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적대적 M&A로 왕조를 삼킨 피의 CEO

by 연구소장

프롤로그: 이사회를 도륙한 남자



1453년 음력 10월 10일 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한 남자가 철퇴를 들었습니다. 표적은 당대 최고의 실권자이자 좌의정 김종서. 편지를 읽는 척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쇠뭉치가 백발의 노장 머리 위로 내리꽂혔습니다. 같은 시각, 궁궐 문 앞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살생부를 들고 서서 반대파를 한 명씩 지목해 도륙하고 있었습니다.


철퇴를 휘두른 남자는 수양대군, 살생부를 든 남자는 한명회. 이른바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조선 왕조 최악의 적대적 인수합병(Hostile M&A)이었습니다. 합의도, 협상도, 주주 동의도 없었습니다. 오직 물리력과 공포만으로 기존 이사회를 통째로 갈아치운 피의 경영권 탈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점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권력을 움켜쥔 이 인물이, 동시에 조선이라는 국가의 하드웨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업그레이드한 CEO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직전제로 재정을 혁신하고, 경국대전의 뼈대를 세우고,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해 백성의 목소리를 열어주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성은 F인데 업무 능력은 A+'인 상사를 만난 셈이랄까요. 공(功)과 과(過)가 이토록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인물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도 흔치 않습니다.


이 칼럼은 수양대군을 도덕적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대신, 경영학과 경제학, 조직행동론과 심리학이라는 해부도구를 들고 그의 전략과 내면, 성과와 파국을 냉정하게 절개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기적으로는 조선 역대 최고 수준의 전략가였으나 장기적으로는 '훈구파'라는 거대한 종양을 이식한 최악의 경영자였습니다.


제1장. 벤처 조직의 결성 — 인적 자원이 곧 무기였다



단종이 즉위하던 1452년, 조선이라는 거대 기업의 실권은 김종서·황보인 등 이른바 '고명대신'이라는 기존 이사회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의 결재에 노란 표를 붙여 인사권을 독점하는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흔들었고, 수양대군의 정치적 라이벌인 안평대군과 연합 전선까지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이 단단한 진입장벽 앞에서 수양대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인재를 모을 수 있는 제도적 족쇄를 부순 것입니다. 당시 조정은 대군들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奔競)'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도승지에게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냐"며 강하게 밀어붙여 이 금지 조치를 해제시킵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경계 확장(Boundary Spanning)' 활동의 제약을 걷어낸 것입니다. 조직 외부의 다양한 자원과 인맥에 접근하기 위한 첫 단추였습니다. 이 조치 하나로 신숙주, 권람 같은 엘리트 관료부터 한명회, 홍윤성 같은 무사와 한량들까지 — 스펙 불문, 신분 불문 — 자신의 막하로 끌어들이는 길이 열렸습니다.


한명회 발탁 — LMX 이론의 교과서적 사례


수양대군의 인재 발탁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한명회입니다. 과거에 거듭 낙방하여 종9품 궁지기라는 한직에 처박혀 있던 인물.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시험에 연거푸 떨어져 건물 경비 업무를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주변의 무시를 받던 이 사내를 수양대군은 한 번 만나보고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예로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 파격적인 대우와 함께 자신의 최고 책사로 삼았습니다.


리더와 부하 간의 질 높은 신뢰 관계를 설명하는 LMX(Leader-Member Exchange) 이론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한명회를 완벽한 '내집단(In-group)'으로 편입시켜 무한한 충성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한명회 역시 이 신뢰에 화답합니다. 할아버지 태종이 하륜과 손잡고 왕권을 탈취했던 파트너십을 철저히 벤치마킹(Benchmarking)하여, 수양대군에게는 태종의 '행동력'을, 자신에게는 하륜의 '기획력'을 투영한 치밀한 시나리오를 설계했습니다.


서얼 출신의 유자광을 부원군까지 올려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무술과 문장력, 냉철한 상황 판단력을 두루 갖춘 이 인물 앞에서 수양대군은 출신 따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회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떠올리면,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파격적 인재 등용'의 본질은 능력주의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기존 질서 밖에서 나에게만 올인할 사람을 확보하려는 철저한 계산이었다는 점입니다. 한명회도, 유자광도, 홍윤성도 — 기존 체제에서 소외된 이들이었기에 수양대군 외에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배수의 진을 친 사람들이 가장 목숨 걸고 싸우는 법입니다.


조직은 이렇게 갖춰졌습니다. 브레인, 무력, 충성심 — 세 박자를 모두 확보한 수양대군에게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실행이었습니다.


