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라의 수도 한단은 거대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장의 쌀가게 앞에는 새벽부터 수백 명의 백성과 상인들이 몰려들어 아우성을 쳤다. 그들의 손과 수레에는 무거운 철전과 구리 돈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쌀가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따금 문이 열려 새로운 시세표가 걸릴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망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제 아침에 쌀 한 말에 동전 백 닢이었는데, 오늘은 삼백 닢이라고? 장난하는 거요!"
"싫으면 관두시오! 내일이면 오백 닢이 될 테니까. 진나라 상인들이 쌀이란 쌀은 웃돈을 주고 모조리 싹쓸이하고 있어서, 우리도 팔 물건이 없단 말이오!"
전형적인 매점매석이 불러온 초인플레이션이었다. 화폐의 가치는 시시각각 휴지 조각, 아니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고 있었고, 식량이라는 실물의 가치만이 기형적으로 비대해지고 있었다. 밥을 굶게 된 백성들의 분노는 폭동 직전의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천하 상회의 집무실 역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막 최고 재무 책임자(CFO)로 합류한 공손룡이 초조하게 부채를 부치며 입을 열었다.
"대행수. 여불위의 자금 동원력은 상상을 초월하오. 그가 조나라 전역에 푼 구리 돈만 해도 수십만 관이 넘을 거요.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도니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쌀은 자취를 감추니 쌀값은 천정부지로 솟는 것이지. 이대로 사흘만 더 지나면 조나라 경제는 붕괴하고, 굶주린 백성들이 왕궁과 우리 상회를 습격할 거요."
향희 역시 창백한 얼굴로 거들었다.
"저희가 창고에 쌓아둔 금과 은을 풀어서 타국의 쌀을 사오면 안 될까요?"
강무는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우리가 현물을 풀어서 쌀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여불위는 가격을 더 높여 부르며 치킨 게임을 유도할 겁니다. 우리의 금고가 바닥나는 순간 상회는 파산이고, 그제야 놈들은 창고에 쌓아둔 쌀을 비싼 값에 풀어 조나라의 모든 부를 진나라로 빨아들일 겁니다. 놈의 현금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오! 앉아서 말라 죽길 기다릴 셈이오?"
"상대방이 판돈을 무한정 올리는 도박판에서는, 같이 판돈을 올리는 게 아니라 아예 그 판의 '화폐' 자체를 바꿔버려야 합니다."
강무는 품에서 매끄럽게 가공된 닥나무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이제 이 무겁고 쓸모없는 철전과 구리 돈을 쓰지 않을 겁니다. 내일부터 천하 상회는 이 가벼운 종이를 돈으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공손룡의 부채질이 멈췄다. 그는 탁자 위의 종이와 강무를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조, 종이? 지금 이 종이 쪼가리를 돈으로 쓰겠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천하통보'라 부를 겁니다."
"미쳤소! 단단히 미쳤구려! 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금속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법이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종이를 누가 쌀과 고기를 주고 바꾼단 말이오!"
"신용(Credit)이 있다면 바꿉니다. 이 종이 한 장을 천하 상회로 가져오면, 언제든 순도 99퍼센트의 '백설 소금' 한 항아리와 '염장육' 한 근으로 교환해준다고 보증하는 겁니다. 구리 돈 수천 닢을 수레에 싣고 다니는 것보다, 이 가벼운 종이 한 장을 품에 넣고 다니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리하다는 것을 상인들이 깨닫게 만들면 됩니다."
강무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화폐의 본질은 금속이라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화폐를 다른 가치 있는 물건과 교환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 즉 신용에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손룡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경제학적인 논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짓이오! 국가의 허락 없이 사사로운 상단이 화폐를 찍어내는 것은 반역이자 화폐 위조 죄요! 조나라 왕실과 곽개가 당장 군대를 몰고 와 우리의 목을 칠 거란 말이오!"
"그래서 악마의 변호사가 필요한 겁니다."
강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돈을 돈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줄 완벽한 법의 방패. 천하의 어떤 법관도 뚫지 못할 교묘한 계약서를 써줄 사람이 한단에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감옥으로 좀 가시지요."
조나라 한단성의 지하 감옥은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축축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지옥이었다. 죄수들의 신음과 간수들의 채찍 소리가 메아리치는 그곳의 가장 깊은 독방에 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사내는 헝클어진 머리에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흙바닥에 숯덩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끼기긱. 녹슨 쇠창살 문이 열리며 횃불을 든 강무와 향희가 들어섰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누... 누... 누구, 냐. 내... 내 허락도 없, 없이."
사내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한 마디를 뱉어내는 데도 얼굴 근육이 일그러질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가 바로 훗날 법가 사상을 집대성할 천재, 한(韓)나라의 공자 한비였다. 그는 볼모로 조나라에 왔다가, 곽개를 비롯한 조나라 귀족들의 모함에 빠져 거액의 빚을 지고 옥살이를 하는 중이었다.
