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을 네가 정한다고?"
독사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하층민 구역을 지배하는 850칩의 절대 권력자 앞에서, 고작 108칩을 쥔 뉴비가 감히 판을 쥐고 흔들려 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사설 경호원들과 하층민들이 어이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단판으로 108칩만 먹고 끝내면 섭섭하잖아. 안 그래?"
태현은 삐딱하게 앉은 채, 손가락 사이로 가벼운 플라스틱 칩을 빙글빙글 돌렸다.
"노 리밋 텍사스 홀덤(No-Limit Texas Hold'em). 블라인드는 5/10. 내 칩 108개가 오링 나든, 네 손목에 있는 850칩이 전부 내 주머니로 들어오든. 둘 중 하나가 파산할 때까지 일어날 수 없는 '데스매치'로 간다."
독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08칩 대 850칩. 자본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다. 노 리밋 홀덤에서 스택(자본)의 차이는 곧 무기의 차이다. 언제든 상대를 올인(All-in)의 압박으로 짓눌러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크큭. 위에서 떨어지더니 대가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쥐새끼가 제 발로 독사 아가리로 기어들어 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콜."
독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절했던 딜러 대신 날렵한 인상의 새로운 딜러가 황급히 테이블 중앙으로 와서 새 트럼프 카드를 뜯었다.
"서유진. 뒤에 서서 주변 똥파리들 못 달려들게 분위기나 잡아."
태현이 나지막이 지시하자, 유진은 말없이 태현의 의자 뒤로 물러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경호원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촤르르륵-
딜러의 화려한 셔플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핸드]
태현이 받은 카드는 스페이드 2, 하트 7. 최악의 쓰레기 패였다.
독사가 카드를 힐끗 보더니 거만하게 20칩을 밀어 넣었다.
"레이즈(Raise)."
"폴드(Fold)."
태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를 던졌다.
[두 번째 핸드]
태현의 카드 클로버 9, 다이아 4.
"하프." 독사가 또다시 강하게 베팅했다.
"폴드." 태현은 또 카드를 덮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태현은 계속해서 기본 블라인드(참가비)만 뜯기며 카드를 꺾었다. 108개였던 칩은 어느새 80개 언저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뭐야, 쫄았냐? 입만 살아서는 계속 도망만 다니네."
독사가 낄낄거리며 조롱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실망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태현의 눈빛은 맹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폴드를 외친 이유는 패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상대의 **'사기 수법'**을 스캔하는 중이었다.
이런 시궁창 사설 하우스에서 보스인 독사가 정직하게 확률 게임을 할 리 만무했다. 태현의 시선은 딜러의 손끝과, 독사의 시선, 그리고 버려지는 카드들의 뒷면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카드 뒷면 패턴의 미세한 비대칭. 엣지 소팅(Edge Sorting)이군.'
불과 다섯 판 만에 태현은 트릭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카드의 뒷면 문양은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공장에서 인쇄될 때 상하좌우가 1mm 정도 미세하게 어긋나게 잘리는 경우가 있다. 딜러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A, K, Q 같은 높은 카드들이 오픈될 때마다, 그 카드들을 거두어들이며 슬쩍 180도 뒤집어서 덱에 섞어 넣고 있었다.
즉, 높은 카드들만 뒷면 패턴의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 독사는 그 미세한 패턴의 차이를 눈으로 읽어내어, 태현에게 들어간 카드가 높은 카드인지 낮은 카드인지 꿰뚫어 보고 베팅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잡한 새끼들.'
태현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말려 올라갔다.
사기꾼을 박살 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사기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사기 기술을 맹신하게 만들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기술을 역이용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이다.
[여섯 번째 핸드]
딜러가 카드를 돌렸다.
태현은 자신의 카드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슬쩍 확인했다. [스페이드 A, 다이아 A]. 프리플랍(공유 카드가 깔리기 전) 최강의 패, 포켓 에이스였다.
태현은 카드를 테이블에 엎어두며,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두 장의 카드를 180도 빙글 돌려놓았다. 높은 카드의 비대칭 패턴을, 강제로 낮은 카드의 패턴 방향으로 맞춰버린 것이다.
