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판옵티콘의 사생아

by 연구소장

[08:05 AM]


강태현의 무자비한 '100칩 블라인드 베팅'은 판을 완벽하게 얼려버렸다.


1번 테이블에 앉은 나머지 참가자들의 호흡이 멈췄다. 그들의 손목 단말기에 찍힌 잔여 칩은 고작해야 5에서 8 남짓. 패가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태현의 베팅을 받아들이려면 100칩은커녕 당장 전 재산을 걸고 올인(All-in)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차마 '헌신'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패배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 전기의자의 시퍼런 스파크가 뇌리를 옥죄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패가 쓰레기라면? 저 미친놈이 사실 엄청나게 좋은 패를 들고 저러는 거라면?


"크으윽… 기, 기도…!"


가장 먼저 4번 참가자가 창백한 얼굴로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자 둑이 무너지듯 다른 참가자들도 쫓기듯 '기도' 버튼을 눌렀다. 자신만만했던 최상철조차 부들부들 떨며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패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18칩으로는 100칩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태현의 서늘한 눈빛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압사당한 상태였다.


[모든 미도달자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6번 미도달자가 제단의 정화 칩을 거두어갑니다.]


띠링-


태현의 손목 단말기로 기본 헌금들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왔다. 단 30초 만에 판돈 30칩을 쓸어 담은 것이다.


[잔여 정화 칩: 147]


태현은 조용히 자신의 패널에 뜬 숫자를 확인했다.


[죄업: 9, 10] (합 19)


게임 내 최악의 패. 뒤에서 1등이었다. 만약 누군가 미친 척하고 1칩이라도 얹어서 태현의 베팅을 따라왔다면, 전기의자에서 타죽는 것은 태현 본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현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의 패를 보지 못했다. 그가 쓰레기 패를 쥐고 블러핑을 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벙커 안에 아무도 없었다. 하우스가 조작한 '맹목의 저울'이라는 공포스러운 룰이, 역으로 태현의 완벽한 블러핑을 가려주는 최고의 맹점이 되어준 셈이었다.


게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1번 테이블은 사실상 게임이 성립되지 않았다. 카드를 보지 못한 채 진행되는 심리전에서, 147칩이라는 압도적인 자본을 쥔 강태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현은 패가 좋을 땐 적당히 베팅하여 다른 사람들의 칩을 갉아먹었고, 패가 나쁠 땐 어김없이 무자비한 올인성 베팅으로 판을 엎어버렸다.


최상철을 비롯한 다른 참가자들은 태현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패를 꺾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사회가 의도했던 극한의 공포와 적자생존은, 오직 강태현이라는 한 명의 포식자를 위한 독무대로 변질되어버렸다.


[1번 테이블 의식 종료. 6번 미도달자 독식.]


단 20분 만에 1번 테이블의 게임이 끝났다.


태현의 손목 밴드에는 **[182]**라는, 요람 안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이로운 숫자가 찍혀 있었다.


반면 최상철의 칩은 [3]으로 곤두박질쳐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은 모두 칩이 0이 되어버렸다. 오늘 밤, 그 네 명은 캡슐 밖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다. 그들은 절망에 빠져 오열하거나 태현을 저주했지만, 태현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2번 테이블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여자 좀 봐!"


"말도 안 돼…!"


태현이 고개를 돌리자, 2번 테이블의 게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서유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목 단말기에는 **[68]**이라는 제법 큰 숫자가 찍혀 있었다. 태현이 빌려준 10칩으로 시작하여, 판의 흐름을 읽고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마지막 한 명, 깡마른 체격의 노인이 문제였다. 노인의 단말기 숫자는 [0]. 이번 판에서 지면 끝장인 상황이었다.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자신의 칩을 모두 제단에 바치며 소리쳤다.


"내, 내 죄업은 낮을 거야! 분명 낮을 거라고!"


서유진은 노인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차분하게 '헌신' 버튼을 눌러 노인의 올인 베팅을 받아냈다.


[모든 헌신이 종료되었습니다. 두 미도달자의 죄업을 확인합니다.]


테이블 앞 패널의 불투명한 유리가 투명하게 바뀌며, 두 사람의 숫자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노인: [죄업: 2, 4] (합 6)


서유진: [죄업: 1, 3] (합 4)


"아… 아아아…!"


