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판을 흔드는 첫 번째 블라인드 스팟

by 연구소장

[07:40 AM]


기상 알림이 울리기 20분 전. 강태현은 캡슐의 강철 천장을 가만히 응시한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마자 요람 밖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광경이 아직 생생했다. 정화 칩이 0이 된 40여 명의 사람들이 캡슐 안으로 피신하지 못한 채 일제히 질식사했다. 첫 번째 날 산소 경매에서 호구처럼 칩을 털렸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이사회의 시스템은 약자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단 13명.


그중 태현과 최상철을 포함한 소수만이 두 자릿수 이상의 칩을 보유하고 있었고, 서유진과 같은 나머지 몇 명은 그날그냥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이사회의 의도대로라면 오늘 아침 게임은 철저한 적자생존이 되겠지.'


태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이사회가 깔아놓은 이 미친 데스게임의 두 번째 판을 그들의 의도대로 굴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늘 아침 그는 시스템의 맹점을 찔러 이 판의 자본 구조를 기형적으로 박살 낼 것이다.


[07:44 AM]


태현은 조용히 캡슐의 강철 덮개를 밀어 올렸다.


새벽의 요람은 죽은 자들의 잔해조차 치워지지 않은 채 기분 나쁜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태현은 발소리를 죽인 채 어둠을 틈타 어젯밤 서유진이 지정해 준 북서쪽 코너, 14번 캡슐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 사내가 웅크리고 서 있었다.


최상철이었다. 그의 손목 밴드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숫자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45]


"왔습니까?"


상철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현은 짐짓 여유로운 척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세 대의 감시 카메라가 교차하는 14번 캡슐의 뒤편.


징-


낮은 모터 소리와 함께 카메라의 붉은 렌즈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서유진의 정보는 정확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45초 동안, 이 공간은 이사회의 전지전능한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완벽한 '블라인드 스팟'이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가자. 가져왔나?"


태현이 단도직입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상철은 잠시 주저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이자 30퍼센트 얹어서 돌려주는 거 맞겠죠? 어젯밤에 애들 죽어 나가는 꼴 보니까, 칩 절반 떼어주는 게 영 불안해서 원."


"의심스러우면 지금 돌아가. 난 아쉬울 거 없으니까. 대신 오늘 아침 판에서 나랑 한 테이블에 앉게 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난 네 칩부터 먼저 말려 죽일 테니까."


태현의 차갑고도 거침없는 태도는 상철의 얄팍한 의심을 찍어 누르는 데 완벽하게 통했다. 상철은 태현이 그를 배신할 리 없다는, 아니 배신할 이유가 없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약속은 지켜야지. 자, 여기 22칩."


상철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태현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깐."


"예?"


"단말기로 바로 양도하면 로그에 기록이 남잖아. 이사회가 감시망을 돌려보면서, 우리가 거액의 칩을 거래한 걸 발견하면 짬짜미(Collusion)로 간주할 수도 있어."


태현의 논리는 상철의 귀에 무척이나 합리적으로 들렸다. 이사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담합과 반항이었다.


"그럼 어떻게…."


"어젯밤에 내가 자판기 뒤쪽 배관을 좀 뜯어봤는데."


태현이 품에서 검고 투박하게 생긴, 단말기 크기의 금속 칩 리더기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배식 자판기의 결제 패널 부품이었다.


"이게 뭐…."


"자판기의 임시 결제 모듈이야. 원래라면 이사회의 메인 서버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서버 통신을 끊어놨어. 네 단말기를 여기다 찍어."


태현이 빠르게 설명했다.


"이 모듈에 칩을 충전해 두면, 이건 일종의 '오프라인 저장소'가 되는 거야. 내 단말기로 바로 전송받는 게 아니라 이 물리적 기계에 네 칩을 담아두는 거지. 그러면 이사회의 메인 서버에는 우리가 개인 간 거래를 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고, 그냥 자판기 오류로 칩이 차감된 것처럼 보일 거다."


"아하! 그런 방법이!"


상철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스템의 눈을 속여 안전하게 보증금을 맡길 수 있다는 태현의 기발한 발상에 상철은 감탄했다.


"빨리해. 카메라 다시 돌아온다. 정확히 22칩이다."


태현이 모듈을 내밀자, 상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손목 밴드를 그 검은 금속 패널에 가져다 댔다.


띡-


[정화 칩: 22 차감 완료]


상철의 손목 액정에 숫자가 순식간에 [23]으로 떨어졌다.