독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태현의 카드 뒷면 패턴을 힐끗 스캔하더니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패턴이 정방향. 쓰레기 카드 두 장이군.'
독사는 자신의 패 **[하트 J, 스페이드 10]**을 쥐고 호기롭게 칩을 던졌다.
"30칩. 레이즈."
쓰레기 패를 쥐고 있는 태현을 압박해 칩을 말려 죽이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태현은 당황한 척 연기를 하며, 남은 칩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남은 80칩, 올인(All-in)."
"오호라?"
독사의 눈이 반짝였다. 쓰레기 패를 쥐고 홧김에 블러핑을 친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 얄팍한 블러핑, 내가 받아주지. 콜!"
독사가 80칩을 따라붙었다.
딜러가 바닥에 다섯 장의 공유 카드를 주르륵 깔았다.
[2, 5, 8, K, 3]
독사에게는 아무것도 맞지 않은 꽝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태현 역시 아무것도 맞지 않은 쓰레기 패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J 하이(High)인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했다.
"자, 까보시지. 뉴비."
독사가 의기양양하게 J, 10을 오픈했다.
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 A, 다이아 A]
"……뭐, 뭣?!"
독사의 뱀 같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원 페어. 에이스. 내가 먹었네."
태현이 턱을 괸 채 독사의 110칩을 자신의 앞으로 스윽 끌어왔다. 순식간에 태현의 자본이 **[220칩]**으로 불어났다.
"이, 이 새끼가…! 방금 카드 뒷면이 분명…!"
독사가 태현의 카드를 삿대질하며 소리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카드 뒷면을 보고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드 뒷면이 뭐. 설마 이 시궁창 하우스에서 뒷면에 표시라도 해놨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태현이 빙긋 웃으며 독사의 정곡을 찔렀다. 독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우연이다. 저 새끼가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패턴이 돌아간 거야.'
독사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자신에겐 600칩이 넘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독사의 착각이었다. 한 번 주도권을 빼앗긴 타짜의 게임은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 기관차와 같다.
이어지는 핸드.
태현은 이제 노골적으로 카드의 패턴을 쥐락펴락했다. 좋은 패가 들어오면 패턴을 쓰레기처럼 돌려놓아 독사의 무리한 베팅을 유도했고(트랩), 쓰레기 패가 들어오면 패턴을 에이스처럼 돌려놓아 독사가 지레 겁을 먹고 폴드하게 만들었다(블러핑).
독사의 시야 정보(사기)는 태현의 교란에 의해 완벽한 독이 되어 돌아왔다.
"씨발! 또 졌어!"
"이 새끼 도대체 뭐야…!"
불과 한 시간.
단 10여 번의 치열한 공방 끝에, 판세는 소름 끼치도록 역전되어 있었다.
태현의 스택: [700칩]
독사의 스택: [150칩]
주변을 둘러싼 하층민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이 끔찍한 압살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108칩을 들고 온 뉴비가, 이 구역의 지배자를 한 시간 만에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독사의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미친 듯이 흔들렸다. 150칩. 이제는 그가 올인의 압박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왜 그래, 뱀 새끼. 독이 다 빠졌나?"
태현이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아, 산처럼 쌓인 칩을 툭툭 치며 조롱했다.
"닥쳐! 아직 안 끝났어!"
독사가 눈을 핏발 세우며 소리쳤다.
[마지막 핸드]
딜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카드를 돌렸다.
태현이 카드를 스윽 확인했다.
[하트 9, 스페이드 9] 포켓 9.
태현은 이번에는 카드의 패턴을 건드리지 않았다. 정직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독사가 자신의 카드를 확인했다.
[클로버 A, 다이아 A] 포켓 에이스! 최강의 패였다.
독사는 황급히 태현의 카드 뒷면 패턴을 확인했다. 방향이 돌아가 있지 않았다. 높은 카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겼다. 이 새끼는 낮은 패야. 이번 판에 저 새끼 칩을 다 빨아먹고 부활한다!'
독사가 피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남은 150칩을 모조리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올인!! 씨발, 150 올인!"
