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환승 구간 / 다음 날 오전 8시 30분]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그중에서도 출근길 인파가 가장 끔찍하게 몰려드는 강남역과 신도림역, 여의도역의 아침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붐비고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낀 채 피곤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직장인들, 백팩을 멘 학생들.
누구도 자신들의 발밑에서 지옥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치이이익-!
승강장 천장과 벽면에 설치된 대형 환풍구에서, 희미한 회색빛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에어컨 냉기인 줄 알았던 그 가스가 사람들의 호흡기를 타고 폐부로 스며드는 데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콜록! 아, 갑자기 무슨 냄새가..."
"가스 샌 거 아니야? 눈 매워!"
웅성거림이 채 번지기도 전이었다.
가장 먼저 가스를 정통으로 들이마신 40대 양복 차림의 남자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저기요! 아저씨! 왜 그러세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다가가려던 찰나.
"크아아아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기괴한 각도로 허리를 꺾으며 튀어 올랐다. 그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누런 거품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손을 뻗던 여대생의 목덜미를 향해 맹수처럼 덤벼들었다.
"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지하철 승강장 타일 위로 흩뿌려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스를 마신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눈을 뒤집고 발작을 일으키더니, 옆에 서 있던 멀쩡한 사람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과거 길거리에서 소수로 배회하던 테스트 버전과는 차원이 다른, 아버지가 살포한 완성형 '샘플 Z'의 에어로졸 폭탄이었다.
"도, 도망쳐! 괴물이다!!"
"살려주세요! 으아아악!"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하철 경찰대원들이 테이저건과 삼단봉을 빼 들었지만, 고통을 상실한 감염자들에게 5만 볼트의 전류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의 방검복을 찢어발기며 무자비하게 목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무고한 시민을 향해 선뜻 실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공권력의 주저함은,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몰고 갔다.
지하철역뿐만이 아니었다. 수도권의 주요 정수장 세 곳에서도 동시에 약물이 풀리며, 아침에 수돗물을 마신 시민들이 집 안에서 괴물로 변해 가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핏물, 짐승의 괴성, 그리고 서로를 뜯어먹는 아비규환.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단 한 방에 완벽하게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천명 외상센터, 1층 응급의료센터 / 같은 시각]
응급실 스테이션 앞. 3년 차 간호사 이지은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스마트폰 뱅킹 앱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금: 100,000,000원 /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 특별 생명수당]
어젯밤 자정, 통장에 꽂힌 비현실적인 숫자.
어머니의 백혈병 치료비로 사채까지 끌어다 썼던 그녀에게, 이 1억 원은 벼랑 끝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어젯밤 회장의 지시로 어머니마저 재단 VIP 병실로 무상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동료 간호사들도, 청소를 하던 여사님도 모두 통장에 찍힌 1억 원을 확인하고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상태였다.
"지은 쌤. 이거 꿈 아니죠? 진짜 회장님이 우리한테 1억씩 쏜 거 맞죠...?"
후배 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꿈 아니야. 나 오늘 아침에 빚 다 갚았어. 이 병원은, 아니 회장님은 진짜..."
이지은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던 찰나였다.
우우웅- 웅- 웅-!
응급실을 넘어, 병원 전체를 찢을 듯한 거대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코드 레드! 코드 레드! 서울 전역에 원인 불명의 대규모 생화학 테러 발생! 전 직원 전시 방역 체제로 전환! 즉시 응급실 출입구 봉쇄하고 레벨 D 방호복 착용하라!]
병원 스피커에서 보안이사 백강우의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응급실 벽면에 걸린 대형 TV에서 정규 방송이 끊기고 긴급 재난 속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타는 서울 도심,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뜯어먹는 짐승 같은 폭도들의 모습.
"저, 저게 뭐야...!"
"서울이... 완전히 생지옥이 됐어!"
응급실 스태프들은 사색이 되어 TV 화면을 경악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들은 뼛속 깊이 깨달았다. 천이환 회장이 어젯밤 3,500명 전 직원에게 무려 3,500억 원의 현금을 살포한 이유를.
그것은 단순한 성과급이 아니라, 오늘 아침 열리게 될 이 '지옥'에서 절대 도망치지 말고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는 냉혹하고도 완벽한 '생명 수당 선지급'이었다는 것을. 만약 어젯밤 1억 원이 꽂히지 않았다면, 직원들의 절반은 저 뉴스를 보자마자 패닉에 빠져 병원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덜컥.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고, 칠흑 같은 무광 블랙 전술복 재킷 위에 새하얀 의사 가운을 걸쳐 입은 천이환이 1기생 기동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표정에는 당황이나 공포 따위는 1그램도 없었다. 오직 수술을 앞둔 집도의의 서늘한 냉혹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다들 얼어붙어서 뭐 합니까. 방호복 입고 전투 준비 안 해?!"
