기 전에 움직입니다.
한명회의 설계는 치밀했습니다. 수양대군에게 명나라 사신인 고명사은사로 직접 떠날 것을 지시합니다. 가장 강력한 적수가 자리를 비우자 김종서와 안평대군 진영은 경계를 풀었습니다. 이 외교 행보는 명나라 조정에 수양대군이 실권자임을 각인시키는 정치적 선점 효과까지 창출했습니다. 심리적 이완을 유도한 연막 작전의 공백기에 한명회는 권람 등과 연대하여 타격 지점과 살생부를 완성합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계유정난이 터지는 와중에도 수양대군 일파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김종서와 황보인 역시 어린 단종 밑에서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표정사가 만들어낸 의정부의 비대화는 집현전 학사들의 눈에도 못마땅했던 겁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아야 할 지식인 집단이 관료 집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방관자로 머물렀다는 것, 이것이 황표정사라는 기형적 시스템이 초래한 두 번째 재앙입니다.
1453년, 계유정난이 터졌습니다. 수양대군의 심복 임어을운이 휘두른 철퇴가 김종서의 두개골을 부쉈습니다. 피신해 있던 김종서는 양정과 이흥상에 의해 끝내 참수당합니다. 안평대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끌려가 사사되었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군국대사를 좌우하며 대궐과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영화 '관상'은 바로 이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관상을 읽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역모의 기운을 읽어내지만, 결국 권력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멈추지 못합니다. 영화 속 관상쟁이의 패배는 개인의 통찰이 시스템의 결함을 이길 수 없다는 이 칼럼의 논지와 정확히 겹칩니다.
어린 단종은 숙부 일파의 집요한 압박 속에서 밤에 잠조차 이루지 못할 만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며 결국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합니다. 열두 살에 왕이 되어, 열넷에 왕을 빼앗겼습니다. 세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단종이 양위하자, 비통함을 참지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은 양위 소식을 듣고 울부짖으며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집현전 학사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꺾인 순간이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은 명나라 사신 환송 연회에서 별운검을 맡은 무사들을 활용해 세조와 한명회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별운검이란 임금의 좌우에서 큰 칼을 차고 호위하는 임시 벼슬로, 성승, 유응부, 박쟁이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세조의 심장을 타격할 완벽한 무대가 마련된 셈이었습니다.
연회 당일, 세조가 돌연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 배치를 취소합니다. 변수가 터진 순간, 무신인 성승과 유응부, 박쟁은 무리를 해서라도 거사를 즉시 강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현장에서 칼을 쥔 자들의 직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 등 문신들은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결행을 미루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판단이 결정적인 패착이었습니다.
거사가 연기되는 찰나, 조직 내부에는 공포가 번졌습니다. 지체된 결단은 가장 취약한 고리를 자극합니다. 김질이 거사 연기 바로 다음 날, 장인 정창손을 대동하고 세조를 찾아가 성삼문 일파의 계획을 낱낱이 팔아넘겼습니다. 단종 복위라는 불확실한 명분 대신, 자기 목숨이라는 확실한 자산을 선택한 겁니다.
모의에 가담한 사육신과 그 일가족 70여 명이 몰살당했습니다. 거사 실패 후 검거되지 않은 충신들은 스스로 목을 매거나 약을 먹고 자결했습니다. 이들의 부인과 딸은 공신들에게 하사되거나 노비로 끌려갔습니다.
처형된 성삼문의 집을 적몰했을 때 쓸 만한 재산은 일절 없었습니다. 특히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은 을해년 이후에 받은 녹봉은 한 톨도 쓰지 않고 따로 방에 쌓아두었습니다. 찬탈자의 봉급은 손대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피로 저항한 사육신 외에, 세조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하며 낙향한 선비들도 있었습니다. 훗날 생육신으로 불리는 이들은 부귀영화를 스스로 걷어차고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세조는 무력으로 신하들의 육신을 꺾었습니다. 그러나 피로 저항한 사육신과 침묵으로 저항한 생육신이라는 지식인의 거대한 집단 파업은, 그 정권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세조는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단종의 처가에서 왕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계획을 거짓으로 꾸며냈습니다. 이를 명분으로 상왕이던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냅니다.
단종과 가장 가까웠던 숙부는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었습니다. 세조는 이 마지막 보호자마저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처형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종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에게까지 사약을 내렸습니다. 단종을 향한 정리(情理)의 끈이 될 수 있는 모든 인물을 뿌리째 뽑아버린 것입니다.
금성대군의 처형을 빌미로 세조는 끝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공식 실록은 금성대군의 죽음 소식에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단종은 세조가 내린 사약을 거부했습니다. 숙부가 건네준 독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만큼은 자기 손으로 결정하겠다는 열여섯 소년의 선택이었습니다.
세조의 칼날은 시신 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종의 태실지를 파괴하고 왕실 족보에서 조카의 이름을 도려냈습니다. 백성들이 단종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단종 치세의 역사서를 왕의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하여 편찬했고, 계유정난과 단종 모살의 진실을 가해자의 시각에서 왜곡합니다.
훗날 단종이 복권되며 책 이름은 '단종실록'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여전히 수양대군을 '세조'로 우대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깎아내리는 가해자의 문법이 남아 있습니다. 겉포장만 바꾸고 내용물은 손대지 않은 셈입니다. 후대의 조정은 빼앗긴 왕의 이름표는 돌려주었으되, 훼손된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바로잡지는 못했습니다.
영월에 버려진 소년 왕의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단종은 역모 사건에 연루된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그의 시신을 거두는 행위는 곧 세조의 권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멸문지화, 즉 삼족이 몰살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조가 주조한 공포는 백성과 관료를 가리지 않고 전원을 침묵의 사슬에 묶었습니다.
