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하이퍼인플레이션

by 연구소장

[오후 5:00 PM. 하층민 구역 '검은 쥐 구멍']


"미쳤어! 진짜 칩이 들어왔다고!!"


"나한테 20칩! 20칩이야! 씨발, 나 이제 화장실에서 잘 수 있어!"


지독한 곰팡내와 핏자국이 엉겨 붙은 하층민 구역의 사설 도박장이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독사의 쇠파이프 아래서 쥐새끼처럼 숨을 죽이던 자들이었다. 단 1칩을 얻기 위해 서로의 살점을 물어뜯고, 5칩을 내지 못해 전기의자에 앉아 타죽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던 그들. 그런 밑바닥 빈민 수십 명의 손목 단말기에, 태현이 뿌린 칩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려 태현의 구두코에 입을 맞추려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단말기 액정을 보며 미친 듯이 오열했다.


단 두 시간 만에 독사의 전 재산 850칩을 빼앗아, 그중 600칩 이상을 허공에 흩뿌려버린 강태현. 그가 서 있는 곳 주변으로는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외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강태현 씨."


구석에서 마스터 패드를 챙긴 서유진이 다가왔다. 늘 냉정하던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에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850칩이면 당장 시민 구역의 게이트를 통과해 안정적인 거주지를 얻고, 남은 돈으로 상위 도박장에 진입할 수 있는 막대한 자본입니다. 그걸 왜 이 하층민들에게 거저 나눠준 거죠?"


"서유진. 넌 시스템을 해킹하는 덴 천재지만, 사기꾼들의 생태계는 잘 모르는군."


태현은 주머니에 남은 200여 칩이 찍힌 단말기를 툭툭 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850칩을 들고 시민 구역으로 올라가면, 우린 그저 '운 좋게 돈 좀 만진 벼락부자' 취급을 받을 뿐이다. 마에스트로 같은 귀족 새끼들 수천, 수만 칩 앞에서는 금방 말라 죽을 푼돈이지."


태현의 시선이, 칩을 받고 환희에 미쳐 날뛰는 하층민들을 향했다.


"카지노 하우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나? 손님이 돈을 따가는 거? 아니. 하우스가 발행한 칩 자체의 가치가 휴지 조각이 되는 거다."


"…칩의 가치 하락이요?"


"그래. 이 판옵티콘의 이사회가 수천 명의 인간을 목줄 채워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저들이 물과 식량, 그리고 수면 캡슐을 통제하고 그것을 오직 '정화 칩'으로만 교환해주기 때문이야. 즉, 칩에 '생명'이라는 절대적인 신용이 담겨 있지."


태현이 유진에게 바짝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어제까지 1칩에 목숨을 걸던 이 밑바닥 수백 명의 거지 새끼들 주머니에 갑자기 10칩, 20칩이 생겼어. 그럼 이 새끼들이 제일 먼저 뭘 할 것 같아?"


유진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경제학의 가장 원초적인 논리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소비….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배식 자판기로 달려가겠죠."


"정답. 하지만 자판기의 물량은 매일 정해져 있어. 이사회가 하층민 구역에 할당해 둔 생수와 영양 팩의 수는 한정적이지. 왜냐? 여태까지는 이 거지들이 그걸 다 사 먹을 구매력이 없었으니까."


태현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말려 올라갔다.


"돈은 미친 듯이 풀렸는데, 물건은 없다. 그럼 어떻게 될까?"


"…하이퍼인플레이션(초인플레이션). 물가가 미친 듯이 폭등하겠군요."


"맞아. 하지만 단순히 돈만 푼다고 경제가 붕괴하진 않아. 여기에 '불안'이라는 기름을 부어야 완벽한 폭탄이 완성되지."


태현은 몸을 돌려, 독사의 밑에서 일하던 사설 경호원들과 양아치들을 불렀다. 독사가 파산하자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눈치만 보던 그들은, 태현이 부르자마자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달려왔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너희들. 지금 당장 하층민 구역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내라."