나의 차가운 일갈에, 이지은과 의료진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통장에 1억씩 꽂아줬으면 밥값들을 해야지. 밖에서 물린 교상 환자들 쏟아져 들어올 겁니다. 격리 병동 동선 비우고, 들어오는 족족 도현이가 만든 초기 억제제 투여할 준비해. 한 명이라도 내부 감염자 나오면 해당 구역 책임자들 연봉에서 다 깔 줄 아십시오."
살벌한 협박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기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국가가 무너지고 밖은 지옥이 되었지만, 이 거대한 요새 안에서 자신들을 지휘하는 '포식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압도적인 자본으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준 이 군주를 위해, 직원들은 눈빛을 번뜩이며 레벨 D 방호복을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 제1 방어선 / 오전 9시 15분]
"살, 살려주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병원 외곽에 쳐진 3미터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바리케이드 앞.
피투성이가 된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과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 등 수백 명의 생존자들이 굳게 닫힌 방탄 철문을 두드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 왕복 8차선 강남대로 저편에서는 시뻘건 눈을 한 수천 명의 감염자 떼가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경찰이 쳐놓은 1차 저지선은 이미 뚫린 지 오래였고, 버려진 경찰차들은 불타고 있었다. 생존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거대한 십자가 불빛이 빛나고 있는 이 천명 요새뿐이었다.
"아아악!! 저기, 저기 온다!!"
감염자 무리가 100미터 앞까지 다가오자, 생존자들은 절망하며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끼기기기긱-!!
바리케이드 중앙의 육중한 방탄 철문이 굉음을 내며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어...?"
열린 철문 사이로 쏟아져 나온 것은 눈부신 서치라이트 불빛과, 어젯밤 내가 수천억의 예산을 들여 싹 다 교체해 준 미군 특수부대 티어 1(Tier 1) 전술 장비로 무장한 100명의 기동대원들이었다. 그들의 한 손에는 성인 남성 키만 한 특수 방패가, 다른 한 손에는 고압축 마취총과 티타늄 스턴건이 들려 있었다.
"생존자들! 전원 중앙 통로로 뛰어 들어와!! 빨리!!"
선두에 선 백강우가 헬멧의 확성기를 통해 사자후를 토해냈다.
"여, 열렸다! 뛰어!!"
생존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열린 철문 사이로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기하고 있던 방호복 차림의 2선 의료진들이 재빨리 그들을 부축하여 멸균 텐트가 쳐진 오염 통제 구역(Decontamination zone)으로 끌어당겼다.
"전방 50미터! 감염자 무리 도달합니다!"
박철민이 방패를 앞으로 꽉 쥐며 외쳤다. 수천 명의 감염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열린 철문을 향해 미친 듯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질량과 광기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1조, 2조! 방어 진형 구축! 방패 결속!"
백강우의 명령에 100명의 기동대가 3열 횡대로 늘어서며 방패를 맞물렸다. 고대 로마 군단의 테스투도(Testudo, 귀갑 대형)를 연상케 하는 완벽한 강철의 벽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방패 진형의 정중앙.
좌우로 갈라진 대원들 사이로, 전술복 위에 하얀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내가 걸어 나왔다.
내 얼굴에는 공포 따위는 없었다. 오직 수술실을 지배하는 오만한 집도의의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수진아. 저기 달려오는 짐승 새끼들, 바이탈이 너무 높은데."
나는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10미터 앞까지 밀어닥친 감염자 떼를 바라보며 무전기로 턱짓을 했다.
"다 재워버려. 내 앞마당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나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백강우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원, 1제사 발사!!"
푸쉬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100발의 특수 마취 다트가 허공을 갈랐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감염자들의 허벅지와 어깨에 다트가 정확히 꽂혔다. 일반 마취제가 아니라, 천명 재단 지하 연구실에서 코끼리 10마리를 눕힐 용량으로 조합해 낸 초고농도 신경 차단제였다.
"크아악...!"
"크르륵...!"
총알을 맞아도 멈추지 않던 괴물들이, 다트가 꽂히고 단 3초 만에 다리가 풀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고 고꾸라졌다.
수천 명의 무리 중 선두 100명이 갑자기 쓰러지자, 뒤따라오던 감염자들이 쓰러진 육체에 걸려 넘어지며 거대한 연쇄 충돌이 일어났다. 우당탕탕 엎어지며 도로 위는 순식간에 괴물들의 생지옥이 되었다.
"2열 교대! 2제사 발사!"
푸쉬이익-!
다시 한번 100발의 다트가 쏟아졌고, 일어서려던 감염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이것이 압도적인 자본과 의료 인프라의 위력이었다.
