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이 요람 전체를 짓눌렀다.
검은 방검복을 입은 사병들이 일제히 곤봉을 치켜든 채 강태현을 에워쌌다. 당장이라도 곤봉이 태현의 머리통을 박살 낼 듯한 기세였지만, 정작 포위당한 태현은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댄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눈앞의 여명의 감독관만을 향해 있었다.
수십 명의 생존자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이 일촉즉발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치시게?"
태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사회의 율법인가 뭔가 하는 룰 안에서 정당하게 칩을 딴 참가자를, 단지 주최 측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패 죽인다? 그거 참 훌륭한 구원자 나셨군."
감독관의 은빛 마스크 너머, 서늘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현은 그 짧은 동공의 진동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당신들이 이 미친 벙커를 통제하는 가장 큰 무기는 폭력이 아니잖아. 바로 공정함이라는 착각이지. 이사회가 정한 규칙만 따르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맹신. 그런데 여기서 날 때려잡으면, 저 구경꾼들이 과연 당신들이 만든 그 알량한 룰을 계속 믿어줄까?"
태현의 말은 정확했다.
카지노가 손님을 끌어모으고 판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은 하우스가 룰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환상 때문이다. 아무리 불리한 게임이라도, 잭팟이 터지면 하우스가 반드시 돈을 지불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전 재산을 걸고 테이블에 앉는다.
만약 하우스가 돈을 딴 손님을 뒷골목으로 끌고 가 묻어버린다는 소문이 돌면, 그 카지노는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한다. 이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물리적인 폭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하수 중의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은 생존자들 스스로가 룰에 굴복하게 만들어야만 완벽한 통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감독관은 한참 동안 태현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크하하하…."
그것은 방송용의 기품 있는 웃음이 아니라, 기계음이 섞인 듯한 탁하고 불쾌한 파열음이었다. 감독관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태현의 목을 노리던 사병들이 일사불란하게 곤봉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훌륭한 통찰력이군요. 6번 미도달자. 당신의 말대로, 이사회는 율법을 수호할 뿐 자의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감독관이 다시 그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요람의 밤은 길고, 당신이 짊어진 칩의 무게는 당신의 목을 짓누르는 가장 달콤한 족쇄가 될 것입니다. 부디 그 오만함이 내일 아침까지 무사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감독관은 여유롭게 몸을 돌려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사병들이 그 뒤를 따랐고, 육중한 강철 격벽이 닫히며 다시 요람 안에는 생존자들만이 남겨졌다.
태현이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푸는 찰나.
"으아아아아악-!!"
반대편 3번 테이블에서 고막을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한 중년 남자가 의자에 앉은 채로 미친 듯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3번 테이블. 4번 미도달자의 죄업이 가장 높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오만한 영혼에 육신의 정화를 집행합니다.]
기계적인 안내 방송과 함께 남자가 앉은 의자에서 시퍼런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파지지직- 콰직!!
"크아아아악! 살, 살려… 컥!"
고압 전류가 남자의 전신을 관통했다. 남자의 몸이 활대처럼 꺾였고, 입에서는 하얀 거품이 흘러내렸다. 공기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고기가 타들어 가는 끔찍한 악취가 요람 안을 순식간에 채웠다. 단 10초. 전류가 멈추자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고깃덩어리가 되어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히이익!"
"아아아…."
곳곳에서 구역질 소리와 함께 공포에 질린 오열이 터져 나왔다.
끝까지 베팅을 포기하지 않고 칩을 탐냈으나, 결국 남들보다 숫자가 높아 패배한 자의 말로였다. 저 끔찍한 전기의자의 처형 장면은 생존자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졌다.
'완벽한 시청각 교육이군.'
태현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 참상을 지켜보았다.
이제 다음 게임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패가 100퍼센트 승리한다는 확신이 없는 한, 절대로 과감한 베팅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전기의자의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스스로 패를 꺾고 도망치게 만드는 완벽한 심리적 장벽이 세워진 것이다.
