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호 기내, 상공 3만 피트]
쿠오오오오-
거대한 보잉 747 화물기의 엔진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창문 하나 없는 삭막한 화물칸 내부, 임시로 마련된 데이터 분석실 컨테이너 안에는 푸른 모니터 불빛만이 명멸하고 있었다.
"이사장님. 여기 보십시오."
밤을 꼬박 새운 민도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피로로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모니터의 3D 인체 스캔 이미지를 확대했다.
화면 속에는 내 몸통과 뇌의 단면도가 띄워져 있었고, 그 위로 은하수처럼 촘촘하게 흩뿌려진 미세한 붉은 점들이 보였다.
"이 붉은 점들이 전부 나노 머신(Nano-machine)입니다. 혈류를 타고 전신을 순환하면서 손상된 세포를 즉각적으로 수리하고, 피로 물질을 강제로 분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사장님이 남들보다 며칠씩 밤을 새워도 멀쩡했던 이유, 상처가 눈에 띄게 빨리 아물었던 이유가 다 이놈들 때문이었죠."
"기막힌 AS 시스템이군. 아버지가 자기 '새 차'에 기스 나는 꼴을 못 보셨나 봐."
나는 쓰게 웃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문제는 이놈들이 단순한 수리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민도현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붉은 점들이 뇌간(Brainstem)과 심장 쪽으로 집중되는 영상이 나타났다.
"나노 머신의 코어 통제망이 생명 유지의 핵심 중추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만약 마스터 권한을 가진 자... 즉, 천무성 회장이 특정 주파수의 신호를 보내면, 이 나노 머신들은 수리공에서 '암살자'로 돌변합니다."
"킬 스위치(Kill Switch)로군."
"맞습니다. 뇌혈관을 막아 즉각적인 뇌사를 유도하거나, 심장 근육을 괴사시켜 심정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사장님의 목숨줄은 지금 회장님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모니터를 응시했다.
[시스템: 의료의 신]이라고 믿었던 기연마저도, 어쩌면 이 나노 머신들이 내 뇌신경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시각적 인터페이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철저하게 설계된 온실 속의 실험체였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이 차갑게 식으며, 메스를 쥔 집도의의 감각이 극도로 벼려지고 있었다.
"도현아."
"네, 이사장님."
"이 킬 스위치 방화벽, 뚫을 수 있겠어? 아버지가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통제권을 뺏어야 해."
민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노트북을 내려다보았다.
"천명 바이오의 수십 년 기술력이 집약된 양자 암호 체계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당장 해킹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의 안경 너머로 천재 특유의 광기가 번뜩였다.
"이 은색 가방 안에 있는 원본 소스 코드를 바탕으로 역설계를 돌리면, '재밍(Jamming, 전파 방해)'을 걸어 신호를 차단하는 백신 프로그램은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만 주신다면요."
"얼마나."
"최소 한 달. 길면 세 달입니다."
"한 달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내 몸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다면, 내가 쓸모없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스위치를 누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려 하겠지. 그 오만함이 바로 내가 파고들 틈이다.
"내가 그 한 달을 벌어주마. 넌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이것만 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몸의 통제권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뚫어내겠습니다."
나는 컨테이너 한구석에 포박된 채 재갈이 물려 있는 닥터 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석훈 박사. 당신이 만든 이 빌어먹을 장난감, 내가 어떻게 역이용하는지 똑똑히 지켜봐. 당신은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아주 훌륭한 나팔수가 될 거니까."
나는 컨테이너 문을 열고 화물칸으로 나갔다.
싸늘한 기내 바닥에는 100명의 1기생들이 침낭을 덮고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었다. 전투와 수술의 긴장이 풀리자 기절하듯 잠든 것이다.
그들 사이를 지나 중환자실 컨테이너(ICU)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티타늄 구속구에 사지가 묶인 채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실험체 001, 이진아의 아버지가 보였다.
그 옆에는 이진아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아버지의 거대한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좀 자둬. 한국 도착하려면 아직 5시간은 남았어."
내 목소리에 이진아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눈동자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사장님... 우리 아빠, 고칠 수 있나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
나는 001의 생체 모니터를 확인했다. 수치는 안정적이었지만, 약물로 변이된 근육과 신경계는 현대 의학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거짓말은 안 하마. 100%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뇌세포의 상당 부분이 이미 약물에 녹아버렸어."