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금속 모듈을 재빠르게 트렌치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좋아. 거래 성립이군. 아침 게임 끝나면 내가 직접 찾아가지."


"예, 예. 이따 뵙죠, 강 사장님."


상철은 자신이 꽤나 똑똑한 동맹을 맺었다고 확신하며, 비굴한 웃음과 함께 서둘러 자신의 캡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태현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07:45 AM]


징-


다시 카메라 렌즈들이 코너를 향해 돌아오기 시작했다.


태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최상철이 칩을 찍은 그 투박한 금속 기계를 다시 꺼내 들었다.


태현은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병신.'


그것은 자판기의 결제 모듈이 아니었다.


자판기 부품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제 패널이 아니라, 단순히 자판기 하단에 부착되어 있던 '강철 쓰레기통의 뚜껑'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것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최상철의 칩이 22개나 차감되었을까?


태현은 주머니 속에서 진짜를 꺼냈다. 어젯밤 서유진에게 받았던 또 다른 아이템.


그것은 바로 '자판기 기기 고장 수리용 마스터 패드'였다. 유진이 쓰레기통 틈새에 숨겨두었던 바로 그것.


그녀는 시스템 분석가답게, 어제 태현에게 10칩을 대출받아 살아남은 뒤 요람의 설비를 뜯어보고 이사회가 비상시 사용하는 마스터 권한의 패스워드와 시스템 백도어를 찾아낸 것이다.


태현이 방금 전 최상철에게 내밀었던 것은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가짜 강철 껍데기였고, 진짜 마스터 패드는 태현의 손바닥 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상철이 밴드를 가져다 대는 순간, 태현은 마스터 패드의 권한을 이용해 강제로 상철의 칩을 '자판기 오류 차감' 명목으로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오프라인 저장소 같은 개소리를 믿다니.'


태현의 손목 밴드 숫자는 여전히 [122]였다. 상철의 칩 22개는 태현에게 넘어온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 남은 패를 쪼여볼까."


태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마스터 패드의 작은 액정을 두드렸다.


그가 어젯밤 유진에게 명령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이 마스터 패드를 이용해, 이 요람 안에 있는 모든 단말기의 '보유 칩 현황'을 빼내라는 것.


액정에 남은 13명 생존자들의 칩 보유 현황이 주르륵 떠올랐다.


[강태현: 122]


[최상철: 23]


[서유진: 13]


...


나머지 10명은 모두 10칩 미만이었다.


'완벽해.'


태현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상철의 칩을 훔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태현이 진정 원했던 것은 상철의 '자본력 파괴'였다.


만약 오늘 아침 게임에서 최상철이 여전히 45칩을 들고 있었다면?


그는 태현 다음가는 자본가로서, 칩이 없는 다른 하위 계층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레이즈)을 넣을 수 있었다. 판을 흔들 수 있는 변수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철의 칩은 23개. 이 정도면 약간 여유가 있을 뿐, 다른 숏 스택들을 완벽하게 짓누를 만큼의 압도적인 힘은 되지 못한다.


결국 이 요람 안에서 세 자릿수 칩을 보유한 진정한 절대 권력자는 이제 강태현 단 한 명뿐이었다.


"이사회."


태현은 천장의 스피커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니들이 깔아놓은 판은 다 좋은데, 딜러가 통제 불능이면 게임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08:00 AM]


기이이잉-


고막을 찢는 알람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캡슐에서 걸어 나온 13명의 생존자들은 어젯밤 죽어간 40여 구의 참혹한 시신들을 보며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사회의 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약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육중한 강철 격벽이 열리고, 눈부신 조명과 함께 여명의 감독관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등장했다.


"오염된 숨결을 이겨내고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 미도달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감독관의 시선은 13명의 생존자들을 훑어보더니, 유독 태현에게 머물렀다. 마스크 너머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계심과 흥미가 뒤섞여 있었다.


"어젯밤, 나약한 믿음을 가졌던 40명의 형제들이 심연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살아남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비로운 이사회는 여러분의 헌신을 시험하기 위해 더 거대한 축복을 준비했습니다."


감독관의 손짓과 함께, 요람 중앙 바닥이 열리며 단 두 개의 거대한 원형 테이블만이 솟아올랐다.


"오늘의 의식은 '블라인드(Blind)의 심판'입니다."