[두 번째 의식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은혜를 얻은 자들에게는 안식을, 칩을 모두 소진한 자들에게는 자정 정각에 심연의 인도가 있을 것입니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들이 덜컹거리며 바닥 아래로 꺼졌다.
생존자는 이제 53명.
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단 하루 만에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져 있었다. 게임에서 승리하여 수십, 수백 개의 칩을 쓸어 담은 9명의 승리자와, 그들에게 칩을 모두 뜯기고 0에 가까운 숫자를 들고 벌벌 떠는 44명의 패배자들.
점심 배급 시간이 다가오자, 이사회가 설계한 이 지독한 빈부격차의 진짜 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판기 앞.
태현을 비롯한 승리자들은 여유롭게 단말기를 찍고 2칩짜리 영양 보충 팩과 생수를 뽑아 들었다.
문제는 칩이 바닥난 사람들이었다. 단말기에 남은 숫자가 1 혹은 2인 사람들은 지금 밥을 먹어버리면 당장 오늘 밤 캡슐 수면실의 이용료 5칩을 내지 못해 바닥으로 추락할 위기였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가 교차하는 순간, 극단적인 궁지에 몰린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을 치기 마련이다.
"저기, 사장님… 제, 제가 정말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데… 영양 팩 반쪽만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3번 테이블에서 살아남은 한 승리자에게 빈털터리가 된 청년이 다가가 애원했다. 칩을 두둑하게 챙긴 승리자는 턱을 비틀며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반쪽? 공짜로 달라고? 이사회에서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안 가르치디?"
"그, 그럼 제가 내일 칩을 따서 두 배로 갚겠습니다! 제발 요동을 쳐서…."
"내가 네놈이 내일 살지 죽을지 어떻게 알고 빌려줘? 정 먹고 싶으면 여기서 개 짖는 소리 세 번 내고 엎드려뻗쳐 봐. 그럼 남은 거 부스러기라도 던져줄 테니까."
청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위장전 자판기 앞에서 풍기는 영양 팩의 고소한 냄새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청년은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드렸다.
"멍! 멍멍!"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 승리자들이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태현은 캡슐 벽에 기대앉아 생수를 들이마시며 이 지옥도를 건조하게 관찰했다.
이사회는 단 하루 만에 사람들을 완벽하게 포식자와 피식자로 분리해 냈다. 칩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이사회의 선택을 받은 우월한 존재라는 오만에 빠져 하우스의 앞잡이 노릇을 자처하게 되고, 칩이 없는 자들은 생존을 위해 동료의 발밑을 기어 다니며 복종하는 데 익숙해진다.
포커판에서 판돈이 쪼들리는 자는 심리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 상대의 베팅에 짓눌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패를 들고도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기회를 포기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숏 스택의 비애다. 이사회는 칩이라는 자본을 통해 물리적인 철창 없이도 생존자들의 영혼에 목줄을 채워버린 것이다.
'이대로 가면 이틀도 안 돼서 하위 계층 절반이 말라 죽거나, 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는 아귀다툼이 벌어지겠지.'
태현의 손목 밴드에는 [132]라는 압도적인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 안에서 가장 부유한 절대 권력자였지만, 태현은 이 숫자가 언제든 자신을 겨누는 독가시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절망이 임계점을 넘으면, 피식자들은 룰을 포기하고 다구리를 쳐서라도 포식자의 목을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감독관이 남기고 간 '칩의 무게'라는 경고가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판을 뒤집으려면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이사회의 통제망을 부수고 폭동을 유도하려면, 내 손발이 되어줄 쓸만한 장기말들이 필요해.'
태현이 남은 생수를 마저 털어 넣을 때였다.
"강태현 씨."
조용하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7번 테이블에서 자신과 함께 게임을 했던 2번 자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깡마른 체격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른 패배자들처럼 짐승같이 구걸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안경 너머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이성이 살아 있었다.
"서유진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손목 밴드를 내보였다. 액정에는 위태로운 숫자 [3]이 깜빡이고 있었다.
"용건만 하지."
