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라의 왕궁인 용대(龍臺)는 거대한 위압감으로 서 있었다. 붉은 기둥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도열한 금군(禁軍)들의 창날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평원군 조승은 식은땀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위무기와 향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직 강무만이 태연했다. 그는 궁궐의 웅장함을 감상하는 관광객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회계 처리를 하느라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왕이 불렀다.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가 뿌린 소문 때문이다. 평원군이 사재를 털어 국방을 강화했다는 소문. 왕에게는 이것이 충성으로 들리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역모의 전조로 들렸을 것이다.'
권력자는 2인자가 너무 유능하거나 인기가 많아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것은 '권력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다. 강무는 왕의 그 불안감을 해소해주지 못하면, 오늘 밤 평원군의 저택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전하, 평원군 조승과 그 식객들이 당도하였사옵니다."
내관의 고함과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어전에는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비스듬히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의 눈은 퀭했고, 그 곁에는 간신배의 전형처럼 생긴 곽개(郭開)가 서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며칠 전 강무에게 돈을 뜯긴 공손룡이 독기 어린 눈으로 서 있었다.
함정이다. 공손룡이 왕의 총애를 받는 곽개와 손을 잡고 평원군을 치려 한 것이다.
"조승, 네가 요즘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지?"
효성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가시가 돋쳐 있었다.
평원군이 넙죽 엎드렸다.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소신은 그저 전하의 안위를 걱정할 뿐……."
"북방의 이목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보냈다더구나. 내 허락도 없이 사병(私兵)을 키우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기분이 좋더냐? 이제 내 자리만 차지하면 되겠구나?"
"아, 아니옵니다! 억울하옵니다, 전하!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평원군은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으나 말이 꼬였다. 공손룡이 그 틈을 타 치고 나왔다.
"전하, 보십시오. 평원군은 자신의 재력을 믿고 조정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 뒤에 있는 자들을 보십시오. 제나라에서 도망쳐 온 정체불명의 패잔병들을 끌어들여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모반의 징조이옵니다!"
곽개 역시 거들었다.
"전하, 공손 선생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저들이 진나라와 내통하여 지도를 팔아먹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중 함정이었다. 강무가 퍼뜨린 소문을 역이용해 '충신 코스프레를 하는 역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효성왕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여봐라, 저들을 당장 하옥하라. 국문(鞠問)을 열어 죄를 낱낱이 밝히겠다."
금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위무기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칼을 뽑으면 끝장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강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하!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에, 제 장부를 먼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강무의 목소리가 어전을 울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왕과 대신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장부? 네놈은 누구냐?"
"평원군의 말석 식객이자, 전하의 곳간을 채워드릴 재주를 가진 강무라 하옵니다."
강무는 품에서 두툼한 죽간 뭉치를 꺼내 머리 위로 받쳐 들었다.
"이 안에는 평원군께서 왜 이목 장군에게 군자금을 보내셨는지, 그리고 공손룡 선생이 진나라와 무슨 거래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모든 '숫자'가 적혀 있옵니다."
효성왕이 호기심을 보였다. 왕은 의심이 많은 만큼 탐욕도 많았다.
"올려라."
내관이 죽간을 받아 왕에게 올렸다. 왕은 죽간을 펼쳤다. 그곳에는 강무가 정리해둔 '공손룡의 뇌물 수수 내역'과 '진나라 왕흘과의 거래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물론, 강무가 공매도했던 3,000금의 행방은 '국고에 귀속될 예정 자금'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 이게 무엇이냐? 공손룡이 진나라에 지도를 팔려 했다고?"
왕의 눈이 공손룡을 향해 번득였다. 공손룡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전하! 모함입니다! 저놈이 문서를 위조한 것입니다!"
"위조인지 아닌지는 왕흘 장군에게 서신을 보내 확인해보면 알 일이지요. 하지만 전하,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역적인가가 아닙니다. '누가 전하의 돈을 벌어다 주는가'입니다."
강무는 고개를 들고 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하. 지금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국고는 비어 있고, 병사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평원군께서 이목 장군에게 보낸 돈은 평원군의 사재가 아닙니다. 공손룡이 진나라에 팔아넘기려던 국방 기밀을 제가 역으로 이용하여 뜯어낸 '적의 돈'입니다."
"적의 돈?"
"예. 적의 돈으로 우리 군대를 무장시켰으니, 이것이야말로 남는 장사가 아니옵니까? 평원군은 이 사실을 전하께 보고드리고, 획득한 3,000금을 전하의 내탕금(왕의 비자금)으로 바치기 위해 오늘 입궁하신 것입니다."
강무는 평원군에게 눈짓했다. 평원군은 멍하니 있다가, 강무의 의도를 깨닫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그, 그렇사옵니다! 전하! 소신은 오직 전하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흑흑."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왕에게 '역모'라는 프레임은 공포였지만, '비자금 3,000금'이라는 프레임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곽개가 나서서 찬물을 끼얹었다.
"전하, 속지 마십시오. 설령 돈을 바친다 한들, 평원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전쟁이 나면 군권이 필요한데, 평원군이 군권을 쥐게 되면 왕권이 흔들립니다."
곽개의 지적은 예리했다. 효성왕은 다시 주저했다.
강무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짜 카드를 꺼낼 때다.
"전하. 전쟁 비용이 걱정이십니까? 그리고 귀족들이 군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그렇다. 네놈에게 뾰족한 수라도 있느냐?"
"있습니다. 국고를 한 푼도 쓰지 않고, 귀족들의 충성심을 강제로 끌어낼 방법이 있지요."
"무엇이냐?"