감독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6명과 7명, 두 개의 테이블로 나뉩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작위의 '죄업(숫자 합)'을 배정받지만, 치명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러분은 배팅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죄업 패널의 숫자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상대방의 숫자를 유추하고, 자신의 믿음만을 무기로 제단에 칩을 바쳐야 합니다."


"뭐, 뭣?! 카드를 안 보고 베팅하라고요?!"


누군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해석하자면, 카드를 덮어둔 채로 베팅만 진행하는 극단적인 블라인드 룰이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남은 자 중 죄업이 가장 높은 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정화(전기의자)'를 받게 될 것입니다."


감독관의 섬뜩한 선언에 생존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의 카드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베팅을 해야 하고, 끝까지 남았다가 질 경우 전기구이가 된다. 이것은 운의 요소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동시에, 공포를 극대화하여 사람들의 이성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려는 이사회의 악랄한 설계였다.


"자, 테이블에 앉으십시오."


태현은 감독관을 비웃듯 쳐다보며, 가장 크고 정중앙에 위치한 1번 테이블로 걸어갔다.


'내 패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내 베팅에 혼란을 주겠다? 멍청한 새끼들.'


카지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패를 안 보고 치는 놈이다. 애초에 카드의 높낮이 따위는 태현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쥐고 있는 무기는 '확률'이 아니라, 상대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자본(칩)'이었으니까.


1번 테이블에는 태현을 비롯해, 칩을 절반이나 날려 먹고도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는 최상철,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4명의 참가자가 앉았다. 서유진은 2번 테이블로 빠졌다.


[두 번째 의식을 시작합니다. 기본 헌금은 5칩입니다.]


첫판부터 기본 헌금이 1에서 5로 확 뛰어올랐다. 이사회는 판돈을 빠르게 소진시켜 게임의 템포를 미친 듯이 끌어올릴 작정이었다.


태현의 손목에서 5칩이 빠져나갔다.


[117칩]


하지만 태현은 패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불투명하게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턱을 괴고, 첫 번째 베팅 순서인 최상철을 쳐다보았다.


"자, 시작하시지."


상철은 헛기침을 하며 거들먹거렸다. 그는 자신의 칩이 여전히 45개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태현과의 뒷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상철이 호기롭게 자신의 패드를 내리쳤다.


"헌금 10칩!"


하지만 그 순간, 기계음이 차갑게 울렸다.


[오류. 보유 칩이 부족하여 헌금을 올릴 수 없습니다. 잔여 칩: 18]


(기본 헌금 5칩이 빠져나가 23->18이 됨)


"…어?"


상철의 뚱뚱한 얼굴이 일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굳어졌다.


"잠, 잠깐! 기계가 고장 났어! 내 칩이 왜 18개야?! 아까까지만 해도 45개였는데!"


상철이 미친 듯이 패드를 두드렸지만 기계는 묵묵부답이었다. 상철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더니,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고개를 휙 돌려 태현을 쳐다보았다.


"가, 강태현… 너… 네놈이 아까…!"


태현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세상에서 가장 나른하고 무해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왜 그래? 최 사장. 칩이 모자라나 보지?"


태현의 조롱 섞인 한마디에, 상철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오프라인 저장소? 자판기 오류?


전부 씹어 먹을 개소리였다. 강태현은 아침의 그 45초 동안, 완벽한 사기극으로 자신의 칩 절반을 허공에 날려버린 것이다.


"이… 이 악마 새끼야아아악!!"


상철이 이성을 잃고 테이블 너머로 몸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태현의 손이 더 빨랐다. 태현은 패널에 숫자를 입력하고 쾅, 내려쳤다.


[6번 미도달자. 헌금 100칩. (All-in)]


"…!!"


테이블 주변의 공기가 쩍, 하고 갈라지는 듯했다.


기본 헌금이 5인 판에서, 첫 베팅부터 무려 100칩을 밀어 넣은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패가 뭔지 보지도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대방의 숨통을 단번에 짓눌러버리는 압도적인 자본의 폭력이었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호구 새끼들아."


태현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테이블을 휩쓸었다.


상철을 비롯한 나머지 참가자들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의 눈앞에는 오직 전기의자의 시퍼런 스파크와 100칩이라는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감독관의 마스크 너머 눈빛이 처음으로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우스가 깔아놓은 룰의 허점을 비웃듯 찢어발기는 천재 타짜의 미친 도박판.


블라인드의 심판은, 강태현의 완벽한 독무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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