태현이 시선을 거두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제게 10칩만 대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자율은 내일 게임이 끝난 직후 원금의 150퍼센트로 갚겠습니다."
구걸이 아니라 거래를 제안하는 당돌한 태도. 태현은 피식 웃으며 서유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네가 내일 게임에서 이길 거라는 보장은? 전기의자에서 바비큐가 되지 않는다는 보증 수표라도 있나 보지?"
"게임 자체에서 이길 확신은 없습니다."
유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내일도 판돈을 쓸어 담을 거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당신은 아까 우리 테이블에서 패널의 숫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남학생의 표정과 옆 사람들의 호흡만 보고 이미 머릿속으로 10칩 베팅을 계산하고 있었으니까요."
태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당신은 운이나 확률에 기댄 게 아니었어요. 우리가 전기의자의 룰에 압도당해 있다는 심리적 약점을 쥐고 흔든 거죠. 완벽한 기만전술. 카지노 용어로 블러핑(Bluffing)이라고 하던가요?"
'호오.'
태현의 눈빛에 옅은 흥미가 어렸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베팅 타이밍과 시선의 방향을 역추적할 만큼 냉철한 관찰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패배의 두려움에 찌들어 이성을 놓아버린 다른 숏 스택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관찰력이 꽤 쓸만하군. 직업이 뭐였지?"
"보안업체 시스템 분석가였습니다. 해킹 패턴을 분석하고 방화벽을 짜는 게 제 일이었죠."
시스템 분석가라. 이 완벽하게 통제된 요람의 허점을 찾아내는 데 꽤나 훌륭한 도구가 될 법한 이력이었다.
"좋아. 대출을 원한다면 담보가 있어야겠지. 네가 내일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네 목숨값 10칩에 상응하는 정보를 지금 내놔."
유진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주위를 슬쩍 살피고는 태현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이사회가 만들어놓은 이 요람의 감시 시스템, 완벽해 보이지만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그녀가 턱짓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저기 돌아가는 붉은 렌즈의 감시 카메라들. 15분 주기로 교차 회전하는데, 요람 북서쪽 코너에 있는 14번 캡슐 뒤쪽 공간은 세 대의 카메라가 모두 등을 돌리는 블라인드 스팟이 발생합니다. 정확히 45초 동안요."
태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리고 하나 더."
유진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아까 그 여명의 감독관이라는 남자가 등장할 때, 사병들이 움직이는 군화 소리의 잔향을 계산해 봤어요. 저 앞의 강철 격벽이 열리기 전에, 미세한 기계 모터 소리가 먼저 났습니다. 그 말은…."
"이 수용소 바로 뒤편에, 사병들이 상주하는 대기실이나 엘리베이터 승강기 같은 수직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군."
태현이 유진의 말을 받아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살려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주최 측의 하드웨어적 구조를 분석하고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하우스가 조작한 절망적인 통계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이런 부류는, 포커판에서 가장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훌륭한 정보원이자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정보군."
태현은 자신의 단말기 화면을 조작한 뒤, 유진의 손목 밴드에 자신의 밴드를 가볍게 부딪쳤다.
띠링-
[정화 칩: 10이 양도되었습니다.]
유진의 액정에 [13]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긴 숨이 새어 나왔다.
"이자는 150퍼센트가 아니라 200퍼센트. 내일 저녁까지다."
"…감사합니다. 강태현 씨."
유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배식 자판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현은 주머니 속 낡은 카지노 칩을 매만졌다.
감독관의 말대로, 칩의 무게는 족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족쇄를 풀어 남의 목에 걸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하우스를 붕괴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태현은 122개로 줄어든 자신의 칩을 확인하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사회는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잔혹한 카지노를 만들었지만,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판의 흐름을 쥐고 흔드는 '진짜 딜러'를 테이블에 앉혀버린 것이다.
'어디 한 번 지독하게 놀아보자고.'
심연의 요람에 갇힌 생존자들의 첫 번째 밤이, 위태로운 욕망과 음모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