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태양의 여운인지, 아니면 성벽 아래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들이 뿜어내는 피의 안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齊)나라의 변방, 비현(丕縣)의 성벽 위에서 강무(姜武)는 낡은 죽간을 펼쳐 들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옷자락은 귀족의 것이라기엔 남루했고, 평민의 것이라기엔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는 붓끝에 침을 묻히며 중얼거렸다.
"병사 삼천 중 부상자가 육백, 가용 인원 이천사백. 식량은 보름치, 화살은 인당 열 개 꼴인가. 이 성의 잔존 가치는…… 똥값이군."
그의 눈은 전장의 참혹함을 담고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읽을 수 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장부(帳簿)였고, 인간은 그 위를 오가는 숫자에 불과했다. 죽어 나가는 병사들은 '손실(Loss)'이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비용(Cost)'이었다.
강무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연(燕)나라의 깃발이 검은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로 보아 사흘, 아니 이틀이면 이 낡은 성문은 뚫릴 것이다. 보통의 책사라면 결사항전을 외치거나 야반도주를 택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강무는 죽간의 여백에 새로운 계산식을 적어 넣고 있었다.
승산(勝算)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패배가 확정된 싸움이라도, 그 패배를 비싸게 팔아넘길 수는 있다.
그때였다. 성벽의 그늘진 구석, 병장기 창고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 한 마리가 쌀자루를 갉아먹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척, 더 정확히는 도둑의 숨소리였다.
"거기, 쌀자루를 쥐고 있는 자. 무게가 제법 나가 보이는데."
강무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어둠 속에서 화들짝 놀란 그림자가 비틀거렸다. 남루한 군복을 걸친 사내, 관구(管狗)였다. 그는 비현의 하급 보급병이었다. 품에는 군량미가 담긴 전대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관구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 나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노모가 굶어 죽어가고 있어서, 딱 한 줌만, 정말 딱 한 줌만……."
관구의 이마가 돌바닥에 짓이겨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전시(戰時)에 군량을 훔친 죄는 즉결 처형감이었다. 관구는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을 직감하며 오줌을 지렸다.
하지만 강무는 그를 베는 대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 관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공포에 질린, 그러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강무는 그 눈에서 기묘한 가능성을 보았다.
"이봐, 관구. 자네는 멍청하군."
"예?"
"고작 쌀 한 줌을 훔치려고 목숨을 걸다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잖아. 내게 걸린 이상 자네의 목숨값은 이미 지불된 셈인데, 얻은 것이 고작 쌀 한 줌이라면 너무 큰 손해 아닌가?"
관구는 멍한 표정으로 강무를 올려다보았다. 강무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훔칠 거면 더 크게 훔쳐야지. 나라를 훔치거나, 적의 마음을 훔치거나. 자네, 눈치가 빠르고 발소리를 죽이는 재주가 있더군. 창고지기들이 순찰을 도는 시간의 틈새를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어."
강무는 관구의 품에 있는 쌀 전대를 툭 쳤다.
"이 쌀은 가져가라. 노모에게 먹이든, 팔아서 술을 사 먹든 상관없다. 대신, 내 일을 하나 도와야겠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똥물이라도 마시라면 마시겠습니다!"
"똥물을 마셔서 어디에 쓰겠나. 자네는 오늘 밤, 연나라 군영으로 가야 한다."
관구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저, 적진으로 말입니까? 가서 무엇을…… 첩자 노릇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글도 모르고 무예도 모릅니다요!"
"아니, 자네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가서 훔쳐 와라."
"무엇을 말입니까? 적장의 목이라도……."
"아니. 적의 '불안'을 훔쳐 오면 된다. 그리고 자네가 훔친 쌀보다 더 달콤한 미끼를 그들에게 던져주고 와야지."
강무는 품에서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 하나를 꺼내 관구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서 잡혀라. 그리고 살려달라고 빌면서 이 서신을 바쳐. 자네가 비현의 성주 위무기 장군의 숨겨둔 심복이며, 이 성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라."
"그, 그러면 저를 죽이지 않겠습니까?"
