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괴물을 처방하는 방법

by 연구소장

[파이탄 공화국 제4구역, 천명 바이오 비밀 연구소 통제실]


[경고: 숙주의 자아 각성이 감지되었습니다.]


[숨겨진 히든 패시브 <신의 그릇(EX)> 정보가 개방됩니다.]


[체내에 이식된 나노 머신 제어권이 '마스터(천무성)'에게 있음을 확인합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색 시스템 알림창.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술용 라텍스 장갑 위로 묻어있는 피. 살아 숨 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없이 메스를 쥐었던 이 손이, 사실은 늙은 아비의 영생을 위해 정교하게 조립된 '부품'에 불과했다니.


"하... 하하..."


내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내가 누려왔던 기적 같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치사량의 마약을 달고 살았던 천이환의 원래 몸이 멀쩡했던 이유, 피로를 잊게 해주던 초인적인 회복력, 그리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시스템]이라는 기연(奇緣).


그 모든 것은 신의 축복도, 기적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 핏줄 속에 심어놓은 수억 개의 나노 머신들이 내포하고 있던 '생존 프로토콜'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새집(육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몸에 최고급 보안 시스템과 자동 수리 기능을 달아두었던 것이다.


[크큭... 으하하하!]


피투성이가 된 닥터 장이 바닥을 기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자신이 신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잘 만들어진 마네킹이었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 회장님은 도련님이 병원 놀이를 하든 깡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육체만 무사히 보존하면, 결국 회장님의 것이 될 테니까요!]


닥터 장의 조롱이 연구소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민도현은 사색이 되어 노트북과 나를 번갈아 보았고, 문밖에서 대기하던 백강우와 박철민도 충격에 빠져 굳어버렸다.


그들은 내가 절망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인간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붕괴.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그런 모습.


하지만.


나는 천이환이기 전에, 강진혁이었다.


수많은 죽음의 문턱에서 환자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던, 지독한 흉부외과 의사.


"닥터 장."


나는 헛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가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군."


나는 천천히 다가가 닥터 장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를 번쩍 들어 올려 벽에 쾅 하고 처박았다.


"컥...!"


"내가 마네킹이라고? 껍데기라고?"


나는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나노 머신이 아니야. 내 의지다. 아버지가 이 몸을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이 몸을 조종하는 집도의는 나야."


나는 닥터 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눈빛에 서린 살기에 그의 광기 어린 웃음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의사는 말이야, 자기 몸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을 발견하면 절망하지 않아. 어떻게 도려낼지 수술 견적부터 짜지."


나는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민도현에게 다가갔다.


"도현아."


"네, 네! 이사장님!"


"데이터 백업 끝났어?"


"아... 네! 이 은색 가방 안에 있는 원본 데이터랑, 메인 서버에 있는 임상 기록들 전부 복사했습니다."


"좋아. 노트북 챙겨. 이제부터 네 임무는 그 데이터 속에서 내 몸에 있는 '나노 머신 통제 코드'를 찾아내는 거다. 아버지가 내 뇌를 덮어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방화벽을 치고 백신을 만든다."


민도현의 눈이 커졌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나의 모습에, 그의 흔들리던 이성도 제자리를 찾았다.


"할 수 있습니다! 원리만 알면, 생체 코딩도 결국 프로그램이니까요. 제가 이사장님 몸의 해커가 되겠습니다!"


"든든하네."


나는 피 묻은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향해 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시스템. 마스터 권한 접속 차단.'


[경고: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마스터 권한은 최상위 프로토콜입니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적의 무기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대비하면 그만이다.


"철민아, 강우 형!"


"예! 이사장님!"


문밖에서 넋을 잃고 있던 두 사람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관등성명을 댔다.


"001번, 아니 진아 아버님. 결박 단단히 해서 들것에 실어. 마취 깨기 전에 베이스캠프로 옮겨야 해. 몸집이 커서 무거울 테니 둘이서 힘 좀 써."


"라져! 특수 결속용 스트랩으로 칭칭 감아서 가겠습니다."


"그리고 강우 형."


나는 연구소 내부의 복잡한 기계 장치들과 배양 수조들을 차가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수백, 수천 명의 파이탄 민간인들이 생체 실험을 당하며 죽어갔다.


"이딴 쓰레기장, 세상에 남아있을 필요 없잖아? 폭약 챙겨온 거 남았지?"


백강우가 씨익 웃었다.


"C4(플라스틱 폭약) 빵빵하게 챙겨왔습니다. 메인 서버실이랑 전력 코어에 예쁘게 붙여놓고 오겠습니다."


"뼈대도 안 남게 확실하게 날려버려. 그리고 저 새끼도 챙겨."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닥터 장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말하는 법정 증거물이잖아. 살아서 한국까지 모시고 가야지."


[1시간 후, 제4구역 지상]


우리는 001번을 실은 특수 들것을 들고 지하실 계단을 빠져나왔다.


습하고 더운 정글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피비린내 나는 지하 연구소의 공기보다는 백배 낫게 느껴졌다.


마을 공터에는 우리가 마취탄으로 재워둔 '실패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사장님... 이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이진아가 들것 한쪽을 들며 슬픈 눈으로 물었다.


"데려갈 수 없어. 이들의 뇌는 이미 완전히 파괴됐고, 신체 세포도 붕괴가 시작됐어. 우리가 손을 댄다고 살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야."


잔인하지만, 그것이 의학적 팩트였다.


"대신,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조치하고 간다."


나는 민도현에게 지시하여 고농도 모르핀과 수면 유도제를 배합해 쓰러진 이들에게 주사했다. 그들은 더 이상 고통의 신음을 내뱉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지 못할, 아주 긴 잠이었다.