태현이 그들의 귓가에 악마처럼 달콤하고 치명적인 '가짜 뉴스'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방금 위층에서 내려온 1급 정보다. 이사회의 메인 서버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겨서, 내일 아침 08시를 기점으로 모든 하층민의 칩을 강제로 '0'으로 리셋(초기화)한단다. 물가 안정을 위한 징벌적 몰수지."


"네?! 칩을 전부 뺏는다고요?!"


양아치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방금 태현에게 칩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데, 내일 아침에 다 뺏긴다니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당장 칩을 들고 뛰어가서, 자판기에 있는 생수, 영양 팩, 통조림, 심지어 쓸데없는 잡동사니까지 모조리 사재기하라고 해. 내일 아침이면 칩은 쓰레기가 될 테니까, 진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는 놈이 이 구역의 왕이 될 거라고."


태현이 그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쐐기를 박았다.


"너희들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다. 살고 싶으면 당장 뛰어가서 물건부터 싹쓸이해. 그리고 이 소문을 미친 듯이 퍼뜨려."


"아, 알겠습니다, 형님! 야!! 당장 자판기로 뛰어!!"


양아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현의 거대한 선동(프로파간다)을 위한 나팔수로 전락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오후 8:00 PM. 뱅크런(Bank Run)]


단 세 시간.


가짜 뉴스가 하층민 구역 전체를 집어삼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내일 칩이 다 초기화된대!! 당장 물건으로 바꿔!!"


"비켜, 씨발! 내가 먼저야!"


하층민 구역 곳곳에 설치된 이사회의 공용 배식 자판기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평소라면 1칩이 아까워 벌벌 떨며 하루에 물 한 병을 겨우 뽑아 먹던 자들이, 태현에게 받은 칩을 들고 몰려와 자판기 버튼이 부서져라 연타하고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생수, 영양 팩, 담배, 심지어 진통제와 붕대까지.


자판기 안에 있던 모든 물자가 무서운 속도로 바닥나기 시작했다.


[오류. 해당 품목은 재고가 소진되었습니다.]


[오류. 일일 배급량이 초과하였습니다.]


자판기 액정에 붉은색 'OUT OF STOCK' 불빛이 들어오자, 뒤늦게 달려온 자들이 절망하며 자판기를 걷어차고 부수기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물건을 구하지 못한 하층민들의 눈은 곧바로 다른 곳을 향했다. 바로 시민 계급이 하층민 구역에 내려와 운영하는 '사설 상점'들이었다.


"이봐! 생수 한 병 줘! 1칩이지?!"


"1칩? 장난해? 자판기 물 다 떨어졌잖아. 지금부터 생수 한 병에 5칩이야!"


시민 계급 상인이 배짱을 튕겼다.


"좋아, 씨발! 5칩 결제해! 두 병 내놔!"


하층민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말기를 찍었다.


"어…?"


오히려 당황한 것은 시민 계급 상인이었다. 평소라면 5칩이라는 바가지에 욕을 하고 돌아섰을 거지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제를 해대는 것이다.


"야, 상점 물건 다 사들여! 내일이면 칩 다 휴지 조각된대!"


몰려든 하층민들이 상점 매대를 덮치듯 쓸어가기 시작했다.


생수 한 병의 가격은 1칩에서 5칩, 10칩, 그리고 순식간에 30칩까지 치솟았다.


물건을 팔아치운 시민 계급 상인들의 단말기에는 막대한 칩이 쌓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점차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미친… 거지 새끼들이 이 많은 칩이 다 어디서 난 거야? 잠깐, 칩이 이렇게 흔해지면… 내가 가진 칩의 가치는…?'


시민 계급 역시 태현이 퍼뜨린 가짜 뉴스(칩 초기화)를 주워듣고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다. 칩이 쓰레기가 된다면, 물건을 팔아 칩을 쌓아두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판매 중지! 셔터 내려! 더 이상 안 팔아!!"


