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邯鄲)의 중앙 광장에는 기이한 구조물이 들어섰다. 붉은 비단으로 감싼 거대한 나무 게시판. 그 위에는 '애국채(愛國債) 시세'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숫자가 적힌 나무패들이 쉴 새 없이 갈아 끼워지고 있었다.
"오늘의 시세는 1채권당 쌀 8두요!" "뭐라고? 어제는 10두였잖아! 하루 만에 2할이 떨어졌다고?"
광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이 보증한다는 말에 앞다투어 채권을 샀던 귀족들이, 이제는 그것을 팔아치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공포'였다.
"진나라 왕흘 장군이 국경 요새인 오성(五城)을 돌파했답니다!" "기병대가 벌써 한단성 300리 밖까지 왔대요!"
흉흉한 소문은 전염병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전쟁에서 지면 이 채권은 휴지 조각이 된다. 귀족들은 본능적으로 '손절매(Stop Loss)'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 광장의 한구석, 2층 다관(茶館)의 발코니에서 강무는 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들려 있었고, 표정은 폭락장을 지켜보는 펀드매니저처럼 냉담했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시세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쌀 7두까지 내려갔습니다요!"
서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와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진정하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야."
"제, 제자리라니요? 이러다간 아무도 채권을 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군자금 마련은 실패하고, 나리 목은……."
서 집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강무는 피식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서 집사. 투자의 제1원칙이 뭔지 아나? '공포에 사서 환희에 팔아라'일세. 지금 저 아래 개미 떼처럼 몰려든 귀족들이 공포에 질려 던지는 물건들, 저게 다 누구 주머니로 들어갈 것 같나?"
강무의 시선이 광장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공손룡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군중 속에 섞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망했다! 진나라 군대가 오면 다 죽어!" "강무라는 놈이 채권 판 돈을 들고 야반도주했대!"
그들은 조직적으로 악재(Bad News)를 퍼뜨리고 있었다. 시세 조작 세력, 아니 '공매도 세력'의 등장이었다.
같은 시각, 공손룡의 저택.
공손룡은 콧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겁에 질려 채권을 헐값에 팔아치운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하하하! 내 말이 맞지 않소? 강무 그 사기꾼 놈의 말만 믿고 돈을 빌려주다니. 이제 조나라는 끝났소. 내 정보통에 의하면 왕흘 장군의 군세는 20만에 달한다고 하오."
"아이고, 공손 선생.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걱정 마시오. 내가 진나라 쪽에 줄을 대놓았으니, 나만 믿고 따르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오. 대신……."
공손룡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가지고 있는 채권을 모두 내다 버리시오. 그것을 들고 있다가 진나라 군에게 발각되면, '조나라를 도운 죄'로 삼족이 멸할 것이오."
귀족들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룡의 계산은 완벽했다. 채권 가격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강무의 자금줄을 말려 죽인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면 강무는 참형을 당할 것이고, 자신은 진나라에 협조한 공으로 살아남는다. 설령 조나라가 이긴다 해도, 이미 폭락한 채권 시장에서 강무는 신용을 잃고 매장될 것이다.
"강무, 네놈이 숫자 놀음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정치는 심리전이다. 공포 앞에서는 어떤 이성도 마비되는 법이지."
공손룡은 승리를 확신했다.
다시 다관(茶館).
위무기 장군이 갑옷을 입은 채 들이닥쳤다.
"선생! 지금 밖이 난리요. 병사들조차 동요하고 있소. 월급으로 받은 채권이 똥값이 되었다며 탈영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단 말이오! 어서 대책을 내놓으시오!"
"장군. 진정하십시오. 지금부터가 진짜 작전입니다."
강무는 탁자 위에 놓인 장부를 펼쳤다.
[현재 채권 시세: 쌀 5두. (발행가 10두 대비 50% 하락)] [시장 심리: 극도의 공포 (Panic).] [매도 주체: 공손룡 파벌 및 부화뇌동하는 귀족들.]
"장군. 제가 지난번 진나라 왕흘에게 지도를 팔아 챙긴 금 3,500근. 그리고 평원군을 통해 왕실 내탕금에서 뜯어낸 금 2,000근. 총 5,500근의 현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 그야 국고에 잘 보관되어 있겠지."
"아닙니다. 지금 저 아래 광장, 허름한 쌀가게 지하 창고에 대기 중입니다."
"뭐요?"
강무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채권 가격은 '저평가(Undervalued)' 상태입니다. 실제 조나라의 국방력(모소의 신무기, 이목의 기병대)은 반영되지 않고, 오직 공포 심리만 반영된 가격이니까요. 이럴 때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방어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위무기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바로 '자사주 매입(Stock Buyback)'입니다."
강무는 서 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서 집사. 깃발을 올려라."