제2장. 쿠데타의 실행 — 정보 비대칭과 마키아벨리즘



수양대군이 거사 전에 보여준 전략적 기만술은 경제학의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과 심리학의 '어둠의 3원조(Dark Triad)'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행 — 의도를 숨기는 시장 신호(Market Signaling)


거사를 앞두고 수양대군은 뜻밖의 행보를 보입니다. 명나라에 '고명사은사'로 가는 위험한 임무를 자청한 것입니다. 쿠데타를 코앞에 두고 외국 출장을 떠나겠다니, 참모들이 극력 만류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중국행을 강행합니다.


두 가지 포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첫째, 명나라 황실에 자신이 조선의 실력자임을 각인시키는 시장 신호(Market Signaling)의 발신. 둘째, 경쟁 진영의 방심을 유도하는 연막 작전. 수양대군이 도성을 비운 사이, 김종서와 안평대군 진영은 '저 사람은 야심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치명적인 오판이었습니다. 자신의 진짜 의도를 완벽히 은폐한 채 적의 허를 찌르는, 정보 비대칭의 전형적 활용이었던 셈입니다.


계유정난의 밤 — "사랑받느니 두려움의 대상이 되라"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직접 심복들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찾아갑니다. 편지를 보여주는 척 고개를 숙이게 만든 뒤, 철퇴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같은 시각 한명회는 살생부를 들고 궐문에 서서 황보인, 조극관 등 반대파를 하나씩 지목해 처형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어둠의 3원조(Dark Triad) 중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장면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설파한 그 유명한 원칙,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를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합의도 타협도 없었습니다.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기존 지휘 계통을 단숨에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적대적 M&A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 해당합니다. 이사회 장악, CEO 교체, 경영진 숙청이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셈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적대적 M&A에서도 최소한의 법적 절차와 주주 동의는 필요합니다. 수양대군에게는 그런 절차가 전무했습니다. 이 '인수합병'은 시작부터 정당성이라는 근본적 결함을 안고 태어났고, 그 구멍은 아무리 이후에 실적을 올려도 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피 묻은 왕좌에 앉은 세조는 곧바로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을 뜯어고치기 시작합니다. 쿠데타의 잔혈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의 손에는 이미 조직 개편의 청사진이 들려 있었습니다.


제3장. CEO 취임 후의 조직 개편 — 효율성의 칼날



왕좌에 앉은 세조는 조선의 국가 시스템을 자기 입맛에 맞게 전면 재설계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인물의 양면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권력을 손에 넣은 방식은 최악이었지만,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에는 부정하기 어려운 실용적 감각이 있었습니다.


기계적 관료제의 도입 — 6조 직계제 부활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재상들의 합의 기구인 의정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합니다. 의사결정 권한을 분산시키는 유기적 구조(의정부 서사제)를 폐기하고, 실무 부서인 6조가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습니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보면, 권한이 최고경영자에게 집중되는 기계적 구조(Mechanistic Structure)이자 전형적인 중앙집권화(Centralization)입니다. 쉽게 말해 중간 임원진을 건너뛰고 CEO가 실무팀과 직접 소통하는 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동시에 학문과 토론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을 폐지하고, 왕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던 경연을 없앴으며, 대간의 기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한명회, 신숙주 등 측근을 심어 모든 국정 출납을 장악했습니다.


효율성 측면에서는 확실히 작동했습니다. 의사결정이 빨라졌고, 실행력이 강해졌으며, 세조의 의지가 말단까지 곧바로 관철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스템에 의한 효율이 아니라 세조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1인 체제였습니다. 비판과 견제 기능을 전부 들어낸 조직은 CEO가 건재할 때만 굴러갑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방향타 없는 배가 되는 것입니다.


세조의 칼은 의사결정 구조에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표적은 조선의 만성적인 재정 문제였습니다.


직전제 — 매몰비용의 과감한 절단


기존의 과전법 하에서는 현직 관리는 물론 퇴직 관리에게도 수조권(세금을 거둘 권리)을 지급했고, 미망인과 고아를 구휼한다는 명목의 수신전·휼양전으로 사실상 세습까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퇴직한 전 직원에게도 매달 월급을 주면서 신규 채용 예산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회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세조는 과거의 공로에 대한 매몰비용(Sunk Cost)을 과감히 끊어버립니다. 세습되던 수신전과 휼양전을 전부 몰수하고, 오직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되 그 액수마저 줄였습니다. 현대 기업이 연공서열제를 타파하고 성과·직무 중심의 연봉제로 전환하여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성과는 숫자로 나타났습니다. 세종 대에 50만 석이던 재정 수입이 세조 대에 90만 석까지 치솟았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상 최고 수치입니다.