"바로 '애국채(愛國債)'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어전의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채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전하. 지금 한단의 귀족들은 돈이 넘쳐나지만, 나라를 위해 내놓으라 하면 숨기기에 바쁩니다. 세금을 더 걷으려 하면 반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빌려달라고? 내가 왕인데 왜 굽신거리며 돈을 빌려야 하느냐!"
"굽신거리는 게 아닙니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전하의 이름으로 증서(채권)를 발행하십시오. '전쟁에서 승리하면 원금에 이자 2할을 쳐서 갚겠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강무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귀족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이자 2할은 거부할 수 없는 수익률이죠. 그들은 앞다투어 돈을 빌려줄 겁니다. 그렇게 모인 막대한 자금으로 용병을 사고 무기를 만드십시오."
"허나…… 만약 전쟁에서 지면?"
"그게 핵심입니다."
강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전쟁에서 지면, 나라가 망하니 갚을 필요가 없지요. 반대로 말하면, 귀족들은 자신들이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조나라가 이기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돈이 걸려 있으니까요."
강무는 이것을 '이해관계의 일치(Alignment of Interests)'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도망칠 궁리만 했습니다. 하지만 애국채를 사게 되면, 그들은 도망칠 수 없습니다. 조나라가 승리해야만 자신의 재산이 보전되니까요.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병을 내놓고, 군량을 지원하며 전하의 승리를 응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심을 돈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효성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세금 저항 없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고, 귀족들을 전쟁이라는 배에 강제로 태우는 일석이조의 계책.
"하, 하하하! 기가 막히구나! 그런 방법이 있다니!"
왕이 무릎을 쳤다.
"하지만 누가 그 채권을 관리하느냐? 누군가 중간에서 횡령이라도 하면……."
왕의 시선이 곽개와 공손룡을 스쳤다. 그는 이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강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제가 필요합니다. 저는 조나라의 기반이 없는 떠돌이입니다. 오직 전하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살 수 있는 파리 목숨이지요. 저를 '전시 재정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제가 귀족들의 주머니를 털어 전하의 군대를 최강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효성왕은 강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위험한 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놈의 머리가 필요하다.
"좋다. 강무, 너를 호군(護軍)에 임명하고 전시 재정의 전권을 맡기겠다. 단, 실패하면 평원군과 너의 목을 성문에 걸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공손룡은 닭 쫓던 개가 되었고, 평원군은 지옥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궁을 나오는 길, 평원군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서, 선생. 정말 십년감수했소. 헌데 애국채라니? 정말 귀족들에게 이자를 쳐서 갚을 생각이오?"
강무가 피식 웃었다.
"장군. 전쟁이 끝나면 화폐 가치는 폭락합니다(인플레이션). 우리가 갚아야 할 원금의 실질 가치는 똥값이 될 겁니다. 결국 전하께서는 종이 몇 장 써주고 공짜로 전쟁을 치르시는 셈이죠."
강무는 현대 경제학의 '인플레이션 조세(Inflation Tax)' 개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채권 발행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목적?"
"누가 채권을 많이 사고, 누가 안 사는지를 보면 '진짜 충신'과 '매국노'가 구별되겠지요.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제가 채권 가격을 조작하여 공손룡 같은 자들의 재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수도 있고요."
강무의 눈에 서늘한 금융 전쟁의 서막이 비쳤다.
강무가 호군에 임명되자, 조나라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는 가장 먼저 한단성 광장에 '전황 상황판'과 '채권 거래소'를 설치했다. 매일매일 전선에서 오는 소식에 따라 채권 가격이 춤을 췄다.
"이목 장군이 흉노 기병을 이끌고 남하한다! 승률 상승!" -> 채권 가격 폭등. "진나라 왕흘 군이 국경 요새를 돌파했다!" -> 채권 가격 폭락.
강무는 이 변동성을 이용해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귀족들은 매일 아침 전황판을 보며 일희일비했다.
한편, 모소의 공방은 이제 거대한 군수 공장으로 변해 있었다. 강무는 피난민들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흡수했다.
"밥을 굶는 자들은 공방으로 오라! 하루 세끼를 주고, 전쟁이 끝나면 시민권을 주겠다!"
《머니볼》의 이론이 적용되었다. 늙은이나 여자라 하여 배제하지 않았다. 화살 깃을 붙이거나, 밥을 짓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강무는 노동을 분업화(Division of Labor)하여 생산 효율을 극대화했다.
향희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기이한 전율을 느꼈다.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개조하고 계시는군요."
"개조가 아닙니다. '최적화(Optimization)'입니다.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중이죠."
강무는 지도를 펼쳤다. 이제 조나라뿐만 아니라, 위(魏), 초(楚), 연(燕) 등 주변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나라의 공격은 거셀 겁니다. 조나라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이제 '합종(合從)'이라는 거대한 M&A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때, 서 집사가 급한 전갈을 들고 뛰어왔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사신을 보냈습니다. 우리 조나라가 망하면 자기들도 위험하다는 걸 알고 돕겠답니다. 헌데……."
"헌데?"
"조건이 있답니다. 조나라의 군사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합니다."
신릉군. 위무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공자로 불리는 인물. 하지만 그의 야심은 평원군보다 훨씬 크고 위험했다.
강무는 턱을 괴었다.
"군사 지휘권을 달라고? 하하, 우리 회사의 경영권을 넘기라는 거군요. 적대적 인수합병(Hostile Takeover) 시도로군."
위무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시겠소? 신릉군의 지원 없이는 진나라를 막기 힘드오."
"받아야죠. 하지만 경영권은 넘겨줄 수 없습니다. '독소 조항(Poison Pill)'을 넣어서 계약해야겠습니다."
강무는 붓을 들어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서사시 중, 이제 겨우 초반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진나라라는 거대 기업, 그리고 6국이라는 경쟁자들. 강무는 이 난세의 판돈을 전부 쓸어 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