"천하 상회의 대행수, 강무라고 합니다. 밖에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형벌과 법률의 이치를 논하는 데 있어 당신을 따를 자가 없다고 하더군요."
"소... 소문은... 거... 거짓이다. 보, 보다시피... 나는... 말도... 제... 제대로 못 하는... 병신일 뿐... 이, 이다."
한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바닥에 글씨를 쓰려 했다.
"말을 더듬는 것은 혀의 문제이지 뇌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당신의 혀가 아니라 당신의 붓을 사러 왔습니다."
강무는 한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진 빚, 수천 관의 은화를 제가 대신 갚고 당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대신 제 상회의 최고 법무 책임자가 되어, 저를 위해 계약서와 법리 해석을 전담해주셔야겠습니다."
한비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장, 장사꾼이... 법을... 알, 알아서... 뭣에 쓰... 쓰려고. 법, 법은... 힘 있는 자들의... 장... 장난감일 뿐이다."
"그래서 그 장난감을 저도 좀 쥐고 놀아보려 합니다. 첫 번째 임무를 드리죠.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강무는 품에서 아까 공손룡에게 보여주었던 천하통보 종이 한 장을 꺼내 한비에게 내밀었다.
한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제가 이 종이를 수만 장 찍어내어 조나라 시장에 뿌릴 생각입니다. 이 종이는 쌀과 고기를 사는 화폐의 역할을 할 겁니다. 문제는 조나라 법률 제7조, '사사로이 주화를 주조하거나 화폐를 유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조항입니다. 자, 당신의 그 천재적인 머리로 제가 삼족이 멸하지 않도록 이 종이에 완벽한 합법의 외투를 입혀 보십시오."
한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말을 할 때의 그 어눌하고 비참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복잡한 수식을 푸는 수학자처럼 고도의 집중력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바닥의 숯덩이를 집어 들고 종이의 뒷면에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붓을 쥐었을 때 그의 논리는 혀의 구속에서 벗어나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글을 쓴 한비가 종이를 강무에게 던졌다. 강무는 횃불을 가까이 대고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본 증서는 재화를 대체하는 화폐(貨幣)가 아니며, 천하 상회에 물건의 보관을 위탁한 자가 자신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보관증(保管證)이자 교환권(交換權)에 불과하다. 본 증서의 소지자는 언제든 상회의 창고에서 정해진 분량의 소금과 철로 이를 상환받을 수 있다. 이는 상인과 고객 간의 사적인 채무 계약이므로, 국가의 화폐 주조권 침해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다.]
강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완벽했다.
이것은 돈이 아니다. 물건을 맡겨두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는 사적인 '보관증서(물품 교환권)'일 뿐이다. 상인들끼리 서로 빚을 적어두는 차용증을 주고받는 것은 어느 나라의 법에서도 금지하지 않았다. 한비는 이 종이를 화폐가 아닌 '유가 증권'으로 규정함으로써, 조나라의 강력한 화폐 위조 법망을 단숨에 우회해버린 것이다.
"훌륭합니다. 당신은 지금 막 당신의 보석금을 스스로 지불하셨습니다."
강무는 향희를 돌아보았다.
"간수를 불러오십시오. 이분은 오늘부터 우리 상회의 최고 법무 책임자입니다."
천하 상회의 가장 위험하고 날카로운 방패, 한비가 어벤져스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사흘 뒤, 조나라의 시장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천하 상회의 점포마다 거대한 방이 붙었다.
"오늘부터 천하 상회는 쌀을 팝니다! 단, 무거운 구리 돈은 받지 않습니다. 오직 상회가 발행한 '천하통보'로만 결제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과 백성들은 반신반의하며 천하 상회로 몰려들었다. 향희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단상에 서서 사람들에게 종이표를 흔들어 보였다.
"여러분! 구리 돈 백 닢을 수레에 싣고 다니느라 허리가 휘지 않으셨습니까? 도적들에게 뺏길까 봐 밤잠을 설치지 않으셨습니까? 이 천하통보 한 장이면 그럴 걱정이 없습니다! 이 가벼운 종이는 언제든 저희 상회로 오시면 소금 한 항아리로, 혹은 쌀 두 말로 바꿔드립니다. 저희 상회의 창고에는 여러분의 종이를 보증할 소금과 철기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초반에는 아무도 종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향희가 사람들을 이끌고 상회의 거대한 지하 창고를 견학시켜 주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처럼 하얀 백설 소금과 번쩍이는 철제 농기구들이 산맥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의 눈에 탐욕과 안도감이 동시에 어렸다.
