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 / 현재]
시간이 멈춘 듯했다.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나를 향해 뻗어오는 짐승의 발톱.
[경고: 대뇌피질 통제권 42% 상실.]
[신경망 붕괴가 시작됩니다.]
머릿속에서는 천만 개의 바늘이 뇌수를 찌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폭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강제 동기화 신호가 나의 시신경을 마비시키려 들었다. 눈앞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이며 아스팔트 바닥이 일렁였다.
하지만,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억지로 초점을 맞췄다.
'웃기지 마. 수술방 집도의는 나야. 이깟 기생충 따위한테 시야를 뺏길 것 같아?'
나는 어금니를 박살 낼 기세로 짓씹으며 강제로 스킬을 끌어올렸다.
[시스템: 신의 손(Lv.1) 강제 활성화]
[시스템: 약점 포착 강제 활성화]
파직!
순간, 머릿속에서 끊어질 듯한 이명이 울리며 시야가 기적처럼 맑아졌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공중으로 도약한 거대 감염자의 전신 근육과 혈관, 그리고 신경계의 맥락이 붉은색 홀로그램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리 약물로 진화하고 통각을 상실한 괴물이라도, 결국 물리적인 인체 구조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건(Tendon)'과 '운동 신경'이 끊어지면, 고통을 느끼든 말든 육체는 고철 덩어리가 된다.
"회장님!!"
백강우의 절규가 들려오는 찰나, 나는 몸을 극단적으로 낮추며 괴물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내 어깨의 하얀 가운을 찢고 지나갔다. 서늘한 통증이 스쳤지만 뼈에는 닿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내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메스가 은빛 궤적을 그렸다.
서걱-!
첫 번째 타겟. 놈의 우측 무릎 뒤쪽, 오금(Popliteal fossa)을 지나는 슬발줄(Hamstring tendon).
"크아악...!"
도약의 추진력을 잃은 괴물의 몸이 공중에서 기우뚱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타겟.
나는 바닥을 구르며 괴물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떨어지는 궤적에 맞춰 메스를 위로 쳐올렸다.
목덜미 아래, 쇄골 상단에 위치한 상완신경총(Brachial plexus). 팔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는 핵심 신경 다발.
푸욱! 치아아악-!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내 얼굴을 적셨다.
"크, 크르륵...!"
땅에 착지하려던 괴물은 다리와 팔의 신경이 동시에 끊어지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거대한 고목나무가 쓰러지듯 아스팔트 바닥에 안면을 처박으며 곤두박질쳤다.
쿠웅-!
엄청난 질량이 바닥을 때리며 먼지가 일었다. 놈은 통각을 상실했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다시 일어나려 발악했지만, 끊어진 우측 다리와 덜렁거리는 좌측 팔은 놈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지금이야! 눌러!!"
내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백강우와 박철민을 위시한 1기생 열 명이 전술 방패를 들고 짐승처럼 쇄도했다.
쾅! 쾅!
열 개의 방패가 괴물의 사지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바닥으로 짓눌렀다.
"수진아!"
"투여합니다!"
한수진이 방패 틈으로 뛰어들어, 괴물의 온전한 왼쪽 허벅지에 초고농도 수면 진정제를 내리꽂았다.
푸쉬익-!
피스톤이 끝까지 들어가고 단 3초. 산이라도 뽑을 듯 발악하던 괴물의 근육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거친 숨소리와 함께 축 늘어졌다. 완전히 제압된 것이다.
"하아... 하아..."
나는 그 광경을 확인하고 나서야 쥐고 있던 메스를 떨어뜨렸다.
한계였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스킬을 유지했던 반동과, 동기화율 45%를 넘어선 뇌신경의 과부하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쿨럭, 컥...!"
내 입에서 검붉은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내 몸을, 박철민이 다급하게 날아와 받아냈다.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도현아! 억제제! 빨리!"
백강우가 피투성이가 된 나를 안고 절규했다.
구급차 쪽에 있던 민도현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극약 처방용 억제제 앰플이 들려 있었다.
"간 수치가 임계점입니다! 이거 맞으면 진짜 간이 녹아내릴 수도 있어요!"
민도현이 울먹이며 주사기를 들고 주저했다.
"쏴... 이 새끼야..."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민도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뇌가 타서... 아버지 꼭두각시가 되는 꼴... 보고 싶어? 간이 녹으면... 이식하면 그만이야... 쏴!!"
나의 처절한 명령에, 민도현이 이를 꽉 깨물고 내 목 정맥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타고 뇌로 직행했다. 마치 불타는 용광로에 얼음물을 들이붓는 듯한 끔찍한 감각.
[경고: 강력한 화학적 억제제가 투여되었습니다.]
[나노 머신 코어의 활동이 강제 둔화됩니다.]
[현재 동기화율: 45%... 30%... 15%... 일시 중지.]
시스템 알림창의 붉은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폭발할 것 같던 뇌의 통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나는 깊은 기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백강우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강우 형... 전선... 밀리지 마. 이 거리의 감염자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잡아서... 우리 병원으로 욱여넣어... 현장 지휘는... 네가 해."
