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뱀의 둥지에서 왕관을 쓰다

by 연구소장

[서울 강남구, 천명 그룹 본사 사옥]


대한민국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마천루. 천명 그룹 본사 앞은 공항의 아수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수백 명의 취재진과 시위대, 그리고 폴리스 라인을 치고 있는 경찰 병력들.


"천명 그룹은 해체하라!"


"생체 실험 살인 기업, 천무성을 구속하라!"


성난 여론의 파도가 100층짜리 유리 궁전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그 성난 파도의 한가운데로, 내가 탄 검은색 밴이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차 문이 열리고 내가 내리자, 시위대의 함성이 일순간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천이환! 천이환!"


"내부 고발자 영웅을 보호하라!"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비 재단의 철부지 아들, 혹은 의료계의 이단아로 불리던 내가 하루아침에 부패한 제국을 무너뜨린 '정의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환호성에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이 모든 환호와 명성조차 아버지가 내게 씌워주는 '가짜 왕관'의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장님, 아니... 회장님. 조심하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내 곁에 선 백강우가 정장을 입은 채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특수부대 출신인 그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긴장 풀어. 아버지는 지금 나를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게 모셔야 할 입장이니까."


나는 후드티 위로 걸친 하얀 의사 가운의 깃을 세우며, 천명 그룹의 회전문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로비에 도열해 있던 수십 명의 임원진이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굴욕감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무시했던 자들이, 이제는 내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안내해.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곳으로."


나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천명 그룹 본사 100층, 회장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축구장 절반 크기의 거대한 회장실이 나타났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최고급 마호가니 책상 앞에는 천무성 회장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는 법무팀장 강 변호사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왔느냐."


천무성이 쉰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겉보기에는 힘없고 늙은 노인. 파산 직전의 기업을 아들에게 넘기고 은퇴하는 비운의 창업주. 완벽한 연기였다.


"예, 아버지. 부르셨으니 와야죠. 아들이 바쁘게 수술실에 있어야 할 시간에 말입니다."


나는 삐딱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수술실이라... 그래. 파이탄에서의 네 활약은 잘 보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게 컸더구나. 그 거친 정글에서 내 수족들을 쳐내고, 닥터 장까지 잡아 올 줄은 몰랐다."


"칭찬은 닥터 장 손가락 부러뜨릴 때 이미 다 들었습니다. 본론으로 가시죠."


나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진짜로 넘기실 겁니까? 이 거대한 제국을, 어제 뒤통수 거하게 친 패륜아 아들한테?"


"패륜이 아니다. 진화지."


천무성의 눈동자에 기괴한 광채가 스쳤다. 그는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네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는지 안다. 네가 나를 증오한다는 것도 알지. 하지만 이환아, 세상을 바꾸려면 힘이 필요하다. 네가 그토록 외치는 '진짜 의료'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 천명의 자본과 인프라가 필요하지 않느냐?"


천무성이 강 변호사에게 턱짓을 했다.


강 변호사가 책상 위에 서류철을 올려놓고 펼쳤다.


"회장님께서 보유하신 천명 그룹 지주회사의 지분 45% 전량과, 경영권 포기 각서, 그리고 이사장님을 차기 총괄 회장으로 추대한다는 이사회 결의서입니다. 사인만 하시면, 이 건물부터 밑에 깔린 수십 개의 계열사가 모두 이사장님의 소유가 됩니다."


합법적인 증여.


검찰이 압수수색을 들어오기 전에, 여론의 환호를 받는 '영웅'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심산. 그리고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덫.


"어차피 다 늙어빠진 몸, 내가 쥐고 있어 봐야 무덤에 가져갈 것도 아니지. 네가 이 회사를 해체하든, 팔아넘기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그저..."


천무성이 주름진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등을 덮었다.


"내 핏줄이 이 거대한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 편안하게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그 순간이었다.


[경고: 마스터(Master)의 물리적 접촉이 감지되었습니다.]


[체내 나노 머신의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1%... 3%...]


스파크가 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손등을 타고 혈관으로 파고들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눈앞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은 채, 아주 미세한 생체 전류를 흘려보내 내 몸속의 킬 스위치를 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노인의 아귀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억셌다.


"왜 그러느냐. 아비의 손이 그리도 끔찍하더냐?"