"저, 저기 구리 돈을 낼 테니 그 종이라는 걸 좀 주시오!"
한두 명이 구리 돈을 천하통보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종이로 쌀을 사갔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천하통보는 구리 돈과 달리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고, 들고 다니기 편했으며, 언제든 귀한 소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시장의 흐름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사람들은 여불위가 풀어놓은 구리 돈을 서둘러 천하 상회로 가져와 천하통보로 바꾸려 혈안이 되었다. 여불위가 쌀을 사재기하기 위해 뿌렸던 막대한 구리 돈이 고스란히 천하 상회의 금고로 빨려 들어왔다.
반면, 여불위의 상단이 가진 쌀은 팔리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무거운 구리 돈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구리 돈을 버리고 종이표를 선택했다.
한단성 내에서 여불위가 유도했던 초인플레이션의 불길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기 시작했다. 천하통보라는 새로운 기축통화가 시장의 유동성을 완벽하게 흡수하며 질서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조나라 왕실의 곽개가 뒤늦게 군사들을 이끌고 천하 상회로 들이닥쳤다.
"강무! 네 이놈! 감히 나라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화폐를 유통하다니!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
곽개가 침을 튀기며 호통을 쳤지만, 강무 대신 나선 것은 새로 지은 관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비였다.
한비는 여전히 말을 심하게 더듬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붓과 죽간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곽개 앞에서 조나라 법전의 조항과 자신이 작성한 천하통보의 약관을 번갈아 가리키며 바닥에 글을 썼다.
[이것은 돈이 아니라 물품 보관증입니다. 상인과 고객 간의 사적 계약을 국가가 처벌할 법적 근거는 조나라 법전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이를 강제로 처벌하려 한다면, 이는 조나라 상법의 근간을 뒤흔들어 타국의 상인들이 조나라를 떠나게 만드는 해당 행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보관증 수수료의 1할은 대감의 몫으로 책정해 두었습니다.]
한비가 쓴 마지막 문장에 곽개의 핏대가 가라앉았다. 합법적인 방어 논리에 뇌물이라는 윤활유가 칠해지자, 탐관오리의 분노는 봄눈 녹듯 사라졌다.
"크흠... 뭐, 보관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라의 법이 그렇다는데 내가 어찌하겠나."
곽개는 헛기침을 하며 군사들을 물렸다. 한비의 법 논리와 강무의 자본이 결합하여 권력의 폭력을 완벽하게 막아낸 첫 번째 승리였다.
동일한 시각, 진나라 함양의 승상부.
거대한 저택의 상석에 앉은 여불위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단에서 첩자가 급히 가져온 닥나무 종이 한 장, '천하통보'가 놓여 있었다.
"이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내가 조나라에 쏟아부은 수십만 관의 쩐이 한순간에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고?"
여불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화산처럼 끓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상인으로 살아오며 돈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다. 하지만 금과 은, 구리라는 실물 가치에 얽매여 있던 시대에, '신용'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종이에 인쇄하여 시장을 지배한다는 발상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강무... 이놈은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다. 이놈은 돈의 룰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 하고 있어."
여불위는 천하통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물리적인 힘으로 안 된다면, 놈의 그 알량한 신용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시장이 종이를 믿지 못하게 만들면, 그 제국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테니."
여불위의 눈동자에 짙은 살기와 함께, 또 다른 형태의 경제 전쟁을 예고하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폐를 지배하려는 자와 화폐의 규칙을 깨부수려는 자의 거대한 충돌이 이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13화 끝)
용어 설명
초인플레이션 (Hyperinflation): 물가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급격히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휴지 조각처럼 폭락하는 경제 현상. 여불위가 막대한 자본으로 쌀을 사재기하여 조나라 경제를 붕괴시키려 한 수단이다.
치킨 게임 (Game of Chicken): 두 경쟁자가 양보 없이 극단적인 경쟁을 벌여, 결국 둘 다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상황. 강무는 여불위의 자금력과 정면 대결하는 치킨 게임을 피하고 판 자체를 바꾸는 전략을 택했다.
법화 (Fiat Money): 금이나 은 같은 실물 자산의 가치와 무관하게, 발행 주체(국가 또는 기업)의 신용만으로 유통되는 화폐. 천하 상회가 발행한 천하통보가 이에 해당한다.
기축통화 (Key Currency): 국제 거래나 특정 경제권에서 중심이 되어 결제에 사용되는 기본 통화. 강무는 구리 돈을 밀어내고 천하통보를 시장의 기본 결제 수단으로 만들었다.
유가 증권 (Securities): 재산적 권리를 나타내는 증서. 한비는 천하통보를 화폐가 아닌 물품 보관을 증명하는 유가 증권으로 법적 포장을 하여 위조 화폐에 대한 법망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