"걱정 마십쇼! 제가 다 찢어발겨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십쇼!"
백강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세상은 완벽한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일정한 기계의 전자음 소리에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천명 외상센터의 최상층 VVIP 병실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우측 팔에는 수액과 영양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온몸의 근육은 두들겨 맞은 듯 쑤셨다.
"일어나셨습니까, 회장님."
병실 구석의 소파에 앉아 있던 백강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전술복은 찢어지고 피투성이였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지금... 며칠이나 지났지?"
목이 사포로 문지른 듯 갈라져 있었다.
"이틀입니다. 꼬박 48시간을 기절해 계셨습니다. 간 수치가 급성 간염 수준으로 튀어서, 도현이가 중화제 투여하느라 애를 좀 먹었습니다."
"이틀..."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강남역은. 감염자들은 다 잡았나? 퍼지지는 않았어?"
백강우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회장님이 쓰러지신 직후, 저희 기동대 100명이 강남역 사거리를 완벽하게 봉쇄했습니다. 경찰 특공대와 협조해서 도주하는 감염자 42명을 전원 마취총과 진정제로 제압했고, 물린 부상자 120여 명을 전부 저희 병원 음압 격리실로 수용했습니다."
태블릿 화면에는 '천명 외상센터'의 전경이 떠 있었다. 병원 외곽에는 수십 대의 경찰 장갑차와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방호복을 입은 1기생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완벽한 군사 요새의 모습이었다.
"추가 감염자는?"
"없습니다. 발생 초기에 회장님이 미친 듯이 전선을 밀어붙인 덕분에, 감염자들이 강남역을 벗어나기 전에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민도현이 개발한 초기 항바이러스제를 물린 환자들에게 즉각 투여해서 잠복기 발현도 막아냈고요."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던진 최악의 화두를, 나의 1기생들이 완벽하게 방어해 낸 것이다. 국지전이었지만, 우리가 이겼다.
"여론은 어떻지? 괴물들이 물어뜯고 다니는 걸 수천 명이 목격했어. 정부가 이걸 숨길 수는 없을 텐데."
내 질문에 백강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게 좀... 기가 막힙니다. 정부가 아주 필사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공식 발표로는 '신종 환각제(좀비 마약)를 집단 복용하고 일으킨 대규모 폭력 시위'로 몰아가고 있어요. 감염병이나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삭제되고 있습니다."
"당연하겠지."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대한민국 심장부에서 전염성 좀비 바이러스가 터졌다고 발표해 봐. 당장 주식 시장은 반토막 나고, 외국 자본은 다 빠져나가고, 국가는 패닉에 빠져 무정부 상태가 될 거다. 정권이 날아갈 판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들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 로비에... 아주 높으신 분이 이틀째 진을 치고 계십니다. 회장님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리면서요."
"높으신 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 장관도 같이 와 있고요."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 전리품을 수거하고, 다가올 전쟁을 위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이다.
"수액 뽑아. 넥타이 가져오고."
"회장님! 아직 안정이 필요합니다!"
"나라의 머리통이 직접 왕림하셨는데, 누워서 손님을 맞을 순 없지. 아, 도현이가 만든 그 억제제도 한 대 더 놔줘. 협상하다가 아버지 귀신이 씌면 곤란하니까."
[천명 외상센터, 최상층 대회의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내가 걸어 들어오자,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두 명의 중년 남성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대한민국 권력의 2인자라 불리는 대통령 비서실장 박태준, 그리고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아이고, 천 회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박태준 실장이 허겁지겁 다가와 내 손을 맞잡으려 했다.
평소 같았으면 일개 병원의 이사장(혹은 회장) 따위가 감히 겸상하기도 힘든 권력자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비굴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무시하고 상석에 가 앉았다.
"몸 상태를 물어보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시간이 금이신 분들이 이틀이나 병원 로비에서 대기하셨다니, 본론부터 하시죠."
내 거만한 태도에 복지부 장관이 헛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지만, 박태준 실장이 눈치를 주며 그를 제지했다.
"크흠... 천 회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틀 전 강남 사태... 천명 재단의 기동 의료대가 아니었다면 정말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습니다. VIP(대통령)께서도 천 회장님의 결단력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감사는 됐고. 청구서를 내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이게 뭡니까?"
"민도현 박사가 분석한, 그날 강남에서 잡아 온 감염자들의 혈액 리포트입니다. 신종 환각제? 좀비 마약? 개소리라는 거 실장님도 이미 다 알고 오셨잖습니까."
나의 돌직구에 박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단순한 마약이 아니라, 광견병 바이러스의 RNA를 조작해 만든 생물학적 병기. 물리면 전염되는 명백한 '바이오 테러'입니다. 정부가 언론을 막고 인터넷을 통제한다고 덮일 수준이 아니라는 거, 윗선에서도 다 파악 끝났겠죠."
"천 회장님...!"
박 실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대한민국은 끝장납니다!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킬 거고, 경제는 붕괴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건 '단순 환각제 사건'으로 덮어야만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꺼이 정부의 은폐 공작에 협조해 드리려고 부른 거 아닙니까."