"미안합니다.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


나는 짧은 묵념을 마친 뒤, 무전기를 들었다.


"강우 형, 타이머 세팅은."


[3분 뒤에 터집니다! 빨리 트럭으로 뛰십쇼!]


우리는 전속력으로 숲을 가로질러 숨겨둔 트럭으로 달렸다. 이진아와 박철민이 001번을 트럭 짐칸에 밀어 넣었고, 백강우가 닥터 장을 짐짝처럼 던져 넣었다.


"출발해!"


트럭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진흙길을 박차고 나갔다.


우리가 트럭을 타고 산등성이를 하나 넘었을 때쯤.


쿠구구구구-!! 콰아아아앙!!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요동쳤다.


백미러 너머로 거대한 불기둥과 흙먼지가 버섯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천명 바이오가 수천억을 쏟아부어 만든 지옥의 공장, 제4구역이 영원히 땅속으로 파묻히는 순간이었다.


"하아... 끝났군요."


조수석에 앉은 민도현이 안경을 벗어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나는 창밖의 불기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이 폭발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알았다는 걸 눈치챌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피 튀기는 전면전이야."


[천명 의료지원단(CMC) 베이스캠프]


동이 트고 있었다.


정글의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며 안개를 밀어내고 있을 때, 우리 트럭 세 대가 베이스캠프 활주로로 진입했다.


"이사장님 오셨다!"


밤새 베이스캠프를 지키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1기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우리 몰골은 엉망이었다. 흙과 피를 뒤집어쓰고, 가운은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우리 등 뒤에는 포획한 닥터 장과, 은색 가방, 그리고 거대한 001번이 실려 있었다.


"환자부터 옮겨! 1호차 중환자실(ICU) 비우고, 구속구 4중으로 채워! 절대 마취에서 깨게 해선 안 돼!"


내 지시에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트럭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질렀다.


"좀 늦었군. 죽은 줄 알았잖아."


베이스캠프 중앙 천막에서, 복부에 두꺼운 붕대를 감은 백인 사내가 걸어 나왔다.


CIA 요원, 헌터였다. 그는 폴대(링거 거치대)를 지팡이 삼아 짚고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죽기엔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배낭에서 두툼한 외장 하드디스크 복사본을 꺼내 그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


"당신네들이 찾던 거. 천명 바이오의 생체 무기 실험 데이터, Z-더스트 제조 공정, 그리고 그 약을 사간 국제 테러 조직의 거래 장부 찌라시까지 싹 다 들어있어."


헌터가 한 손으로 하드디스크를 낚아챘다.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대단하군.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는데. CIA 한 개 소대가 와도 못 뚫을 곳을 의사 몇 명이 털어오다니."


"우리가 수술 부위 찾아 들어가는 데는 도가 튼 놈들이거든.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야."


나는 헌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유엔(UN) 특별 조사단 신분. 그리고 미국 정부의 면책 보증서."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헌터. 패키지 확보했다. 예스, 완벽한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다. 지금 당장 워싱턴에 연락해서 '천명 의료지원단'에 대한 UN 임시 여권을 발급해. 외교 채널 열어서 한국 정부에도 통보하고."


그가 통화를 마치고 나를 보았다.


"됐어. 1시간 뒤면 당신들은 파이탄에 의료 봉사를 온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국제 테러 및 불법 생체 실험을 조사하는 'UN 산하 특별 조사단'이 될 거야. 한국 검찰이나 경찰이 함부로 당신들을 압수수색하거나 체포할 수 없다는 뜻이지."


"나이스. 독수리 형님들 일 처리 빠르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도 아버지가 함부로 공권력을 동원해 나를 짓밟을 수 없다. 국제 사회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될 테니까. 나의 몸은 'UN 조사단장'이라는 강력한 외교적 방패막이로 보호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헌터가 활주로 끝을 가리켰다.


"라만 장군은 꼬리를 말았어. 당신네들이 그 헬기를 박살 낸 걸 보고, 그리고 미군 드론이 떠 있는 걸 보고는 벌벌 떨면서 트럭에 금괴를 싣고 도망치더군."


"잘됐네. 귀찮은 파리 떼는 치워졌고."


나는 뒤를 돌아 거대한 화물기, '아크엔젤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낡고 투박한 화물기 안에서, 우리는 지옥을 경험했고, 죽음을 목격했으며, 그 죽음과 싸워 이겼다. 100명의 오합졸 학생들은 이제 어떤 응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실전 최강의 '야전 의료팀'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원 집합!"


내 외침에 100명의 천명 1기생들이 비행기 앞 공터로 모여들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정글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겁먹은 사슴이 아니었다. 피의 냄새에 익숙해진, 살기를 품은 늑대의 눈빛이었다.


"다들 수고했다. 우리는 이 미친 정글에서 수십 명의 환자를 살렸고, 생체 실험실을 박살 냈으며, 악당을 잡아왔다."


나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수술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나는 닥터 장이 갇혀 있는 컨테이너와, 001번이 누워있는 중환자실을 가리켰다.


"저 안의 끔찍한 괴물들을 만든 진짜 원흉.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종양 덩어리. 그걸 도려내러 간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로 치켜들었다.


"짐 싸라. 집으로 간다. 서울을 수술하러."


"와아아아아!!"


학생들의 함성이 파이탄의 아침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시스템 알림]


[메인 퀘스트: '아버지의 유산' 확보 완료.]


[새로운 챕터가 시작됩니다: <왕의 귀환>]


나는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기다리세요, 아버지.


당신이 만든 이 잘난 육체로, 당신의 제국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비행기의 거대한 엔진이 다시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복수의 칼날을 품은 아크엔젤호가, 대한민국을 향해 날아올랐다.


제1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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