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두두두두-!
거대한 로터(Rotor)가 일으키는 돌풍에 천명원의 잔디가 눕다 못해 뿌리까지 뽑힐 지경이었다. 새빨간 도장에 선명하게 박힌 흰색 십자가, 그리고 그 아래 금색으로 휘갈겨 쓴 글씨.
[CHUNMYUNG MEDICAL CENTER (천명 의료재단)]
이탈리아 아구스타웨스트랜드 사의 AW-139. 최대 속도 306km/h, 항속 거리 1,061km. 기존의 국산 닥터 헬기보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비싼 놈.
"미쳤어... 진짜 샀어..." 정혁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외상 외과 의사에게 저 헬기는 람보르기니보다 섹시한 존재니까.
헬기 두 대가 굉음을 멈추고 엔진을 끄자, 조종석 문이 열렸다. 파일럿 복장을 한 사내 둘이 내려 내 앞으로 달려왔다. 군인 출신 특유의 각 잡힌 걸음걸이.
그들은 내 앞에 서더니, 거수경례 대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천상의 날개를 이끌 제2교구 소속 집사, 최무진입니다!" "부조종사, 평신도 박동수입니다!"
...역시 평범한 파일럿은 아니었군.
"일어나." 내가 손을 까딱하자 그들이 벌떡 일어났다.
"경력은?" "공군 15비행단 블랙이글스 출신입니다! 제대 후 성자님을 모시기 위해 민항기 스카우트도 거절하고 입교했습니다!"
블랙이글스라니. 대한민국 최고의 에이스 아닌가. 나는 김 장로를 쳐다봤다. 이놈의 교단은 도대체 사회 각계각층에 얼마나 많은 신도를 심어놓은 거야?
"좋아. 실력은 믿겠는데, 하나만 명심해." 나는 파일럿 최 집사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는 곡예비행 하러 가는 거 아니다. 환자 싣고 날아야 해. 기체가 조금이라도 흔들려서 환자 혈관 터지면, 네 신앙심도 같이 터질 줄 알아."
"명심하겠습니다! 에이스 침대보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나는 정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타."
"네? 지금요? 어디 가는데요?" "시운전해봐야지. 장비 체크도 하고. 의료 키트 다 채워져 있는지 확인해."
정혁과 이지영, 박미선이 쭈뼛거리며 헬기에 올랐다. 내부는 웬만한 엠뷸런스보다 넓었다. 이동형 인공호흡기, 제세동기, 썩션기... 모든 것이 새 제품 비닐도 뜯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었다.
"와..." 박미선 수간호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전 병원 헬기는 좁아서 CPR 하려면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는데, 여긴 춤을 춰도 되겠는데요?"
그때, 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골든아워'를 사수하라] - 첫 번째 항공 이송 미션을 완수하십시오. - 보상: 명성치 대폭 상승, 병원 등급 상승(F -> E)
타이밍 좋고. 나는 파일럿 헤드셋을 착용하며 김 장로에게 무전기를 던졌다.
"장로. 상황실 연결해." "상황실이라 하시면..." "우리 교단 정보국 말이야. 경기 소방본부 무전, 도청할 수 있지?"
김 장로가 난처한 듯 웃었다. "도청이라뇨, 성자님. 당치 않습니다. 다만... 소방 상황실에 근무하는 저희 '형제님'들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하여튼 말은 잘해요. "연결해. 지금부터 경기 남부 전역의 사고 상황, 실시간으로 브리핑 받는다."
치직- 치지직- 헤드셋 너머로 다급한 무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경기 119 종합상황실. 현재 위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기흥 IC 인근. 4중 추돌 사고 발생.] [승용차 1대 전복. 운전자 끼임 사고(In-car). 의식 혼미. 출혈 심함. 구조대 출동 바람.]
정혁의 눈빛이 변했다. 의사의 눈이었다. "기흥 IC면 여기서 5분 거리입니다."
"들었지, 최 집사?" 내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시동 걸어."
"성자님, 하지만 아직 운항 허가랑 항공청 승인이..." 최 집사가 절차를 이야기하려 했다.
"야." 나는 헬기 문을 닫으며 짧게 말했다. "내가 곧 허가고 승인이야. 벌금 나오면 내가 내. 날아!"
"아멘!" 최 집사가 스위치를 올렸다. 두두두두두-! 거대한 로터가 다시 회전하며 굉음을 토해냈다. 몸이 붕 뜨는 부유감. 창밖으로 천명원의 화려한 정원이 장난감처럼 작아졌다.
[경부고속도로, 기흥 IC 인근]
아수라장이었다. 찌그러진 승용차 한 대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뒤집혀 있었고, 그 뒤로 트럭과 승합차가 엉켜 있었다. 도로 바닥에는 유리 파편과 오일, 그리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
"구급차 아직 안 왔어?!" 현장에 먼저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유압 절단기로 차 문을 뜯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차가 너무 막혀서 진입이 안 된답니다! 10분은 더 걸린대요!" "10분? 환자 지금 맥박이 안 잡히는데 10분이면 시체 치우러 오는 거야!"