나는 등받이에 푹 기대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데리고 온 42명의 감염자, 그리고 120명의 잠복기 부상자들. 저희 천명 외상센터의 지하 음압 병동에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자체 개발한 억제제로 바이러스 확산도 막아놓았죠. 이 병원 문을 닫고 제가 입을 다무는 이상, 강남역 사태는 정부의 발표대로 영원히 '마약 난동 사건'으로 묻힐 겁니다."
"오오... 역시 천 회장님은 애국자이십니다! 국가의 위기를..."
"공짜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박 실장의 화색이 채 돌기도 전에,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제가 입을 다물고, 이 끔찍한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몰래 개발해서 국가의 방패막이가 되어드리는 대가.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첫째. 이 시간부로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 산하의 모든 병원과 시설은 대한민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절대 치외법권' 구역으로 설정합니다. 경찰, 검찰, 보건복지부, 그 어떤 공권력도 제 허가 없이는 이 병원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어떻게 치외법권을...!"
복지부 장관이 펄쩍 뛰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둘째. 제 직속 부대인 '천명 1기 기동 의료대' 100명 전원에게 총기 소지 허가 및 준군사조직 수준의 교전권을 부여하십시오. 괴물들을 잡으려면 마취총 따위가 아니라 진짜 화력이 필요하니까요."
"셋째."
나는 박 실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바이러스를 강남에 뿌린 진짜 범인... '천무성' 전 회장의 포획과 관련된 모든 작전 통제권을 저에게 넘기십시오. 경찰 특공대든 군 부대든, 제 지휘 아래 움직이게 만드세요."
세 가지 조건.
그것은 일개 병원 재단을 순식간에 국가 내의 독립된 '군사 요새'이자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으로 격상시켜 달라는 미친 요구였다.
"천 회장님... 이건 선을 넘으셨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급해도, 민간인에게 군사권과 치외법권을 넘길 수는..."
"선을 넘은 건 당신들이 아니라, 이 판을 짠 천무성입니다."
나는 쾅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무성이 강남역에 푼 건 꼴랑 40명 남짓한 테스터들일 뿐입니다. 만약 놈이 수만 명 분량의 바이러스를 한강 정수장이나 지하철 환풍구에 풀어버리면? 그때 당신들의 그 알량한 공권력이 무슨 소용입니까!"
박 실장의 얼굴에 절망적인 공포가 스쳤다.
"이건 질병관리청이 나설 백신 싸움이 아닙니다. 전쟁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에 던진 선전포고라고요. 이 바이러스를 가장 잘 알고, 유일하게 억제할 수 있는 치료제를 가진 건 전 세계에서 저 하나뿐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저한테 전권을 주고 이 요새를 국가의 방어선으로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병원 문을 활짝 열고 40명의 괴물들을 거리에 방생하여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꼴을 구경하시겠습니까? VIP께 전화해서 결정하라고 하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회의실 안에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만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박태준 실장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잠시... VIP와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비틀거리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복지부 장관은 차마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저 빌딩 숲 아래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들이 독을 품고 숨죽여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벌었다.'
군사용 EMP가 도착하고, 내 몸속의 킬 스위치를 제거할 수 있는 '초저체온 순환 정지 수술(DHCA)'을 받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주.
이 2주 동안, 나는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으며 이 병원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개조할 것이다.
[같은 시각, 경기도 가평 천성전 지하 벙커]
"크흐흐흐... 카하하하핫!!"
어두운 벙커 안, 휠체어에 앉은 천무성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모니터 속에는 강남역 사태를 완벽하게 진압하고 정부와 딜을 치고 있는 아들, 천이환의 모습이 해킹된 병원 CCTV를 통해 고스란히 송출되고 있었다.
"보았느냐, 대사제. 저 완벽한 위기 대처 능력! 저 악마 같은 협상술! 내 아들이지만 정말로 탐나는 육체요, 탐나는 지능이 아니더냐!"
천무성은 기쁨에 몸을 떨며 자신의 메마른 손바닥을 비볐다.
자신이 푼 괴물들이 허무하게 제압당했음에도 그는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애초에 강남역 사태는 아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기 위한 '스트레스 테스트'였을 뿐.
"교주님... 하지만 도련님이 정부의 힘을 등에 업고 병원을 요새화한다면, 저희가 그 육체를 회수하기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대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리석은 소리."
천무성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요새가 튼튼해질수록, 그 안의 왕은 오만해지는 법이다. 녀석은 2주 뒤면 나를 피해 수술대 위에 오를 작정이겠지. 그 2주 동안, 녀석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요새'가, 사실은 가장 거대한 '감옥'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마."
천무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두 번째 장기 말을 움직여라. 이번엔 길거리의 잡동사니들이 아니라... 녀석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윗물'들에 독을 타는 거다."
"명 받들겠습니다."
천무성은 모니터 속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천이환의 뒷모습을 탐욕스럽게 핥아내리듯 쳐다보았다.
"기다려라, 나의 아담. 네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 내가 그 왕좌에 앉아 네 모든 것을 취할 테니."
지옥의 1라운드가 끝났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 '메디컬 콜드워(Medical Cold-War)'의 서막은 이제 막 그 기괴한 눈을 번뜩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2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