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공포는 가장 비싼 화폐다

by 연구소장

새벽안개가 비현성의 낡은 성벽을 감싸 안았다. 동이 터오고 있었지만, 연나라 군영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십만 대군이 내뿜는 숨소리가 대지를 짓누르는 가운데, 중군 막사 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연나라의 상장군 악의는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명장인 그에게, 비현성과 같은 작은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어젯밤 잡혀 온 쥐새끼 같은 첩자, 관구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곳곳에 기름을 뿌려두었습니다! 성문이 부서지는 순간, 불을 질러 장군님의 군대와 함께 자폭하겠다고 했습니다!"


악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이것이 허세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일반적인 장수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악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승리할 때 입는 아주 작은 피해조차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에게 전쟁은 단순한 살육이 아니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남기는 정교한 수식이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현성을 얻는다 해도 남는 것은 불타버린 잿더미와 아군 정예병들의 무의미한 희생뿐이다. 그것은 장부상 '적자'였다.


"장군, 날이 밝았습니다. 공격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악의는 대답 대신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비현성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순간, 악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루 위에서 한 여인이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선율은 전장의 살기와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평온하고 유려했다.


"저, 저것이 무슨 짓입니까? 공성계(空城計)입니까?"


부관이 당황하여 물었다. 악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함정일까? 아니면 포기인가?


사람은 알 수 없는 모호함 앞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 강무는 바로 그 '불확실성'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악의는 본능적으로 말 고삐를 꽉 쥐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이 찝찝한 기분, 그것은 바로 '손실 회피(Loss Aversion)' 본능이 보내는 경고 신호였다. 내가 가진 병력(자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성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훨씬 강렬했다.


"전군, 대기하라."


악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


"위험합니다, 장군! 저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느냐. 그리고…… 저 기묘한 거문고 소리가 나를 부르는구나."


악의는 호위병 수십 기만을 대동한 채, 천천히 열린 성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의 전술이 교차하고 있었지만,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생각이 멈췄다.


성 안은 깨끗했다.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의 아수라장도,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비장함도 없었다. 텅 빈 거리에는 빗자루질한 자국이 선명했고,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은 문을 닫았지만 정갈했다.


그리고 그 거리의 끝, 관아의 마당에 한 사내가 낡은 평상에 앉아 붓을 놀리고 있었다.


강무였다.


그의 옆에는 성루에서 내려온 향희가 다소곳이 앉아 차를 우리고 있었다. 수만 대군의 총사령관이 들어왔는데도, 강무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이 오실 줄 알고 찻물을 데워두었습니다."


강무가 덤덤하게 말했다. 악의는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갑옷에서 찰그랑거리는 소리가 마당의 정적을 깼다.


"네놈이 이 성의 주인인가? 위무기는 어디 가고, 서생 하나가 나를 맞는 것이냐."


"위 장군께서는 지금 짐을 싸고 계십니다. 저는 그저 이 성의 폐업 정리를 맡은 청산인(淸算人), 강무라고 합니다."


"폐업 정리?"


"예. 장사가 안 되어 가게를 접는 중이지요. 보시다시피 물건들은 다 치웠고, 이제 건물만 넘겨드리면 됩니다."


강무는 붓을 내려놓고 악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적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동산 매물을 보러 온 고객을 대하는 듯했다. 악의는 기가 찼다. 칼이 목 밑까지 들어온 상황에서도 이토록 태연할 수 있다니.


"내 첩자가 말하기를, 성에 불을 지르겠다고 했다더구나. 헌데 지금 보니 불씨 하나 보이지 않는군. 나를 능멸한 죄,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악의가 칼자루에 손을 올리자, 호위병들이 일제히 창을 겨눴다. 살기가 마당을 덮쳤다. 하지만 향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악의에게 내밀었다.


"장군, 차가 식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목이 타실 텐데, 드시고 말씀하시지요."


향희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상황을 장악하는 분위기에서 나왔다. 악의는 잠시 멈칫하다가, 찻잔을 받아들었다.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듯 단숨에 들이켰다.


"호오, 차 맛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제나라 황실에서 즐기던 '설화차'입니다. 이제 이 성이 불타면 다시는 맛보지 못할 귀한 차이지요."