"죽이지 않는다. 인간은 눈앞의 작은 이득보다, 놓쳐버릴지 모르는 큰 손해에 더 민감한 법이거든. 자네라는 쥐새끼 한 마리를 죽여서 얻는 쾌감보다, 자네를 통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때의 손실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그게 놈들의 대장, 악의(樂毅)가 가진 약점이지."
강무는 알고 있었다. 명장이라 불리는 자들일수록 '완벽한 승리'에 집착한다는 것을. 그 집착은 때로 판단력을 흐리는 가장 큰 독이 된다. 강무는 그 독을 관구라는 살아있는 그릇에 담아 보내려는 것이었다.
관구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강무는 다시 성루로 향했다. 그곳에는 비현의 성주, 위무기가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위무기. 대대로 제나라의 무인 가문 출신인 그는 우직하고 충직했으나, 융통성이라곤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위인이었다. 그는 강무를 보자마자 달려와 소매를 붙잡았다.
"선생!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요? 연나라 놈들이 공성퇴를 준비하고 있소. 내일 아침이면 성문이 부서질 거요. 지원군은 오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소이다.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위무기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강무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난간에 기대섰다.
"장군. 제가 보기에 이 성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뭐, 뭐라? 그게 책사로서 할 소리요! 우리는 아직 칼을 쥐고 있고,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소!"
"숫자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군의 사상률, 식량 잔존량, 그리고 적과의 전력 차이. 이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볼 때, 우리가 승리할 확률은 일 할(10%)도 되지 않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도박입니다."
위무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항복이라도 하자는 거요? 내 목을 베어 저 오랑캐들에게 바치란 말이오?"
"아뇨. 누가 항복을 공짜로 합니까? 장사를 해야죠."
"장사?"
"이 성을 내주는 대가로, 더 큰 것을 얻어내야 합니다. 장군, 혹시 '계륵(鷄肋)'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닭의 갈비뼈? 먹기엔 살이 없고, 버리기엔 아까운 것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연나라에게 이 비현성은 계륵입니다. 함락시키자니 아군 피해가 클 것 같고, 그냥 지나치자니 배후가 찜찜하죠. 우리는 바로 그 딜레마를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이 성을 '비싸게' 사도록 만들어야죠."
위무기는 강무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명예와 충성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그에게, 전쟁을 거래로 치환하는 강무의 화법은 모욕에 가까웠다.
그때, 장막 뒤에서 은은한 향기와 함께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선생의 말씀은, 적에게 두려움을 팔아 시간을 사시겠다는 뜻이군요."
목소리는 옥쟁반에 구슬이 구르듯 청아했으나, 그 속에 담긴 심지는 쇠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향희(香姬)였다. 그녀는 멸망한 소국(小國)의 왕녀였으나, 지금은 강무의 보호를 받는 볼모이자 식객이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전장의 먼지와 피비린내조차 그녀의 고고한 자태를 더럽히지 못했다. 그러나 강무가 그녀를 주목하는 이유는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무가 계산하지 못하는 유일한 '변수'였기 때문이다.
향희는 찻잔을 들어 위무기에게 권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연나라 장수 악의는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는 승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성품이지요. 강무 선생께서는 아까 보낸 병사를 통해 악의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셨겠지요? 비현성에 우리가 모르는 엄청난 함정이나, 혹은 대군이 매복해 있는 것처럼요."
위무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무를 쳐다보았다. 강무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귀가 밝으시군요. 맞습니다. 저는 악의에게 '이 성을 공격했을 때 잃을 것이 얻을 것보다 훨씬 크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사람은 이득을 볼 때의 기쁨보다, 손해를 볼 때의 고통을 두 배 더 크게 느끼는 법이니까요."
강무는 찻잔을 들어 입에 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 인간의 이 본능적 공포야말로 가장 훌륭한 병법이었다.
"하지만 선생."
향희가 강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강무의 속내를 꿰뚫는 듯했다.
