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귀족의 초대장

by 연구소장

[오전 02:00 AM. 메인 구역(Sector-1) 시민 구역 경계선]


판옵티콘의 밤은 길고 붉었다.


하층민 구역(The Pit)과 시민 구역(The City)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철조망 바리케이드 앞.


"문 열어, 이 개새끼들아!! 안 그러면 다 불태워버린다!"


수백 명의 하층민들이 횃불처럼 불붙인 쇠파이프와 뜯어낸 강철판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에 진을 친 시민 계급의 자경단원들은 사색이 된 채 고압 물대포와 테이저건을 겨누고 있었지만,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빈민들의 광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태현이 퍼뜨린 단 하나의 가짜 뉴스, '내일 아침 칩 리셋'.


그리고 그 가짜 뉴스에 신빙성을 더해준 '막대한 칩의 살포'.


이 두 가지가 결합하자, 판옵티콘의 경제 시스템은 단 반나절 만에 완벽하게 붕괴했다. 칩의 가치가 폭락(초인플레이션)하자, 하층민들은 단말기에 찍힌 쓸모없는 숫자 대신 철조망 너머 시민 구역의 '진짜 물자와 식량'을 노리고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강태현 씨."


어둠 속, 폭동의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버려진 배관 타워 위. 서유진이 마스터 패드의 홀로그램 액정을 띄운 채 태현을 불렀다.


"시민 구역의 방어선이 뚫리기 직전입니다. 사설 상점들의 80%가 이미 약탈당했고, 메인 서버의 경제 AI는 현재 하층민 구역의 물가 상승률을 계산하지 못해 시스템 락(Lock)이 걸린 상태입니다."


유진의 목소리에는 경외감마저 묻어났다.


총알 한 발 쏘지 않았다. 무장한 사병들을 쓰러뜨린 것도 아니었다. 단지 허공에 떠도는 '신용'이라는 이름의 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을 뿐인데, 수천 명을 통제하던 거대한 벙커의 룰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당연하지. 카지노가 손님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칩을 돈으로 환전해 줄 거라는 믿음'뿐이니까. 그 믿음이 깨지면 하우스는 그냥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해."


태현은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캔 커피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이대로 폭동이 시민 구역을 집어삼키게 둔다면, 결국 이사회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칩의 통제가 불가능해지면, 남은 건 무력을 통한 무자비한 학살뿐이니까요. 당장 저격수들이 배치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진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울 순 없지. 폭동은 어디까지나 딜러 새끼들을 도박판으로 끌어내기 위한 '밑밥'일 뿐이니까."


태현이 빈 캔을 아래로 휙 던져버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위층의 '진짜 귀족' 새끼들이 타는 냄새를 맡고 내려올 때가 됐는데."


태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우웅-! 덜컹!


하층민 구역과 상층부(VIP 라운지)를 잇는, 절대 열리지 않던 거대한 황금색 전용 승강기가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폭동을 일으키던 군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승강기 쪽으로 쏠렸다. 무장 사병들이 쏟아져 나와 기관총을 갈길 것이라 예상했던 하층민들은 무기를 꽉 쥐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승강기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사병들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김살 하나 없는 최고급 검은 맞춤 정장을 입은 사내 네 명.


폭동의 매연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시궁창에 어울리지 않는, 압도적으로 이질적이고 세련된 불청객들이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마에스트로 가문을 상징하는 금빛 지휘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저, 저 새끼들 뭐야?"


"귀족 놈들의 사냥개잖아!"


하층민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정장 입은 사내들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하지만 정장의 사내들은 수백 명의 폭도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장 앞장선 은발의 사내가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길을 비켜라. 우리는 이사회의 대리인이자, 위대하신 마에스트로 님의 명을 받들어 온 사자(使者)다."


사내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소음이 가득한 광장을 뚫고 나갈 만큼 기백이 넘쳤다.


그는 주머니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특수 카드를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는 폭동을 진압하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은발의 사내가 광장 위, 배관 타워에 서 있는 태현과 정확히 시선을 맞췄다.


"강태현. 그분께 정중한 초대장을 전달하러 왔을 뿐이다."


순간, 미친 듯이 끓어오르던 폭동의 현장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정적이 흘렀다.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타워 위의 태현을 향했다. 귀족의 사자? 초대장? 이 모든 폭동의 원흉이자 밑바닥의 왕이 된 남자에게 귀족이 직접 고개를 숙이고 찾아왔단 말인가.


"길을 터줘."


태현이 배관 타워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군중들 사이를 가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하층민들이, 구겨진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걷는 태현의 앞에서 홍해처럼 길을 내어주었다.


태현은 은발의 사내 앞까지 다가가 삐딱하게 섰다.


"초대장 치고는 배달부들 얼굴이 너무 험악한데. 길바닥에서 명함 돌리는 찌라시 알바라도 되나 보지?"


태현의 조롱에도 은발의 사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마에스트로 님께서 귀하의 탁월한 '시장 교란'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으셨습니다. 하층민 구역의 칩을 폭락시켜 판옵티콘 전체의 경제를 위협하시는 솜씨, 과연 튜토리얼을 깨부수고 올라온 분답더군요."