국가의 경찰은 실탄 사용을 주저하다 진형이 무너졌지만, 우리는 30조 원의 예산으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초고가 마취제와 완벽한 전술 장비로 살생 없이 괴물들을 '강제 수면'에 빠뜨리고 있었다. 돈으로 떡칠한 완벽한 억제력.
하지만, 감염자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후미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무리가 쓰러진 동족들을 짓밟고 넘어와 마침내 기동대의 방패 벽에 격돌했다.
쾅!! 콰아아앙!!
"크윽! 밀리지 마!! 버텨!!"
백강우와 대원들이 방패를 어깨로 밀며 악을 썼다. 감염자들이 방패 위로 기어오르려 발악했고, 몇몇은 방패 틈새로 손을 뻗어 대원들의 방호복을 쥐어뜯으려 했다.
"전열 유지해! 스턴건 준비!"
파지직! 파직!!
방패 너머로 뻗어 나온 수만 볼트의 특수 스턴건이 감염자들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전신이 마비된 괴물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처절한 전선의 한가운데 서서, 쓰러지는 감염자들의 상태를 매의 눈으로 스캔했다.
[시스템: 약점 포착 발동]
시야가 변하며 놈들의 근육과 신경 구조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아버지가 약을 참 독하게도 타셨네."
대부분의 감염자들은 마취제로 제압되었지만, 무리 속에는 일반인보다 체구가 1.5배는 크고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놈들이 섞여 있었다. 송도의 공장에서 보았던 '프로토타입'의 마이너 카피 버전들. 저놈들은 마취제가 듣기까지 시간이 배로 걸렸다.
그때, 방진의 우측 끝에서 거대한 덩치의 감염자 한 놈이 방패를 들고 있던 1기생 대원을 집어 던져버리고 방어선 안으로 난입했다.
"뚫렸다! 우측 보강해!!"
박철민이 소리쳤지만, 난입한 거구의 감염자는 자신을 조준하는 총구들을 무시하고,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목표로 전력 질주해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내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회장님!!"
감염자의 거대한 주먹이 내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로 쇄도했다.
'나노 머신이 없어도... 내 손끝의 감각은 지옥에서 완성됐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상체를 가볍게 숙여 놈의 주먹을 흘려보냄과 동시에, 가운 안주머니에서 어제 한수진 수술이사에게 하사했던 것과 동일한 '티타늄 합금 메스' 두 자루를 전광석화처럼 뽑아 들었다.
스릉-!
최고급 항공기 소재의 블레이드가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나는 놈의 품으로 파고들며, 양손의 메스를 놈의 양쪽 오금(무릎 뒤)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어 내렸다.
서걱-! 서걱-!
"크으으억!!"
아킬레스건과 슬발줄이 완벽하게 끊어져 나간 거구의 괴물은, 단발마의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그 거대한 몸뚱이를 앞으로 처박으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대로 놈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메스의 손잡이 끝으로 놈의 경추(목뼈) 1번과 2번 사이의 급소를 정확하고 강력하게 내리찍었다.
빠각-!
물리적인 중추신경 차단.
거구의 감염자는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그 자리에서 거대한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휴우."
나는 메스에 묻은 피를 허공에 가볍게 털어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나의 압도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제압을 본 기동대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 100미터 이내 제압 완료!! 잔여 감염자들 기세 꺾여서 흩어집니다!!"
백강우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도로 위에는 수백 명의 괴물들이 마치 시체밭처럼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막대한 자본과 전술이 융합된 완벽한 1차 방어전이었다.
"좋아."
나는 피가 튄 안경을 벗어 가운 자락으로 닦으며 지시했다.
"수면 상태인 놈들, 전부 케이블 타이로 사지 포박해서 우리 병원 지하 주차장에 몰아넣어. 저놈들 핏속에 도현이가 백신을 만들 '샘플 Z'의 항체 데이터가 가득 들어있으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수거한다."
"알겠습니다!! 1조, 2조 포획 작전 개시!"
나는 열린 방탄 철문 너머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서울 도심을 바라보았다.
경찰도, 군대도 손을 놓아버린 무정부 상태의 지옥.
하지만 이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이라는 거대한 성채만은, 수천 명의 괴물 앞에서도 생채기 하나 없이 굳건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이 연 지옥문, 내가 닫아줄 테니까."
나는 메스를 다시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 잔챙이들 피 다 뽑아서 백신 만들고 나면, 그다음 수술대는 당신 뇌하수체가 될 테니까요."
진정한 메디컬 아포칼립스.
그 지독한 폭풍의 눈 한가운데서, 방주(方舟)의 지배자가 서늘한 반격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제3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