"거짓은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악의가 바보가 아닌 이상, 척후를 보내 확인하려 들 텐데요. 그때는 어찌하실 겁니까? 거짓이 탄로 나는 순간, 그들의 분노는 배가 되어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줄 무대 장치를요."
강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벽 아래 어둠을 가리켰다.
"관구가 제대로 역할을 해준다면, 내일 아침 연나라 군대는 진격을 멈출 겁니다. 그리고 협상을 제안해오겠지요. 그때가 바로 우리가 '물건'을 내놓을 때입니다."
"물건이라니?"
위무기가 묻자, 강무는 주머니에서 주사위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장군의 목숨, 그리고 이 성의 백성들. 이것들을 패키지로 묶어 연나라에 넘길 겁니다. 단, 아주 명예롭고 비싼 값에 말이죠."
"이, 이놈이! 감히 나를 팔아넘기려 해?"
위무기가 격분하여 칼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향희가 부드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장군, 끝까지 들어보시지요. 선생은 우리를 노예로 팔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무는 향희에게 짧은 눈짓을 보내며 감사를 표했다. 이 여자는 때로 자신보다 더 자신의 의도를 잘 파악하곤 했다.
"장군. 연나라가 원하는 것은 '제나라의 땅'이지, '제나라와의 원한'이 아닙니다. 만약 장군께서 성을 비워주고 병력을 온전히 보전하여 후퇴해준다면, 연나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성을 얻어서 좋고,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여 훗날을 도모할 수 있어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윈-윈(Win-Win), 아니 양득(兩得)이지요."
"퇴각이라니! 그것은 비겁한 도망이다! 내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
"죽어서 조상님을 뵙는 것보다, 살아서 후일 이 땅을 되찾아 바치는 것이 더 큰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적의 주력군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발을 묶어두는 '전략적 기동'을 하는 것입니다."
강무의 현란한 말솜씨에 위무기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강무는 '프레이밍(Framing)'의 기술을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틀에 넣어 보여주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도망'이라는 프레임을 '전략적 후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때, 성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연나라 진영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전령의 다급한 외침에 위무기와 향희의 시선이 동시에 강무에게 꽂혔다. 강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보십시오. 미끼를 물었군요."
강무는 성루의 난간을 잡고 멀리 어둠 속에 일렁이는 횃불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만 대군이 뿜어내는 살기가 피부를 찔러왔다. 그러나 강무에게 그 살기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주무를 수 있는 거대한 시장(Market)의 에너지였다.
그는 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자, 이제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나의 혀끝에서 몇천 명의 목숨값이 결정될 것이다.
"향희 낭자, 거문고를 준비해주십시오. 내일 아침, 우리는 가장 우아한 연주와 함께 이 성을 떠날 것입니다. 적들이 우리의 뒷모습을 보며 감히 쫓아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향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 속에 언뜻 슬픔과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무가 말하는 '우아한 연주'가 피비린내 나는 기만의 서곡임을. 하지만 그녀 역시 이 난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 기만에 동참해야만 했다.
강무는 죽간을 덮었다. [비현성 매각 계획: 성공 확률 6할. 예상 수익: 아군 생존율 8할, 적군 군량 소모 3할 증가, 그리고…… 나의 명성 상승.]
밤바람이 더욱 차가워졌다. 난세의 밤은 길었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칼을 갈았고, 누군가는 장부를 정리했다. 강무, 이 기묘한 사내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관구는 연나라 진영의 한가운데,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천하의 명장이라 불리는 악의가 서 있었다. 악의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네놈이 비현성의 비밀 통로를 안다고 했느냐?"
악의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관구는 강무가 시킨 대로, 최대한 비굴하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장군님! 제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성 뒤편 우물로 연결된 개구멍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위무기 장군이 성 곳곳에 기름을 뿌려두었습니다. 만약 성이 뚫리면 불을 질러 장군님의 군대와 함께 자폭하겠다고 했습니다요! 그, 그 미친 짓을 막으려면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관구의 말에 악의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폭.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행동이지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으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만약 비현성을 얻더라도 불타버린 폐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아군의 피해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악의의 머릿속 저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무가 심어놓은 '손실의 공포'가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