이진아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이진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를 알아보고, 널 안아줄 수 있게는 만들 수 있다. 내장된 데이터 포트를 제거하고, 신경 재건 수술을 수십 번은 해야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살려낼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이진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제가 평생,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목숨은 네 환자들한테 바치고, 넌 내 수술방 어시스트나 완벽하게 해. 그게 갚는 거야."
나는 뒤돌아섰다.
나의 1기생들, 나의 군대.
파이탄의 지옥에서 이들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피를 나눈 전우가 되었다. 이제 이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썩어빠진 의료 카르텔과 아버지의 제국을 짓밟을 차례다.
"이사장님!"
백강우가 조종석 쪽에서 급하게 뛰어왔다.
"한국 영공에 진입했습니다. 인천공항 관제탑과 교신이 연결됐는데...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복잡하다니?"
"공항 활주로에 기자들이 벌떼처럼 깔렸답니다. 게다가 경찰 병력과 신원 미상의 양복쟁이들 수십 명이 우리 착륙 게이트를 통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양복쟁이들? 뻔하지. 아버지의 사냥개들이 마중을 나왔군."
천무성 회장의 정보력이라면, 파이탄의 제4구역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받았을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내가 가져가는 '증거(닥터 장, 001번, 데이터)'를 공항에서 압수하고 나를 비밀리에 연행하는 것.
"어쩌실 겁니까? 이대로 내리면 놈들에게 포위당합니다. 기수를 돌릴까요?"
백강우가 험악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아니. 정면 돌파한다."
나는 의무실 컨테이너 한구석에서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사내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우리한테는 아주 비싸고 훌륭한 방패막이가 있잖아."
CIA 요원 헌터. 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닥터 천. 워싱턴에서 이미 손을 써놨으니까. 한국의 어떤 권력자도 오늘 당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야."
"최 집사한테 전해!"
나는 기내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가장 화려하게, 기자들 제일 많은 1번 활주로 정중앙에 내다 꽂아!"
[인천국제공항, 제1 화물 터미널 계류장]
쿠아아아앙-!
거대한 아크엔젤호가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활주로에 안착했다.
계류장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수백 명의 기자재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었고, 그 앞을 무장 경찰들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검은 양복을 빼입은 천명 그룹 법무팀 사내들과 사설 경호원 수십 명이 살기를 띠고 도열해 있었다.
"기자들 접근 막아! 비행기 문 열리는 즉시 천이환 이사장과 화물부터 확보한다. 반항하면 무력 행사도 불사해. 회장님의 특명이다."
천명 그룹 법무팀장인 강 변호사가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체포 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천이환을 '불법 임상 실험 및 기업 자산 횡령' 혐의로 엮어 입을 막아버릴 작정이었다.
위잉- 치이익.
아크엔젤호의 거대한 측면 램프 도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진입해!"
강 변호사의 신호에 맞춰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이 계단을 타고 오르려 했다.
"Step back! (물러서라!)"
그때, 램프 도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천이환이 아니었다.
방탄조끼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서양인 사내, 그리고 그 뒤로 도열한 미 대사관 소속 무장 해병대원들이었다.
"뭐, 뭡니까 당신들! 길 비켜! 우리는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
강 변호사가 영장을 들이밀며 소리쳤지만, 헌터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신분증과 금장이 박힌 서류를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미합중국 중앙정보국(CIA), 그리고 유엔(UN) 산하 특별 조사 위원회 소속이다. 이 비행기와 탑승 인원, 그리고 모든 화물은 현재 국제법에 따라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 및 외교관 면책 특권을 보장받는다."
"뭐... 뭐라고요? 유엔? 치외법권?"
강 변호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천명 그룹의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미 정부와 유엔이 직접 보증을 선 상대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국가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한국 경찰의 영장 따위는 이 비행기 안에서 휴지 조각에 불과해. 당장 병력 물리지 않으면 미합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
헌터의 서슬 퍼런 경고에 경호원들이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한국 경찰들 역시 당황하여 상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완벽한 봉쇄였다. 아버지의 사냥개들은 독수리의 날개 아래로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비켜."
헌터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와 진흙으로 얼룩진 하얀 의사 가운.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 하지만 그 누구보다 오만한 눈빛.
천이환이 램프 도어를 걸어 내려왔다.
타타타타탁!
천이환의 등장과 함께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발하듯 터졌다.