다만 이 화려한 숫자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퇴직 후 토지를 반환해야 하는 현직 관리들이 재임 기간 동안 최대한 뽑아먹으려 소작 농민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매겼고, 공신들의 부정부패로 중간 누수 역시 심각했습니다. 궁중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쓸 수 있는 물자는 세입이 훨씬 적었던 세종 대가 오히려 풍족했다고 합니다. 장부상 매출은 역대 최고인데 실질 이익은 줄어든 셈입니다.


재정만 손본 것이 아닙니다. 다음 표적은 지방 관리의 부패였습니다.


수령고소금지법 폐지 — 내부 고발자 보호 시스템


세종 대에 만들어진 수령고소금지법은 하극상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백성이 지방 수령의 비리를 고발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수령들의 전횡과 부패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습니다.


세조는 이 법을 과감히 폐지하고, 전국에 암행어사(분대)를 파견해 탐관오리를 감시하게 합니다. 조직행동론에서 말하는 '내부 고발(Whistle-blowing)' 허용과 상향식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개방에 해당합니다. 하급자의 피드백을 차단하는 조직은 필연적으로 썩게 마련입니다. 세조는 이 원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정보의 투명성을 높여 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를 해소하려 했습니다.


개별 제도를 손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세조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 체제 자체를 다시 쓰려는 야심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경국대전 편찬 — 조선 법치주의의 설계도


경국대전 하면 흔히 성종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종합 법전의 뼈대를 설계하고 편찬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세조입니다. 당시 조선의 법전은 왕이 즉위할 때마다 임시법이 추가되면서 법조문이 번잡하고 모순투성이인 상태였습니다. 세조는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통합 법전 작업에 착수합니다. 1460년 호전과 호전등록을 완성한 뒤, 이듬해 형전을 공포했고, 1466년에는 이전·예전·병전·공전까지 모두 갖추었습니다.


세조는 1468년부터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아직 미비하다고 판단해 최종 확정을 보류했고, 곧이어 세상을 떠납니다. 성종 대에 완성·반포되어 조선의 헌법이자 통치의 근간이 된 이 법전의 골격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세조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세조는 냉혹하되 유능한 CEO였습니다. 그러나 그 냉혹함의 대가는 다른 누구보다 세조 자신에게 먼저 청구서를 들이밀었습니다.


제4장. 피의 대가 — 권력자의 심리적 파산



화려한 정책 성과와 무소불위의 권력 뒤에서, 세조의 내면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가장 끔찍한 패륜 — 조카와 형제의 살해 — 을 저지른 대가가 평생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인지적 불협화 — '위대한 군주'와 '패륜아' 사이에서


데이비드 맥클레란드(David McClelland)의 욕구 이론으로 보면, 세조는 타인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권력 욕구(Need for Power)'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단종이 직접 "삼촌으로서 어린 왕을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세조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왕좌에 앉은 이후입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행위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위대한 군주'라는 자아상과 '조카를 죽인 패륜아'라는 현실 사이에서 세조는 극심한 인지적 불협화(Cognitive Dissonance)에 시달렸습니다. 이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더 큰 폭력이었습니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등)을 참혹하게 고문하여 처형하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면, 반대하는 자들을 더 가혹하게 짓밟아야만 했습니다.


신체화 장애 — 몸이 먼저 고백한 죄책감


심리학에서 무의식 속 극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는 실제 신체 질병이나 환각으로 나타나는 '신체화 장애(Somatization)'를 일으킵니다. 야사에 따르면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는 환각에 시달렸고, 실제로 그 자리에 끔찍한 종기가 생겨 평생 고통받았습니다.


맏아들 의경세자마저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리다 스무 살에 숨을 거두자, 세조는 이성을 잃습니다. 형수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는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이쯤 되면 내면이 죄책감과 공포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로의 도피 — 유교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남자


숭유억불의 나라에서 세조가 궁궐 안에 사찰을 짓고 승려를 불러들인 것은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공식 이념인 성리학이 세조의 행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교적으로는 구원의 길 자체가 닫혀 있었습니다. 자비와 참회를 강조하는 불교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심리적 안식처였습니다.


세조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금강경언해를 비롯한 수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합니다. 의경세자가 사경을 헤맬 때는 경회루에 21명의 승려를 불러 모아 대규모 불교 의식인 '공작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피 묻은 왕관이 짓누르는 죄책감을 벗어던지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역설적이게도 이 몸부림이 간경도감을 통한 불경 한글 번역과 출판 기술 발전이라는 문화적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의 고백


사망 넉 달 전인 1468년 5월, 세조는 술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속내를 드러냅니다.

"내가 잠저에서 일어나 창업의 임금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형벌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한 가지 일이라도 원망을 취함이 없었겠느냐?"