상인들이 기겁하며 가게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광기에 휩싸인 하층민 군중은 통제 불능이었다. 칩을 손에 쥐고도 물과 식량을 사지 못한 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문 열어, 이 개새끼들아!! 돈 준다잖아!!"


콰직! 쨍그랑-!


쇠파이프와 벽돌이 상점의 유리창을 박살 냈다. 폭동이었다.


하층민들은 시민 계급의 상점을 약탈하고, 그들이 쌓아둔 실물 자산(식량과 물)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돈(칩)에 대한 신용이 붕괴하자, 오직 눈앞의 생존 물품만을 쟁취하기 위한 원초적인 폭력이 구역 전체를 휩쓸었다.


이사회의 룰? 감시 카메라? 전기의자의 공포?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화폐 시스템이 붕괴한 사회에서 법과 룰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오후 11:30 PM. 메인 구역 상층부, 마에스트로의 VIP 룸]


그 시각, 판옵티콘의 상위 1% 귀족들이 머무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마에스트로는 최고급 양주를 흔들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마에스트로 님! 하, 하층민 구역이 완전히 통제 불능입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수하가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왔다.


"사설 상점들이 모조리 약탈당했고, 생수 한 병의 암시장 거래가가 무려 100칩을 돌파했습니다! 군중들이 칩 결제를 거부하고 오직 물물교환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에스트로의 주름진 손이 일순간 멈칫했다.


"뭐라? 고작 반나절 만에 물가가 백 배나 뛰었다고?"


"그, 그게… 아까 튜토리얼에서 올라온 그 미친놈, 강태현이 하층민 보스 독사의 850칩을 빼앗은 뒤… 그걸 빈민들에게 모조리 살포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일 이사회가 칩을 리셋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요."


쨍그랑-!


마에스트로가 쥐고 있던 크리스털 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미친…."


노회한 도박사 마에스트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태현이 그저 사설 도박장이나 털어먹으며 계급을 올라오려는 뻔한 타짜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층민 구역으로 던져넣고 그가 발버둥 치는 꼴을 구경하려 했다.


하지만 태현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다리의 밑동 자체를 전기톱으로 썰어버리고 있었다.


화폐(칩)의 가치가 폭락한다는 것. 그것은 귀족들이 수만, 수십만 칩씩 쌓아둔 거대한 자본이 하루아침에 무가치한 '숫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칩이 권력인 판옵티콘에서, 칩의 가치 상실은 곧 기득권의 죽음이었다.


"폭동이 곧 시민 구역 경계선까지 번질 기세입니다! 사병들을 투입해 무력 진압해야 합니다!"


수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마에스트로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일어서며 이를 갈았다.


"수천 명이 미쳐 날뛰는 폭동에 사병을 투입해 학살을 벌이면, 이사회의 '공정한 룰'이라는 명분이 완전히 박살 난다. 그건 이사회가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야."


마에스트로의 뱀 같은 눈동자가 모니터 너머, 불타오르는 하층민 구역의 CCTV 화면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여유롭게 캔 커피를 마시며 카메라를 향해 건방지게 손을 흔들고 있는 강태현의 모습이 보였다.


"저 새끼는 단순한 도박사가 아니야. 시스템의 심장에 바이러스를 쑤셔 박는 경제 테러범이다."


마에스트로가 이를 악물며 명령을 내렸다.


"사병들 물려. 대신, 내 직속 수행원들을 내려보내."


"예? 폭동의 한가운데로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 강태현이라는 미친개한테 정중하게 전해. '마에스트로'가 직접, 위층의 VIP 룸으로 모시겠다고."


가만히 두면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벙커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다.


마에스트로는 태현을 제거하기 위해, 룰이 지배하는 가장 견고하고 치명적인 하우스의 무대 위로 그를 끌어올려야만 했다.


밑바닥을 지배한 폭동의 설계자 강태현.


그를 향한 귀족 계급의 피비린내 나는 살인 초대장이 방금 발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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