천무성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의 눈빛은 아들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공장에서 출고된 최고급 스포츠카의 엔진을 쓰다듬는 오너의 눈빛이었다.


"아뇨."


나는 이를 악물고 동기화의 구역질 나는 감각을 버텨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펜을 집어 들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떨리는 겁니다."


서걱, 서걱.


나는 지분 양도 서류와 경영권 승계 문서에 거침없이 사인을 갈겼다.


"이로써 거래는 끝났군요."


사인을 마친 내가 손을 거칠게 빼내자, 천무성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경고: 동기화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좋다. 아주 좋아. 이제 너는 천명의 왕이다. 밖에서 짖어대는 저 개떼들(기자들과 검찰)을 어떻게 요리할지, 너의 솜씨를 기대하마."


나는 서류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아주 화끈하게 요리해 드릴 테니까요."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등 뒤에서 천무성의 나직하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사장님!"


백강우가 기겁하며 나를 부축했다.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망할... 늙은이. 손만 잡았는데도 나노 머신이 반응해. 진짜로 뺏길 뻔했어."


"그 서류, 진짜 사인하신 겁니까? 그게 호적을 파는 게 아니라 영혼을 파는 계약서인 걸 아시면서!"


"알지. 하지만 미끼를 물어야 사냥꾼을 물어뜯을 수 있는 법이야. 강우 형, 당장 민도현한테 연락해. 백신 개발, 2주도 길다. 무조건 10일 안에 끝내라고 해."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류철을 꽉 쥐었다.


"그리고 1기생들 전원, 내일 아침 본사 대강당으로 집합시켜. 이제부터 내가 이 천명이라는 썩은 껍데기를 어떻게 써먹는지 보여줄 테니까."


[천명 외상센터, 지하 서버실]


"미치겠네. 진짜 미치겠어!"


민도현은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에너지 드링크 캔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대형 모니터 6대에는 해독 불가능한 염기서열 코드와 암호화된 알고리즘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색 가방에서 빼낸 [프로젝트 아담]의 원본 데이터.


이사장 천이환의 몸속에 있는 나노 머신의 제어 코드였다.


"이건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야. 생체 전류와 양자 암호가 결합된 유기체적 방화벽... 뚫으려고 시도할 때마다 코드가 스스로 변이하고 있어."


민도현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헝가리 의대 수석, 천재라 불렸던 그였지만, 천명 바이오가 수십 년간 갈아 넣은 수천 명의 과학자들의 집단 지성을 혼자서 해킹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도현아."


그때, 서버실 문이 열리며 이진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좀 쉬면서 해. 이사장님이 쓰러지기 전에 네가 먼저 과로사하겠다."


"쉴 수가 없어요. 누나."


민도현이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밀어냈다.


"이사장님 몸속에 있는 이 폭탄... 천무성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터뜨릴 수 있어요. 뇌혈관을 막아버리거나, 자아를 지워버리는 코드가 떡하니 심어져 있다고요. 그런데 내가 이 방화벽을 못 뚫고 있어. 내가 무능해서!"


민도현이 분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파이탄에서 기적을 보여준 스승을,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진아는 묵묵히 다가와 민도현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사장님이 파이탄에서 우리 아빠 수술하실 때 하신 말씀 기억나?"


"네?"


"교과서에 없는 환자면, 감을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넌 지금 너무 해커처럼만 생각하고 있어. 넌 컴퓨터 공학자가 아니라, 의사잖아."


"의사..."


"소프트웨어로 못 뚫겠으면, 의학적으로 접근해 봐. 나노 머신도 결국 피를 타고 도는 이물질 아니야?"


순간, 민도현의 뇌리에 벼락같은 영감이 스쳤다.


"이물질... 혈류... 생체 전류..."


민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맞아! 소프트웨어를 해킹할 게 아니라, 하드웨어를 마비시키면 돼! 나노 머신이 작동하려면 숙주의 생체 에너지가 필요해. 만약, 이사장님의 심장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체온을 극저온으로 떨어뜨려서 나노 머신들을 '동면' 상태로 만든다면?"


"심장을 멈춘다고? 그건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


"가사 상태(Suspended Animation)! 외상 센터에서 과다 출혈 환자 뇌 손상 막을 때 쓰는 초저체온 요법을 응용하는 거야! 나노 머신이 멈춘 그 찰나의 순간에 외부에서 EMP(전자기 펄스) 충격을 가해서 코어를 태워버리면...!"