향희의 말에 악의의 미간이 다시 꿈틀했다. 강무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장군, 불을 지르는 것은 하책(下策)입니다. 제가 장군이라면, 굳이 다 타버린 잿더미를 얻고자 병사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내게 항복하겠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거래?"


"이 성을 온전한 상태로 장군께 넘겨드리겠습니다. 성벽 돌 하나, 기와 한 장 건드리지 않고 깨끗하게 말입니다. 대신, 저희가 나가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강무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군량미 삼천 석. 저희가 떠나는 길에 필요한 노잣돈으로 주십시오."


악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미친 놈이로구나. 내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너희를 몰살시키고 성을 차지할 수 있는데, 내가 왜 식량까지 주어가며 너희를 보내줘야 하지?"


"그것이 장군께 더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강무는 펼쳐 두었던 죽간을 악의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복잡한 숫자와 계산식들이 적혀 있었다.


"보십시오. 장군께서 공성전을 시작하면, 아군의 저항으로 최소 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성을 함락시킨다 해도, 저희가 지를 불길 때문에 성내의 모든 물자는 소실될 것이고, 성벽을 보수하는 데만 두 달이 걸립니다. 그동안 장군의 본대는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겠지요."


강무는 붓끝으로 숫자를 가리켰다.


"병사 천 명의 징병 비용, 치료비, 유가족 보상금. 그리고 두 달간의 체류 비용.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군량미 오만 석에 달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단돈 삼천 석에 이 모든 손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장군께서 오만 석을 버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악의는 침묵했다. 강무의 말은 궤변처럼 들렸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이것은 '프레이밍(Framing)'이었다. '군량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손실을 방지하는 비용'으로 관점을 바꾸는 기술.


하지만 악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천하의 악의가 적에게 군량을 내주고 성을 샀다는 오명을 쓸 수는 없다."


"오명이 아닙니다. '자비'입니다."


강무가 단호하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천하제일의 무장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력이 아니라 '덕(德)'이라는 평판입니다. '악의 장군은 적군조차 감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성을 얻었다. 심지어 패배한 자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어 그들의 굶주림을 달래주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진다면, 앞으로 장군께서 가는 길에 있는 성들은 칼을 쓰기도 전에 문을 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부전이승(不戰而勝) 아니겠습니까?"


강무는 악의의 가장 깊은 욕망을 건드렸다. 명장들이란 결국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를 고민하는 존재들이다. 강무는 그에게 '위대한 정복자'라는 브랜드를 팔고 있는 셈이었다.


악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튀겨졌다.


삼천 석의 군량. 아깝지만 대군에게는 며칠 치 식량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병력을 온전히 보전하고, '덕장'이라는 명성까지 얻는다?


이것은 남는 장사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이름이 뭐라 했지?"


"강무라고 합니다."


"좋다. 강무.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성문 밖 십 리까지 길을 터주겠다. 군량도 내주마. 허나, 만약 성 안에 흠집 하나라도 있다면 내 기병들이 즉시 너희를 쫓아가 짓밟아버릴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는 상인들이니까요."


악의가 몸을 돌려 나갔다. 호위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며 강무는 긴 숨을 내쉬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악의를 말 몇 마디로 돌려보내시다니요."


성문 뒤에 숨어 있던 위무기 장군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가 합리적인 사람이었기에 망정이지, 무식한 돌머리였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겁니다."


강무는 찻잔에 남은 차를 들이켰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헌데 선생, 왜 하필 군량미를 달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가져가기엔 짐만 될 텐데요."


향희가 물었다. 그녀는 강무가 단순히 식량이 필요해서 그런 조건을 건 것이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강무는 씨익 웃었다.


"그 쌀은 우리가 먹을 게 아닙니다. 뿌릴 겁니다."


"예? 뿌리다니요?"


"우리가 떠나는 길목에 있는 마을마다, 그 쌀을 나누어 줄 겁니다. '악의 장군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하사하신 쌀이다'라고 선전하면서 말이죠."


"그게 무슨……?"