태현은 무심하게 150칩을 던졌다.
"콜."
판돈이 300칩으로 불어났다.
바닥에 세 장의 공유 카드가 깔렸다(플랍).
[9 다이아, K 하트, 2 스페이드]
순간, 태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바닥에 9가 깔리면서, 태현은 9 세 장(트리플, Set)을 완성했다. 독사의 A 원 페어를 완벽하게 박살 내는 압도적인 족보였다.
하지만 독사는 태현이 9를 들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채, 자신의 A 페어가 무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턴(네 번째 카드) 오픈.
[K 다이아]
바닥에 K가 한 장 더 깔리면서 보드는 [9, K, 2, K]가 되었다.
태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9-9-9-K-K, '풀하우스(Full House)'가 완성된 것이다.
리버(마지막 다섯 번째 카드) 오픈.
[4 스페이드]
최종 보드: [9, K, 2, K, 4]
"크하하하! 뒤졌어, 이 새끼야! 까봐!!"
독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에이스 두 장을 테이블에 쾅! 내리쳤다.
A, K 투 페어.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강력한 패였다.
"내가 먹었다! 칩 다 내놔!"
독사가 탐욕스러운 손길로 판돈을 쓸어 담으려던 찰나.
"손모가지 안 치워?"
태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도박장을 쩍 가르며 울렸다.
태현은 천천히 자신의 카드를 뒤집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트 9, 스페이드 9]
"……."
순간, 도박장 내부에 벼락이 떨어진 듯한 정적이 흘렀다.
독사의 눈동자가 태현의 9 두 장과, 바닥에 깔린 9, K, K를 번갈아 향했다.
9 트리플과 K 페어. 풀하우스.
"아… 아아… 아아아아악!!"
독사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다리가 풀리며 테이블 위로 흉하게 고꾸라졌다.
자신의 전 재산 850칩이 완벽하게 먼지가 되어버린 순간.
[정산 완료. 강태현 미도달자, 잔여 칩 850]
(태현의 남은 칩 550 + 딴 칩 300 = 850칩)
단 두 시간.
태현은 밑바닥 시궁창에서 벌어진 사기 도박판을 완벽한 지능과 심리전으로 유린하며, 단숨에 메인 구역 시민 계급을 능가하는 거대 자본(850칩)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태현이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나자, 독사의 수하들이었던 사설 경호원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하층민들은 신이라도 본 듯 경외와 공포에 찬 눈으로 태현을 우러러보았다.
"서유진."
태현이 자신의 손목 단말기에 찍힌 [850]을 쓸어내리며 불렀다.
"네." 유진이 다가왔다.
"내가 카지노에서 딜러 짓 할 때 제일 혐오했던 게 뭔지 아냐? 하우스가 돈을 독식해서 판이 말라 죽는 거였어. 판옵티콘 귀족 새끼들이 딱 그 짓거리를 하고 있지."
태현의 눈빛이 하층민 구역의 썩어빠진 천장을 뚫고, 그 위에서 오만하게 군림하고 있을 마에스트로와 이사회를 향해 번쩍였다.
"이 850칩. 내가 혼자 먹고 위층으로 올라갈 것 같아?"
태현이 입꼬리를 잔혹하게 비틀어 올렸다.
그는 손목 단말기를 조작해, 주변에서 침을 흘리며 구경하고 있던 수십 명의 하층민들을 향해 칩을 무작위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어, 헉?! 내, 내 단말기에 10칩이…!"
"나한테는 20칩이 들어왔어!!"
도박장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태현은 자신이 목숨 걸고 딴 850칩을, 굶주린 빈민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포하고 있었다.
"뿌려라. 이 시궁창에 칩이 썩어 넘칠 때까지. 칩의 가치가 개똥값이 돼서, 저 위층 귀족 새끼들이 가진 1,000칩이 휴지 조각이 될 때까지."
초 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그리고 하층민 자본 팽창을 통한 체제 전복.
튜토리얼을 찢고 올라온 밑바닥의 왕은, 이제 판옵티콘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경제' 자체를 암살하기 위한 미친 뱅크런(Bank Run)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