민도현의 입술이 미친 듯이 떨렸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자를 인위적으로 죽였다가 살려내는, 미친 짓 중의 미친 짓이었다.


"누나, 이거 이사장님한테 보고해야 해. 스위치를 끄려면, 이사장님이 한 번 죽으셔야 한다고."


[다음 날, 천명 그룹 본사 대강당]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뜨거운 이사회 및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수백 명의 기자들과, 천명 그룹의 주주들, 그리고 앞줄을 차지한 100명의 천명 1기생들.


나는 어제 입었던 후드티를 벗고, 내 몸에 완벽하게 핏(Fit)되는 맞춤형 다크 네이비 수트를 입고 단상에 올랐다. 왼쪽 가슴에는 천명 외상센터의 배지를 달고.


타타타타탁!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부로 천명 그룹의 모든 경영권을 승계받고 새로운 총괄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천이환입니다."


나의 담담한 선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여론은 나를 지지했지만, 핏덩이 의사가 이 거대한 재벌 그룹을 어떻게 이끌지 의심하는 눈초리도 적지 않았다.


"어제 전임 회장이신 천무성 회장께서 사퇴를 발표하셨습니다. 회사의 오점을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아름다운 핑계를 대셨죠."


나는 마이크를 잡고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저는 그 핑계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천명 바이오가 파이탄에서 저지른 짓은 도의적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명백한 반인륜적 범죄이자, 살인 행위입니다."


주주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 취임한 회장이 자기 회사를 향해 살인 행위라고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천명 그룹의 새로운 청사진을 발표하겠습니다."


나는 스크린에 준비된 PPT를 띄웠다.


[천명 바이오텍 해체 및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 설립]


"첫째, 천명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천명 바이오'를 오늘부로 해체합니다. 불법 연구에 관여된 모든 연구진과 임원들은 검찰에 자진 출두시키고, 관련 특허와 데이터는 UN 조사단에 전면 이관하겠습니다."


"미쳤어! 천명 바이오가 그룹 매출의 40%인데 그걸 해체한다고?!"


"주주들을 다 죽일 작정이냐!"


주주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둘째, 천무성 전 회장이 물려준 지분과 천명 바이오를 매각한 대금 전액... 약 30조 원을 출자하여 비영리 의료 재단인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을 설립하겠습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30조 원. 대한민국 1년 국방비의 절반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비영리 재단에 쏟아붓는다고?


"이 재단은 돈이 없어서, 혹은 의사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모든 권역에 최상급 외상 센터를 건립하고,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의료 군단을 양성할 것입니다."


나는 앞줄에 앉아 있는 1기생들을 가리켰다.


"저와 함께 파이탄의 지옥을 뚫고 온 100명의 천명 1기생들이, 그 군단의 선봉장이 될 것입니다."


기자들의 펜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 혁신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의료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재벌 그룹을 사회에 완전히 환원해 버리는 미친 짓이었다.


"이게 제 방식입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천무성을 향한 메시지였다.


"아버지가 만든 부패한 제국의 돈으로, 아버지가 망쳐놓은 세상을 고치겠습니다. 꼬우면, 언제든 다시 뺏으러 오시죠."


기자회견이 끝나고 단상을 내려오는 내게, 백강우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회장님, 멋진 쇼였습니다. 그런데 민도현한테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방법을 찾았답니다."


"방화벽 뚫는 방법?"


백강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요. 뚫는 게 아니라... 부수는 방법이랍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회장님이 한 번... 죽으셔야 한답니다."


내 걸음이 멈칫했다.


심장을 멈추고 나노 머신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EMP로 코어를 파괴한다.


듣기만 해도 사망률 99%에 달하는 미친 수술.


하지만 내 입가에는 오히려 실소가 번졌다.


"기막힌 처방전이네."


나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아버지가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킬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심장에 칼을 꽂겠다 이거지."


적의 덫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다는 전술.


의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상식을 벗어난 도박이었다.


"가자, 수술실로."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살린 이 100명의 괴물들이, 스승의 심장을 어떻게 다시 뛰게 만드는지 내기를 해봐야겠군."


대한민국을 뒤흔든 가짜 왕관의 대관식이 끝나기 무섭게, 진짜 목숨을 건 수술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제2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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