노인의 입에서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간발의 차이로 서유진의 패가 더 낮았다.


[2번 테이블. 7번 미도달자의 죄업이 가장 높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육신의 정화를 집행합니다.]


파지지직- 콰직!!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퍼런 고압 전류가 노인의 몸을 휘감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악취와 비명이 요람 안을 가득 채웠다. 단 10초 만에 노인은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 고꾸라졌다.


그 끔찍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서유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노인의 칩을 거두어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쓸만하군.'


태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동정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기계처럼 확률과 이익만을 계산하는 태도. 시스템 분석가다운 완벽한 이성이었다. 이 지옥 같은 요람에서 살아남기에, 그리고 태현의 판을 도와 시스템을 무너뜨리기에 아주 적합한 장기말이었다.


[두 번째 의식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1번과 2번 테이블이 바닥 아래로 꺼졌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단 7명.


그중 강태현(182칩)과 서유진(68칩)이 압도적인 자본을 쥐고 있었고, 나머지 5명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든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단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훌륭한 솜씨군요, 강태현 씨."


여명의 감독관이 느릿한 박수를 치며 태현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로 검은 사병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도열해 있었다.


"어제는 룰의 사각지대를 이용하더니, 오늘은 아예 룰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베팅이라. 과연, 심연에 떨어진 영혼치고는 제법 불온한 재능입니다."


감독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이사회가 통제하려던 공포와 적자생존의 질서가, 태현의 기형적인 자본 독식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칭찬으로 듣지."


태현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감독관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감독관 나리. 판이 너무 시시하게 끝나버려서 좀 섭섭한데. 이래서야 하우스가 떼어가는 수수료(레이크) 장사가 제대로 되겠어? 내일 아침이면 나랑 저 여자(서유진) 말고는 전부 캡슐 밖에서 뒈질 텐데 말이야."


태현의 도발에 감독관의 은빛 마스크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현의 말은 하우스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고 있었다. 카지노는 참가자들이 오래 살아남아 계속해서 게임을 굴려야 칩을 빨아먹을 수 있다. 그런데 태현이 단 이틀 만에 판돈을 독식해 버리면서,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자본의 데드록(Deadlock)'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감독관은 한참 동안 태현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차갑게 몸을 돌렸다.


"걱정 마십시오. 이사회의 은혜는 당신의 얄팍한 계산을 아득히 뛰어넘을 테니까. 내일, 세 번째 의식에서는 당신의 그 오만함이 가장 비참한 절망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감독관과 사병들이 강철 격벽 너머로 사라졌다.


격벽이 닫히는 굉음과 함께, 다시 요람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현은 텅 빈 중앙 광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절망에 빠진 5명의 패배자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감각한 눈으로 상황을 관시하고 있는 서유진.


'판이 너무 빨리 기울었어.'


태현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사회가 이대로 순순히 3일 차 아침을 맞이하게 둘 리 없었다. 룰을 파괴한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변칙적인 룰이나 끔찍한 함정을 파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사회가 손을 쓰기 전에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한다.


태현은 주머니 속의 가짜 금속 모듈과, 유진이 넘겨주었던 마스터 패드를 번갈아 만지작거렸다.


오늘 아침 확인한 카메라의 사각지대, 격벽 너머의 수직 통로, 그리고 마스터 패드로 알아낸 요람의 시스템 구조.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정보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사회의 허상을 깨부수고 이 벙커를 뒤집어엎을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바로….'


태현의 서늘한 시선이, 굳게 닫힌 전면의 강철 격벽을 향해 꽂혔다.


'저 문을 열고, 딜러의 멱살을 직접 쥐어 흔드는 거다.'


심연의 카지노를 통제하려는 전능한 이사회와, 그들이 만든 룰을 기만과 자본으로 부숴버리는 천재 딜러.


지금까지가 테이블 위에서의 탐색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벙커의 심장부를 향한 피 튀기는 목숨 건 진짜 도박판이 열릴 참이었다.


[오후 1:00 PM. 세 번째 의식을 위한 특별 규칙이 하달됩니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예상치 못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태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사회의 반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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