"그렇게 되면 악의는 빼도 박도 못하게 '자비로운 장군'이 됩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우리를 치러 오고 싶어도, 자신의 평판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되죠. 일종의 '족쇄'를 채우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쌀을 먹으며 생각하겠지요. 제나라 왕실은 우리를 버렸지만, 강무라는 사람은 적장에게서 쌀을 뜯어내 우리를 먹여 살렸다고."


강무의 눈이 번뜩였다.


"이 쌀은 훗날 제가 천하를 장사할 때 쓸 '초기 투자금'이 될 겁니다. 백성들의 마음(민심)을 사는 데에 이보다 싼 값은 없지요."


이것은 현대 마케팅의 '바이럴(Viral) 효과'를 노린 전략이었다. 악의의 자원을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그야말로 남의 돈으로 생색을 내는 기술이었다.


그날 오후.


비현성의 성문으로 기묘한 행렬이 이어졌다. 위무기의 군대와 백성들이 짐을 챙겨 떠나는 길, 그들의 표정은 패잔병의 비참함이 아니라 마치 소풍을 가는 사람들처럼 밝았다. 연나라 군사들이 그들에게 길을 터주고, 수레에 군량미를 실어주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행렬의 가장 뒤, 강무는 수레 위에 앉아 멀어지는 비현성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는 악의가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악의는 묘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성을 차지한 것은 자신인데, 왜 저놈이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강무는 품에서 장부를 꺼내 새로운 항목을 적어 넣었다.


[매출: 아군 생존율 100%, 군량미 3,000석, 민심 획득.] [비용: 자존심(위무기 장군의 몫), 낡은 성 하나.] [순이익: 악의라는 거물과의 '커넥션'.]


"자,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선생?"


향희가 거문고를 안고 물었다.


"조(趙)나라로 갑니다. 그곳에는 천하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허영심 많은 왕자, 평원군(平原君)이 있지요. 그에게 아주 비싸고 쓸모없는 물건을 좀 팔아야겠습니다."


"쓸모없는 물건이라니요?"


"저기 걷고 있는 위무기 장군과 그의 군대 말입니다."


강무의 시선이 묵묵히 행군하는 위무기의 등을 향했다.


"지금 조나라는 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장 싸울 병사보다, 자신들을 지켜줄 '방패'가 절실한 상황이지요. 위무기 장군의 명성과 이 이천 명의 병사들…… 조나라 입장에서는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고 싶은 '우량주'일 겁니다."


강무는 이미 다음 판을 짜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군대를, 심지어 국가의 위기를 사고파는 거상이 될 생각이었다.


행렬은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의 뒤로 악의의 깃발이 펄럭이는 비현성이 점처럼 작아졌다.


한편, 연나라 진영의 말단 병사 조일(趙一)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징집된 농사꾼 출신이었다. 그에게 전쟁은 피와 비명, 그리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뒹구는 지옥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목격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성문이 열렸다. 적들은 웃으며 떠났고, 아군은 그들에게 밥을 주었다. 조일은 자신의 손에 들린 녹슨 창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는 알지 못했다.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기극'의 서막이 올랐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기극의 주연 배우가 방금 수레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을.


조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떠나는 강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왠지 저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아니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하고도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조일의 투구를 때렸다. 난세의 바람은 이제 막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고 있었다.


(2화 끝)


[용어 설명]


손실 회피 (Loss Aversion): 이익을 얻는 기쁨보다 손실을 입는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심리 현상. 강무는 악의가 병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자극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레이밍 (Framing): 같은 사건이나 상황을 어떤 틀(Frame)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효과. 강무는 '군량을 뺏기는 것'을 '손실 방지 비용'과 '명성을 사는 비용'으로 재정의했다.


매몰 비용 (Sunk Cost): 이미 지출되어 회수할 수 없는 비용. 보통은 이것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못하지만, 강무는 아직 매몰 비용이 크지 않은 시점을 노려 악의의 빠른 포기(협상)를 유도했다.


부전이승 (不戰而勝):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승리라는 뜻. 강무는 이를 현대의 '브랜드 마케팅' 개념과 연결했다.


공성계 (空城計):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성문을 열고 거문고를 타서 사마의를 속인 계략. 강무는 이를 오마주하되,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실질적인 '거래'로 발전시켰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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