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첫 번째 카드 (The Hole Card)

by 연구소장

[20:00 PM]


자판기 앞에서의 소란 이후, 요람의 공기는 더 무겁고 습해졌다.


하루 종일 굶주림에 지친 숏 스택(칩이 없는 자)들은 불안감에 떨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당장 오늘 밤 안식의 요람(캡슐 수면실)에 들어갈 5칩조차 없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이대로 자정이 되면 그들은 어젯밤의 세 사람처럼 캡슐 밖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강태현은 그 끔찍한 절망의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여유로웠다. 그는 아까 서유진에게 양도하고 남은 122칩을 이용해 영양 팩과 생수를 넉넉히 뽑아 들고 자신의 7번 캡슐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감히 다가가 구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강자의 오라(Aura)였다.


태현은 건조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유진이 준 정보를 머릿속으로 조립하고 있었다.


'북서쪽 14번 캡슐 뒤, 15분 주기, 45초의 블라인드 스팟. 그리고 전면 격벽 뒤에 있는 수직 통로.'


이사회가 설계한 이 완벽해 보이는 통제 시스템에도 분명 물리적인 구멍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구멍을 어떻게 파고들지가 관건이었다.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45초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격벽 너머로 넘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저 너머엔 중무장한 사병들이 득실거릴 테니까.


'당장 시스템을 해킹하거나 부수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저 사각지대를 이용해 이사회의 눈을 가리고, 판돈을 비약적으로 키울 수 있는 판을 짜야 한다.'


태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요람의 한구석, 북서쪽 14번 캡슐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강태현 씨."


태현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아까 3번 테이블에서 승리하여 청년에게 개 흉내를 내게 만들었던, 번들거리는 머리의 사내였다. 그의 손목 밴드에는 [45]라는 적지 않은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 요람에서 태현 다음으로 부유한 권력자였다.


"최상철입니다. 뭐, 통성명은 이쯤 하고."


사내는 거드름을 피우며 태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를 곁눈질했다.


"무슨 일이지? 너도 대출이 필요해 보이진 않는데."


"하하, 대출이라니. 제가 그딴 푼돈에 목맬 군번은 아니죠."


최상철이 노골적으로 태현의 손목 밴드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우리, 동맹 맺읍시다."


"동맹?"


태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예. 보시다시피 지금 이 요람에서 제대로 된 칩을 가지고 있는 건 당신과 저를 포함해서 고작 대여섯 명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내일이면 뒤질 버러지들이고요."


최상철이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다가왔다.


"내일 아침 게임, 어떻게 나올지 뻔하지 않습니까? 저 굶주린 새끼들은 살기 위해서 눈에 뵈는 게 없을 겁니다. 이판사판으로 베팅을 따라오겠죠. 당신이 아무리 칩이 많다 한들, 다수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귀찮아질 겁니다. 그러니…."


"그러니, 칩이 많은 우리끼리 미리 짜고 판을 지배하자는 거군."


태현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최상철의 의도는 뻔했다. 카지노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Collusion)'이었다. 자본이 많은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서로 무리하게 레이즈(베팅)를 번갈아 올리며 판돈을 기형적으로 부풀린다. 그러면 칩이 부족한 다른 참가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기회를 포기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판돈을 독식하는 악랄한 수법이었다.


"말귀가 통하시네. 어떻습니까? 당신 칩과 내 칩을 합치면, 이 요람 전체를 우리 발밑에 두고 굴릴 수 있습니다. 이사회가 뭐라든, 우리가 룰을 지배하는 겁니다."


최상철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자신이 꽤나 기발하고 완벽한 작전을 제안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태현은 잠시 턱을 괴고 최상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하수의 논리였다. 이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참가자들끼리 짬짜미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만약 룰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꼬투리를 잡히면, 그 즉시 전기의자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태현은 당장 최상철을 내치지 않았다.


포커판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호구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놈이다. 저 알량한 자만심을 이용하면, 오히려 최상철을 자신이 설계할 거대한 판의 유용한 '바람잡이'로 써먹을 수 있었다.