서 집사가 붉은 깃발을 창밖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광장 곳곳에 숨어 있던 십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범한 상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강무가 고용한 거상(巨商)들의 대리인이었다.
"채권 삽니다! 쌀 6두에 삽니다!"
광장 한복판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폭락하던 시장에 처음으로 '매수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미쳤어? 6두에 산다고?" "저 사람 바보 아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또 다른 곳에서 외침이 터졌다.
"나는 7두에 사겠소! 수량 제한 없음! 가져오는 대로 다 삽니다!"
"여기 7.5두! 금으로 즉시 결제해 드립니다!"
순식간에 광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파는 사람만 있고 사는 사람이 없던 시장에, 거대한 자본을 쥔 '고래'들이 나타나 물량을 쓸어 담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 가격이 오른다?" "누가 저렇게 사들이는 거야?"
공손룡의 하인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가격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강무가 투입한 막대한 현금 유동성(Liquidity)이 그들의 매도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강무는 발코니에서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주가는 실적의 그림자지만, 단기적으로는 수급(Supply and Demand)의 노예지. 내가 가진 현금으로 바닥에 떨어진 채권을 싹쓸이한다. 그러면 시장에 유통되는 채권의 씨가 마르겠지."
이것은 '품절주(Stock Shortage)' 전략이었다. 유통 물량이 줄어들면, 가격은 적은 매수세에도 급등하게 된다.
강무는 위무기를 돌아보았다.
"장군. 이제 2단계입니다. 시장에 돈은 풀렸으니, 이제 '명분(Story)'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 채권이 떡상할 수밖에 없는지 믿게 만들어야죠."
"어떻게 말이오?"
"향희 낭자가 지금쯤 작업을 시작했을 겁니다."
한단성 최고의 기방, 연화루(蓮花樓).
이곳은 귀족들과 대상인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의 장이었다. 오늘따라 가장 큰 연회석에는 향희가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홀려 수많은 남정네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향희의 손가락이 현을 튕기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북풍이 불어오니 오랑캐의 말발굽이 얼어붙네. 용대(궁궐)의 주인께서 곳간을 열어 종이(채권)를 사들이시니, 이는 승리의 깃발을 미리 사두시는 것이로다. 저 멀리 기러기(이목 장군)가 칼을 물고 날아오는데, 어리석은 자들은 옥석을 버리고 돌멩이를 줍는구나."
노래가 끝나자, 객석이 술렁거렸다.
"저게 무슨 뜻이지?" "왕께서 채권을 사들이고 계신다는 소리잖아. 승리를 확신하시니까 되사들이는 거 아니겠어?" "북쪽의 기러기라면…… 이목 장군을 말하는 건가? 이목 장군이 오고 있대?"
향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짐짓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평원군 나리께서 어젯밤에 전 재산을 털어 채권을 추가 매수하셨답니다. 이목 장군이 이끄는 5만 기병대가 이미 국경을 넘었다는 밀서를 받으셨다더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평원군은 겁에 질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이목 장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중 심리'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럴듯한 소문'이 중요할 뿐이다.
"뭐라고? 평원군이 전 재산을 걸었다고?" "그럼 진짜 이기는 거 아냐?" "젠장! 아까 5두에 팔았는데! 다시 사야 돼!"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편승 효과가 발생했다. 기방에 있던 귀족들과 상인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하인들을 불러 소리쳤다.
"야! 당장 시장으로 가서 채권 다시 사와! 웃돈을 줘서라도 사오란 말이야!"
다시 광장.
상황은 역전되었다.
"채권 삽니다! 쌀 9두!" "비켜! 내가 10두에 사겠소!" "12두! 12두 부르겠소!"
불과 반나절 만에 가격은 폭락 전 수준을 회복하고, 오히려 폭등(Soar)하기 시작했다. 강무가 바닥에서 긁어모은 물량은 이미 금고 깊숙이 잠겼고, 시장에는 채권이 없었다.
공손룡의 하인들은 멍하니 서 있다가 성난 군중에게 밀려났다.
"이 사기꾼들아! 망한다며! 너희들 말 듣고 팔았다가 손해만 봤잖아!" "저놈들을 잡아라!"
강무는 발코니에서 그 아수라장을 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장 안정화 조치 완료. 이제 국론은 통일되었군요."
이제 귀족들은 조나라가 망하면 안 되었다. 자신이 비싸게 다시 산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면 안 되니까. 그들은 이제 누구보다 열렬한 '전쟁 지지자'가 되었다.
"전하 만세! 조나라 만세! 진나라 놈들을 때려잡자!"
돈이 걸리자 애국심이 폭발했다. 강무가 설계한 '이해관계의 일치'가 완벽하게 작동한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전령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급보요! 급보!"