"그래서? 칭찬하려고 불렀나? 아니면 내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렸나?"


"마에스트로 님께서는 귀하와 피를 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대신,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자 하십니다."


사내가 들고 있던 푸른빛의 카드를 태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카드 표면에는 [VIP Lounge Access - High Roller]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늘 밤. 상층부 VIP 라운지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데스매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그 시궁창에서 잔챙이들의 푼돈을 뜯어내며 시장을 망치는 짓은 그만두시고, 귀하의 실력에 걸맞은 진짜 '하이롤러(High Roller)'들의 판에 앉으시지요."


사내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이면에는 뼈 있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대로 계속 하층민을 선동해 룰을 망친다면 흑기동대를 동원해 다 쓸어버릴 테니, 당장 위로 올라와 우리들의 통제 아래 있는 도박판에 앉아라.'


태현이 내민 카드를 받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하이롤러의 판이라. 판돈은 얼마나 되는데?"


"판옵티콘 메인 서버의 접근 권한, 그리고…."


은발의 사내가 태현의 뒤에 서 있는 수백 명의 하층민 군중을 힐끗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일 아침 칩 리셋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될, 저 수많은 짐승들의 '식량 배급권'입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헉, 하는 경악이 터져 나왔다.


가짜 뉴스인 줄로만 알았던 '칩 리셋'이 진짜였다. 이사회는 경제가 붕괴하자, 아예 하층민들의 칩을 0으로 만들어버리고 배급을 끊어 빈민들을 합법적으로 굶어 죽일(학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강, 강태현 씨! 가면 안 돼! 저 새끼들이 널 죽이고 우릴 다 굶겨 죽이려는 수작이야!"


어제 태현에게 칩을 받았던 최상철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맞아! 차라리 여기서 우리랑 같이 싸워! 저 문을 부수고 위로 올라가자고!"


생존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광장을 울렸다.


그들에게 태현은 이제 단순한 타짜가 아니라, 자신들을 이 지옥에서 이끌어줄 유일한 구원자이자 폭동의 지도자였다. 그가 귀족의 초대를 받아들여 위로 올라가는 순간, 그들은 방패막이 없이 학살당할 운명이었다.


은발의 사내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태현을 압박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더러운 시궁창에서 폭도들의 우두머리로 남아 흑기동대의 총알받이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위층으로 올라와 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이 되시겠습니까?"


선택의 기로.


서유진조차 마른침을 삼키며 태현의 결정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태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뒤를 돌아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 명의 군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은발의 사내와 황금색 승강기를 응시했다.


태현의 입가에,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잔혹한 포식자의 미소가 번졌다.


"너희 귀족 새끼들이 단단히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태현이 푸른빛의 VIP 카드를 두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내가 이 거지들한테 칩을 뿌린 건 정의로운 혁명 투사 놀이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냥 너희 하우스 새끼들이 제일 아끼는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해킹 프로그램'을 좀 깔아둔 것뿐이지."


은발의 사내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초대장? 좋아. 안 그래도 이 시궁창 냄새가 슬슬 질리던 참이었거든."


태현이 VIP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선언했다.


"강태현 씨!!"


"우릴 버릴 셈이야?!"


뒤에서 군중들이 배신감에 찬 절규를 쏟아냈다.


하지만 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군중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닥치고 내 말 똑바로 들어! 내가 위로 올라가서 판을 벌이는 동안, 니들은 여기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바리케이드를 찢고, 유리창을 깨부수고, 이 하층민 구역을 완벽한 무법천지로 만들어 놔!"


태현의 광기 어린 지시에 군중은 물론 은발의 사내조차 당황했다.


"내가 저 위층 귀족 새끼들의 금고를 모조리 파산시키고, 이사회의 목줄을 끊어버릴 때까지! 니들의 그 미친 분노가 내가 베팅할 가장 완벽한 '판돈'이니까!"


태현은 그것이 끝이라는 듯, 서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황금색 승강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내해라. 마에스트로 영감탱이한테, 팬티까지 다 벗어줄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전하고."


은발의 사내는 혀를 차며 길을 열었다.


태현과 유진이 황금색 승강기에 올라타자, 육중한 문이 닫히며 하층민 구역의 처절한 절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승강기가 무서운 속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판옵티콘의 최상층부, 상위 1%의 귀족들이 지배하는 하이롤러 VIP 라운지.


"괜찮겠습니까?"


승강기 안에서 유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겁니다. 마에스트로는 평범한 도박사가 아니에요. 이 벙커의 룰을 설계한 자들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태현은 창밖으로 아득히 멀어지는 하층민 구역의 불길을 내려다보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그래서 가는 거야."


태현의 두 눈이 야차처럼 번뜩였다.


"룰을 만든 새끼가 지가 만든 룰에 짓눌려 파산할 때, 표정이 어떻게 썩어들어가는지 똑똑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초고속으로 전개되는 타짜의 복수극.


판옵티콘의 심장부를 도려낼 VIP 데스매치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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