"동맹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태현이 짐짓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동맹을 맺으려면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당장 내일, 우리가 같은 테이블에 배정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거야 이사회 마음이지만, 뭐, 우리가 알아서 잘 눈치껏 맞추면 되지 않겠습니까?"


"눈치껏? 그런 불확실성에 내 소중한 칩을 걸 생각은 없어."


태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최상철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현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대신, 네가 정말로 나와 손을 잡고 싶다면 내일 아침 게임이 시작되기 전, 나에게 확실한 '성의'를 보여라."


"성의? 그게 무슨 소립니까?"


태현이 턱짓으로 요람 북서쪽 코너, 유진이 알려준 사각지대 쪽을 가리켰다.


"내일 아침 7시 45분. 저기 14번 캡슐 뒤쪽 구석으로 와. 거기서 네가 가진 칩의 절반을 나한테 넘겨. 일종의 '보증금'이지. 게임이 끝난 후, 네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되면 내가 딴 칩의 30퍼센트를 이자로 쳐서 돌려주지."


"뭐, 뭣?! 내 칩의 절반을 달라고요?! 미쳤습니까?!"


최상철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였다.


"조용히 해. 감시 카메라 돌고 있잖아."


태현이 서늘한 눈으로 최상철을 노려보았다.


"싫으면 관둬.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난 혼자서도 충분히 저 호구들을 요리할 수 있어. 하지만 넌? 내일 저 버러지들이 다구리를 치면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태현의 차가운 논리에 최상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현의 말이 맞았다. 45칩은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내일 죽기 살기로 덤벼들 하위 계층들을 혼자 상대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숫자였다. 반면 태현의 122칩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우산 아래 들어가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7시 45분. 14번 캡슐 뒤쪽. 약속한 겁니다. 게임 끝나면 무조건 원금에 이자 30퍼센트 얹어서 돌려주는 겁니다."


"당연하지. 난 하우스의 룰보다 내 신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태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최상철의 어깨를 토닥였다. 최상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캡슐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태현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멍청한 새끼.'


태현이 7시 45분, 14번 캡슐 뒤를 지정한 이유는 명백했다.


서유진이 알려준, 세 대의 카메라가 등을 돌리는 바로 그 45초의 사각지대.


태현은 최상철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내일 아침, 감시의 눈이 사라진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최상철의 뒤통수를 치고 그의 칩을 몽땅 털어버릴 작정이었다.


이사회가 만든 룰은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감시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상대의 칩을 강압적으로 뺏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단말기를 찍게 만든다면?


'이건 폭력이 아니라, 완벽한 사기(Scam)지.'


태현은 주머니 속의 칩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아침 게임이 시작되기 전, 그는 최상철의 45칩을 흡수하여 자신의 자본을 비약적으로 부풀릴 것이다. 160칩이 넘어가는 압도적인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사회도 더 이상 태현을 통제할 수 없다. 판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리면, 하우스의 룰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23:55 PM]


요람의 소등 시간이 다가왔다.


칩이 없는 40여 명의 숏 스택들은 내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캡슐 밖 바닥에 주저앉아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자정 정각이 되면, 캡슐 안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의 영혼은 폐기될 것이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태현의 캡슐 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유진이었다.


그녀는 태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요람 중앙의 식수대 쪽으로 향했다. 태현은 가늘게 눈을 뜬 채 그녀의 동선을 주시했다.


유진은 식수대 옆, 쓰레기통이 있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슬쩍 살피더니,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쓰레기통 뒤쪽 좁은 틈새에 재빠르게 쑤셔 넣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태현의 매서운 눈썰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쪽지?'


카메라의 눈을 피해, 이사회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하게 정보를 교환하려는 수작.


태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서유진은 단순히 정보만 넘기고 숨죽여 지내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이 엿 같은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밌어지겠군.'


[00:00 AM]


정각.


기계적인 알람 소리와 함께 요람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곧이어, 캡슐 밖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비명과 단말마가 어둠 속을 잔혹하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태현은 굳게 닫힌 캡슐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감독관의 얼굴에 어떤 엿 같은 표정이 지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가 쥐고 있는 첫 번째 카드, '홀 카드(Hole Card)'가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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