구조대장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운전석에 끼인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복부 팽만. 내부 출혈이 의심되는 상황. 지금 당장 수액을 꽂고 지혈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고속도로 위를 덮쳤다. 강력한 하강풍(Downwash)에 소방대원들이 모자를 눌러썼다.
"뭐, 뭐야? 닥터 헬기? 요청한 적 없는데?"
새빨간 헬기가 사고 현장 바로 옆, 비좁은 갓길 상공에 정지 비행(Hovering)을 시도했다. 전깃줄과 가로등이 즐비한 위험한 공간. 하지만 파일럿의 솜씨는 기가 막혔다.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헬기가 도로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두 명과 간호사 한 명이 장비를 들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있었다.
"비키세요! 의사입니다!" 정혁이 익숙하게 소방대원들을 제치고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당신들 어디서 왔어? 한국대야? 성빈센트야?" 구조대장이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답했다. "천명."
"천명? 그런 병원도 있나?"
"있어요. 방금 생겼거든요." 나는 환자의 상태를 스캔했다.
[환자 상태: 비장 파열 및 대퇴부 골절. 과다 출혈 쇼크 진행 중.] [골든아워: 15분 남음.]
"정 선생, 라인 잡아. 18게이지로 양팔에. 수액 풀 드롭(Full drop). 박 선생님, 지혈대 주세요." 내 지시는 간결했다. 정혁과 박미선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환자 꺼내야 합니다! 다리가 끼어서..." 소방대원이 소리쳤다.
"저희가 뺍니다. 최 집사!" 내가 헬기 쪽을 향해 손짓하자, 파일럿 최 집사가 웬 거대한 가방을 들고 뛰어왔다. 그가 가방을 열자 번쩍이는 최신형 전동 유압 장비가 나왔다. 소방서에서 쓰는 것보다 2배는 비싸고 가벼운 모델이었다.
"어... 그거 우리 거보다 좋은 건데..." 소방대원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우지끈-! 콰직! 최 집사가 괴력을 발휘해 찌그러진 차 문을 종잇장처럼 뜯어냈다. 역시, 특수부대 출신은 다르다.
"환자 확보! 이송합니다!" 정혁이 환자를 들것에 실었다.
"이봐요! 이송 지휘는 우리가..." 구조대장이 절차를 따지려 했지만, 나는 이미 헬기에 오르고 있었다.
"환자 살리고 싶으면 나중에 따지십쇼. 서류는 팩스로 보내드릴 테니까."
쾅. 문이 닫히고, 헬기가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도착에서 이송까지 걸린 시간, 단 4분. 대한민국 응급 의료 역사상 가장 무모하고 빠른 출동이었다.
[헬기 내부]
"BP(혈압) 80에 50! 떨어집니다!" 이지영이 모니터를 보며 외쳤다.
"복강 내 출혈이야. 병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 연다." 나는 무전기를 들었다.
"김 장로. 들리나?" [예, 성자님! 멋지게 날아오르시는 모습, 감동적입니다!]
"감동은 됐고, 지금 당장 수술실 세팅해. 마취과 스탠바이. 혈액은행에 있는 O형 혈액 전부 수술방으로 올려."
[혈액은행... 말씀이십니까?] 김 장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그게... 아직 혈액 공급 계약을 못 맺어서... 피가 없는데요.]
"뭐?" 정혁이 기겁하며 나를 쳐다봤다. "피가 없다고요? 외상 센터에 피가 없으면 수술을 어떻게 합니까!"
아, 젠장. 장비만 샀지 피를 안 사왔구나. 가장 기본적인 걸 놓쳤다. 환자는 지금 피가 말라가고 있는데.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인간 혈액은행'들이 있으니까.
"김 장로. 방송 켜." [네?] "천명원 전체 방송 켜라고! 지금 당장!"
잠시 후, 헬기 스피커를 통해 내 목소리가 천명원 전역에 울려 퍼졌다.
"아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자 천이환입니다."
나는 헬기 창밖으로 보이는 수만 명의 신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장 거룩하고, 가장 뻔뻔한 목소리로.
"지금 마귀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는 어린 양을 구출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살리기엔 '성스러운 피'가 부족합니다."
나는 정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혁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미친놈'이라는 표정으로.
"지금 즉시 중앙 광장으로 집합하십시오. O형 혈액형을 가진 형제자매님들. 여러분의 피가 기적을 만듭니다. 헌혈차... 아니, 헌혈 침대로 달려오십시오!"
"성자님께서 피를 원하신다!" "내 피를 가져가소서!"
하늘에서 내려다본 천명원은 장관이었다. 흰 옷을 입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마치 백혈구가 상처 부위로 달려들 듯 중앙 광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보이지, 정 선생?" 나는 낄낄거리며 정혁의 어깨를 쳤다.
"대한민국에서 피 수급 제일 빠른 병원이 어디라고?"
정혁은 질린다는 듯, 하지만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명... 외상센터요."
"빙고."
헬기가 천명원 옥상 헬리패드를 향해 하강했다. 그곳엔 이미 팔을 걷어붙인 수백 명의 '살아있는 수혈팩'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