[천이환 이사장님! 파이탄에서 불법 의료 행위를 했다는 의협의 고발이 있었는데 사실입니까!]
[천명 의대 편입생들이 실제 내전에 투입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입장을 밝혀주십시오!]
[천명 그룹 본사에서는 이사장님의 출국이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기자들의 마이크가 쏟아졌다.
강 변호사가 다급하게 천이환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백강우와 박철민이 산처럼 버티고 서서 그를 밀쳐냈다.
나는 폴리스 라인 앞, 마이크의 숲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대답하겠습니다."
나의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에, 현장의 웅성거림이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우리는 불법 의료 행위를 하러 간 게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러 갔습니다."
나는 뒤를 가리켰다.
램프 도어 뒤에서, 피 묻은 가운을 입은 100명의 천명 1기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전장을 겪은 베테랑의 그것이었다. 카메라가 그들의 처절하지만 당당한 모습을 생중계로 잡았다.
"대한민국의 고귀하신 의사 선생님들이 밥그릇 챙기느라 파업하고 시위할 때, 제 뒤에 있는 이 학생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정글에서 50명이 넘는 목숨을 맨손으로 살려냈습니다. 무자격자요? 이들이 가짜라면, 한국에 진짜 의사는 단 한 명도 없는 겁니다."
기자들의 펜이 미친 듯이 종이를 달렸다.
'전장의 슈바이처', '영웅들의 귀환'. 이미 기사 헤드라인은 뽑히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고발하고자 합니다."
나의 다음 말에, 강 변호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직감하고 패닉에 빠졌다.
"막으세요! 당장 저 입 막아!!"
강 변호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UN 해병대원들이 그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렌즈를 향해 똑박또박 말했다.
"우리는 파이탄 공화국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인체 실험'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납치되어 신종 마약과 생체 무기의 실험체로 희생당하고 있었습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끔찍한 생체 실험을 주도하고, 국제 테러 조직에 마약을 공급한 배후... 그곳은 바로 대한민국의 기업이었습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것은 선전포고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의 목 베기.
"천명 바이오(Chunmyung Bio)."
기자석에서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아버지 회사, 대한민국 최고의 제약 바이오 기업을 아들이 직접 테러 조직으로 고발한 것이다.
"저희 천명 의료지원단은 UN과 CIA의 협조 아래, 이 끔찍한 실험실을 파괴하고 관련 데이터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또한, 실험의 총책임자였던 수석 연구원 장석훈 박사를 생포하여 압송했습니다."
백강우가 짐짝처럼 묶인 닥터 장을 기자들 앞으로 내동댕이쳤다. 플래시가 눈을 멀게 할 듯 터졌다.
"저는 의사입니다. 제 환자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가 있다면, 그게 설령 내 살붙이라 해도 도려낼 겁니다."
나는 카메라 렌즈 너머, 분명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그 남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기다리십시오, 천무성 회장님. 당신이 만든 지옥, 내가 끝내주러 왔으니까."
완벽한 사이다. 완벽한 반격이었다.
공항은 발칵 뒤집혔고, 대한민국의 언론과 주식 시장은 이 한마디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서울 천명 그룹 본사 회장실]
최고급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대형 스크린으로 생중계를 지켜보던 천무성 회장.
화면 속에서 자신을 향해 선전포고를 날리는 아들을 보며, 비서실장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회... 회장님! 당장 손을 써야 합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도련님이 미치신 게 분명합니다!"
비서실장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천무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은 고요했고,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짙은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회장님...?"
"미쳤다고? 아니."
천무성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완벽하다. 너무나도 완벽해."
그의 황혼기 접어든 늙고 주름진 눈동자에 탐욕스러운 광기가 일렁였다.
"저 눈빛, 저 기백, 저 오만함. 내 육체가 지독한 정글의 한계 상황마저 돌파하고 저토록 아름답게 진화하다니."
천무성에게 아들의 반역은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그릇'이 얼마나 견고하고 훌륭한지를 증명하는 '최종 성능 테스트'의 통과를 의미했다.
어차피 천명 바이오 꼬리표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저 완벽한 육체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제국은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으니까.
"비서실장."
"예, 예! 회장님!"
"영웅이 귀환하셨다. 성대한 환영 파티를 준비해야지."
천무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비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나의 아담(Adam)."
거대한 폭풍이, 대한민국을 삼키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다.
제20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