주역의 글귀를 인용하며 자신의 끝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내비친 이 고백은, 세조라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죽기 1년 전에는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사육신 처첩과 딸들을 노비에서 풀어주는 뒤늦은 참회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피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세조 개인의 파멸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의 파괴력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왕좌를 지키기 위해 공신들에게 뿌린 특권이라는 씨앗이, 세조 사후 어떤 괴물로 자라났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제5장. 공신 우대라는 시한폭탄 — 훈구파의 탄생



세조가 조선에 남긴 가장 치명적인 유산은 법전도, 제도 개혁도 아닙니다. 바로 '훈구파'라는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의 탄생입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태생적으로 공신들의 결탁 없이는 왕좌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 구조적 약점이 조선의 미래를 갉아먹는 종양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면책 특권이라는 부패의 온상


세조는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요즘 회사로 치면, 창업 멤버는 무슨 짓을 해도 해고가 안 되는 규정을 만들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백관을 규찰해야 할 사헌부조차 공신들 앞에서는 손을 놓았습니다. 정난공신 홍윤성은 숙모를 때려죽이고 삼촌을 앞마당에 암매장하는 짓을 저질렀지만, 세조는 그를 감싸고 계속 높은 벼슬을 주었습니다.


조직행동론에서 가장 경계하는 시나리오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과가 아니라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면책 특권이 주어지는 순간, 조직의 규범 체계는 무너집니다.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 형성되면 하급자들은 '규칙을 지키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학습을 하게 되고, 조직 전체의 도덕적 해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집니다.


공신의 남발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숫자가 문제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세조는 계유정난부터 이시애의 난 평정까지 네 차례에 걸쳐 249명을 정공신으로 책봉했고, 원종공신까지 합치면 2,300여 명에 달합니다. 가족을 포함하면 1만 명이 넘는 거대한 특권 집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은 뒤, 고리대업과 대납권 행사로 부를 불렸고, 권력까지 세습하며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대리인 비용(Agency Cost)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상황입니다. 국가(주인)가 공신(대리인)에게 위임한 권한을 대리인이 사적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였습니다.


세조 사후 — 괴물이 풀려나다


세조 개인의 카리스마로 간신히 억누르던 공신 집단은, 그가 눈을 감자마자 본색을 드러냅니다. 예종 시대에는 한명회·신숙주 등이 원상제(院相制)를 통해 합법적으로 국정을 장악했고, 정치적 라이벌인 남이를 역모로 엮어 숙청했습니다.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급사하자 한명회는 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의 사위인 13세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세우는 킹메이커까지 자처합니다.


결국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한 신진 사림을 삼사(三司)에 배치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 대립 구도는 수차례의 사화(士禍)로 이어지며 조선 중기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 갑니다. 세조가 단기적 권력 유지를 위해 심은 씨앗이, 수십 년 뒤 조선 전체를 병들게 만든 셈입니다.


결론: 수양대군이라는 딜레마



세조의 재위 기간은 14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14년이 조선 500년의 궤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6조 직계제로 의사결정의 속도를 끌어올렸고, 직전제로 만성적 재정난에 칼을 댔으며,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해 지방 관리의 부패 고리를 끊었습니다. 경국대전의 뼈대를 세워 조선 법치주의의 설계도를 그렸고, 오위 체제로 국방을 재편했습니다. 종9품 궁지기를 조선 최고의 전략가로 키워낸 안목, 서얼 출신을 신분 불문하고 등용한 과감함 — 실무형 CEO로서의 역량만 놓고 보면, 세조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적표의 이면에는 지울 수 없는 혈흔이 묻어 있습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물리력으로 찬탈하고, 형제를 죽이고, 충신을 학살한 것은 조선이라는 조직의 핵심 가치인 명분과 충효를 뿌리째 부정한 행위였습니다. 그 대가로 세조는 평생 인지적 불협화와 신체화 장애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심리적 지옥에 가두었습니다. 유교에서 답을 찾을 수 없어 불교에 매달렸고, 죽음 앞에서 뒤늦은 참회를 시도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좌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공신 체제 — 249명의 정공신, 2,300여 명의 원종공신, 가족을 포함하면 1만 명이 넘는 특권 집단 — 는 세조 사후 조선을 갉아먹는 훈구파라는 괴물로 성장했습니다.


세조를 '인성은 F인데 업무 능력은 A+'인 상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칼럼을 마무리하며 돌아보면, 그 비유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세조의 업무 능력 A+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적대적 M&A를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었고, 그 M&A의 대가로 자기 자신은 심리적으로 파산했으며, 조선이라는 조직에는 수십 년간 곪아터지는 종양을 이식했습니다. 업무 능력과 인성을 분리해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둘은 분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양대군의 14년이 던지는 질문은 5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과정의 정당성 없이 달성한 성과는 과연 성과라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인성 F의 대가는 결국 누가 치르게 되는가. 답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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