광장의 소음이 뚝 끊겼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전령을 바라보았다. 만약 패전 소식이라면, 이 모든 거품은 순식간에 터질 것이다.
강무조차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목 장군인가?"
전령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외쳤다.
"진나라 왕흘 군의 선봉대가…… 전멸했습니다!"
와아아아!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췄다. 채권 가격이 천정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하지만 강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선봉대 전멸이라……."
그는 위무기를 돌아보았다.
"장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목 장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군의 주력은 여기 한단에 묶여 있고요. 도대체 누가 왕흘의 선봉대를 전멸시켰단 말입니까?"
위무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북방의 의병들인가?"
강무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장부에 없는 변수(Variable)가 발생했다. 그는 서 집사에게 손짓했다.
"전령을 데려와라. 상세한 전황을 들어봐야겠다."
잠시 후, 불려 온 전령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게…… 우리 군사가 싸운 게 아닙니다."
"그럼?"
"진나라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뭐라고?"
"진나라 선봉대장이 갑자기 칼을 뽑아 부관을 베고, 부대원들이 서로를 죽였다고 합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말입니다."
강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분? 그 규율 엄격한 진나라 군대에서?
그때, 향희가 다관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선생. 방금 들어온 첩보입니다. 위나라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신릉군입니까?"
"예. 신릉군이 보낸 식객들이 며칠 전부터 진나라 군영 근처에서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나라 군영에 '이상한 약'을 풀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강무는 탁자를 내리쳤다.
"신릉군! 그자가 개입했군."
신릉군 위무기(魏無忌, 조나라 장군과 동명이인). 전국사군 중 으뜸이라 불리는 위나라의 공자. 그는 강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대를 보내 돕는 게 아니라, 진나라 군대를 '독(Poison)'으로 무너뜨려 조나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속셈이었다.
"이건 구원 투수가 아니라, 구단을 집어삼키려는 사냥꾼이 들어온 꼴이군."
강무는 장부를 펼쳤다.
[새로운 경쟁자 등장: 위나라 신릉군.] [특성: 모략가, 독살, 매수.] [위협 수준: 진나라 왕흘보다 높음.]
강무는 방금 벌어들인 막대한 시세 차익을 바라보았다.
"돈은 벌었지만, 경영권 방어전은 이제 시작이군요."
그는 위무기 장군에게 명령했다.
"장군. 채권 수익금으로 당장 모소의 공방을 풀가동하십시오. 화살 10만 개, 그리고 성벽을 보강할 자재를 확보해야 합니다."
"진나라 놈들이 자멸했다는데도 말이오?"
"자멸한 게 아닙니다. 더 무서운 놈이 그들을 '지워버린' 겁니다. 이제 곧 신릉군이 '승리의 대가'를 청구하러 올 겁니다. 그때 우리가 약해 보이면, 조나라는 진나라가 아니라 위나라에게 먹히게 됩니다."
강무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한단성 문 앞에 위나라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리고 수레 가득 진나라 병사들의 목을 실은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거만하게 성벽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위나라의 신릉군께서 조나라를 구원하고, 역적들을 토벌하러 오셨다! 성문을 열고 구세주를 맞이하라!"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강무는 성루 위에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저것은 구원군이 아니다. 부실 기업(조나라)을 헐값에 인수하러 온 '기업 사냥꾼(Corporate Raider)'이다.
"서 집사. 장부를 새로 가져와라."
강무가 붓을 들었다.
"이번 거래는 좀 복잡해지겠어. 독소 조항(Poison Pill)을 준비해야겠군."
바람이 바뀌었다. 진나라의 피비린내가 사라진 자리에, 위나라의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향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강무의 11권짜리 장부 중, 이제 막 1권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7화 끝)
[용어 설명]
손절매 (Stop Loss):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가지고 있는 주식이나 자산을 손해를 보고서라도 파는 행위. 공포에 질린 귀족들이 헐값에 채권을 판 상황이다.
공매도 (Short Selling): 없는 주식을 빌려 판 후, 가격이 떨어지면 되사서 갚는 기법. 공손룡은 악소문을 퍼뜨려 가격을 떨어뜨리고 이득을 보려 했다.
자사주 매입 (Stock Buyback): 회사가 자기 회사의 주식을 시장에서 사들이는 것. 유통 물량을 줄여 주가를 부양하고, 경영권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강무는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되사들여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배력을 높였다.
밴드왜건 효과 (Bandwagon Effect): 어떤 선택이 대중적으로 유행하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그 선택을 따르는 현상. 향희가 퍼뜨린 소문에 귀족들이 앞다투어 채권을 다시 사들인 상황이다.
기업 사냥꾼 (Corporate Raider): 부실한 기업의 경영권을 뺏거나,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파는 투기 자본. 조나라의 위기를 틈타 군권을 장악하려는 신릉군을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