오직 한 사내만이 그 사슬을 끊었습니다. 영월의 호장 엄흥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 시간을 그립니다. 청령포라는 고립된 유배지에서 버림받은 소년 왕과 그 곁을 지킨 사내가 함께 보낸 마지막 나날.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어린 군주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 곁에 남은 한 인간의 시선으로 따라갑니다.
그는 멸문지화의 공포를 뚫고 어둠 속에서 강가로 나섰습니다. 소년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그가 가져온 것은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관과 수의였습니다. 효를 위해 아껴두었던 물품을, 버림받은 어린 군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역사는 엄흥도의 내면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직함과 행동입니다. 그는 영월의 호장, 즉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습니다. 고위 관료가 아니었기에 한양의 정치적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신 그는 자기 관할 지역에 유배 온 어린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의 핵심부에서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사약까지 내리는 잔혹한 게임이 벌어지는 동안, 그 게임의 최종 피해자가 자신의 마을에 버려져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엄흥도에게 단종은 거대한 정치적 기호가 아니라, 그냥 억울하게 죽은 어린아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군신 간의 대의나 역사적 명분 이전에, 차가운 강바람에 내던져진 소년의 시신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 그것이 멸문지화의 공포보다 무거웠던 것 아닐까요.
그가 치른 비용은 파산 그 자체였습니다. 이미 폐기된 자산에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위를 투자했고, 노모의 관이라는 실물 자산마저 대가 없이 내놓았습니다. 당장의 손익으로 보면 미친 투자입니다. 그러나 이 무모한 투자는 긴 역사의 평가표 위에서 가장 위대한 무형 자산을 창출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단종이 마침내 왕으로 복권되었습니다. 엄흥도 역시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둔 충절을 높이 평가받아 공조판서에 추증됩니다. 추증이란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영월의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사내가, 죽어서야 정2품 판서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살아생전 공조판서의 관복 대신 차가운 수의를 입고 흙으로 돌아간 겁니다.
엄흥도가 짊어진 노모의 관은 당대의 인정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법정을 향한 가장 외로운 증거물 보전 행위였습니다. 세조는 국가의 모든 물리력을 동원하여 단종이라는 이름을 역사에서 삭제하려 기획했습니다. 한갓 지방의 말단 관료가 수습한 그 차가운 시신은, 권력의 분식회계에 맞서는 물리적 증거로 살아남았습니다.
카메라를 다시 넓게 당겨봅시다.
세종은 자기 시대를 지배한 가장 뛰어난 지성이었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군주였습니다. 아들들에게 권한을 나눠준 것도, 유능한 관료의 도덕적 결함을 감싸안은 것도, 그 순간만 떼어놓고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재능을 보고도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어느 경영자가 당장 성과를 내는 인재를 도덕 시험지 하나로 내치겠습니까.
그러나 뛰어난 지성이 자기 판단에 대한 의심을 멈추는 순간,
그 지성은 후대에 가장 값비싼 청구서를 남기는 도구로 바뀝니다.
단종의 참극은 수양대군의 야심에서 출발했으나, 그 야심이 자랄 토양을 제공한 것은 세종의 조직 설계였습니다. 태종이 피로 확립한 '종친 격리의 원칙'을 폐기하고 자식들을 정무의 심장부에 투입한 것은 세종의 선택입니다. 수양대군의 월권행위를 묵인하는 감사 부재의 풍토를 조성한 것도, 부패 관료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며 도덕적 통제선을 소각한 것도 세종의 판단입니다. 후계자를 양성하는 대신 소수의 천재를 쥐어짜는 인사 정체를 방치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태종이 왜 자기 처남을 죽이고 며느리의 아버지를 죽여야 했는지, 그 행위의 이면에 깔린 냉혹한 권력 역학을 세종은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고도 자신의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겁니다.
측우기를 발명하고 훈민정음을 주조하며 화약 무기를 개량하는 동안, 궁궐 후미진 전각에서 아들들은 은밀히 사병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성군은 별을 관측하느라 발밑의 뇌관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고도 자신의 천재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그 확신의 대가를 치른 것은 세종이 아닙니다.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옥좌에 앉은 열두 살 손자였습니다.
단종의 피 묻은 역사가 묻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리더가 반드시 위대한 조직을 남기는가.
세종은 아버지가 피로 구축한 무균실의 자본을 물려받아 인류 역사에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냈습니다. 150만 헥타르의 농지, 독자적 문자 체계,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천문학과 군사 기술. 그러나 그 찬란한 르네상스를 떠받치던 조직의 내부 통제 시스템은 성군 자신의 손에 의해 해체되어 있었습니다. 태종이 모아둔 흑자 재정은 세종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종친 격리의 원칙은 가족주의적 낭만에 의해 소각되었으며, 감사 기능은 성과 지상주의에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세종이 떠난 뒤 남은 것은 텅 빈 국고, 비대해진 종친 그룹, 병약한 후계자, 그리고 아무런 견제 장치 없이 권력을 분점한 2인자들이었습니다. 계유정난은 예고된 파산이었습니다. 단종은 그 파산 절차에서 처분된 가장 값비싼 인적자산이었습니다.
리더십의 본질은 눈부신 성취를 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조직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남기는 데 있습니다. 세종은 문명의 탑을 쌓았으나, 그 탑의 기초를 지탱하던 내부 통제의 기둥은 스스로 뽑아내고 갔습니다.
영월 청령포에 버려진 열여섯 소년의 시신.
엄흥도의 등에 실린 노모의 관.
찬탈자의 녹봉은 한 톨도 쓰지 않겠다며 방 한쪽에 쌓아둔 성삼문의 빈 살림.
이 모든 것이 성군의 오만이 후대에 청구한 가장 잔혹한 어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