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사랑스러운 중2병을 본 적 있나요?
얼마 전, 그레타 거윅 감독의 신작인 영화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의 개봉 전 시사회에 다녀왔다.
2020년 최고의 영화를 정말 빨리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레타 거윅 감독은 유년시절 우리들의 추억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책 <작은 아씨들>을 2020년 버전으로 완벽히 재탄생시켰다.
(빠른 시일 내에 영화 작은아씨들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나누고 싶다. 코로나 19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아깝지 않은 좋은 작품이었기에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다)
사실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과 조 마치의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국 같은 로리를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인 <레이디 버드>에서 이미 한번 호흡을 맞추었었다. 당시 그레타 거윅 감독은 자신의 첫 연출 데뷔임에도 불구하고 <레이디 버드>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배우뿐만이 아닌 연출가로서의 능력까지 인정받았다. 또한 시얼샤 로넌 역시 지난한 성장통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는 크리스틴으로 완벽히 변신해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결국 2018년 개봉한 영화 <레이디 버드>는 현재 할리우드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 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19 때문에 지금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작은아씨들>을 보지 못해 아쉬운 분들께 영화 <레이디 버드>를 강력 추천드리고 싶다.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I am LADY BIRD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는 굳이 카테고리화 하자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똘+아이' 과에 속하지만 그 마저도 2% 부족해 보이는, 정말 본 적 없는 캐릭터이다.
크리스틴이라는 부모가 주신 멀쩡하고도 예쁜 이름이 있음에도 그는 한사코 거부한다. 대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만드는데 바로 "레이디 버드". 중요한 건 인용을 의미하는 따옴표를 꼭 양쪽에 붙여줘야 한다는 거다. (왜 내 이름을 엄마가 지어?라고 당당히 따지던 모 래퍼의 모습이 겹친다)
크리스틴이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고향의 답답함, 엄마의 잔소리,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반드시 날아가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와 함께 중요한 무언가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따옴표처럼 자신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라는 자각이 담긴 이름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중 2병 걸린 청소년이라고 평가절하하기에는 "레이디 버드". 언제 어디서 터질 줄 모르는 폭탄 같은 크리스틴 때문에 매일 뒷목을 잡는 그의 엄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레이디 버드"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매력적이다. 심지어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 마저 느껴진다. 왜일까?
영화의 오프닝은 레이디 버드가 엄마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레이디 버드가 고등학생이 되기 직전 상황인 듯한데, 두 모녀가 눈물이 글썽한 체 기쁨을 온전히 나누기도 전. 작은 시비(?)가 붙고 애틋하던 모녀는 순식간에 욕설과 비아냥을 내뱉으며 서로를 공격하고 또 공격한다. 분명 방금까지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급 반전되면서 관객은 당황하지만 두 모녀에게는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 것인지 두 사람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전투태세로 전환 공격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핑퐁핑퐁 주고받는 센 수위의 욕설과 함께.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크리스틴 모녀는 정말 극과 극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피 튀기는 대화를 들어보면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닌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 감옥에나 가버리라는 엄마의 독설에 분이 안 풀린 레이디 버드는 엄마가 운전 중인 차의 문을 열어 과감히 뛰어내려버리는 것으로 오프닝은 끝이 난다. 앞으로 2시간 가까이 영화를 이끌어갈 "레이디 버드"가 어떤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가히 충격적인 오프닝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변명을 대신하자면(필자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레이디 버드에게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크리스틴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의 지긋지긋한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엄마는 기껏해야 집에서 20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한 대학에 가길 원한다. 더 열 받는 것은 엄마와 학교 선생님들 모두 자신의 성적이 낮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뉴욕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레이디 버드" 자신은 적당히 타협해서 예일대쯤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특히 한창 하고 싶은 일인 오억 오조 가지인 이 시기에, 엄마는 매일 미사를 드리고 고리타분한 신부, 수녀님의 통제 아래 있는 기독교 공립 고등학교로 자신을 입학시킨다. 심지어 그 이유를 들어보면 낮은 수업료와 레이디버드가 태어나기 전 입양된 오빠가 사립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 안에서 사람 죽는 걸 봤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그 오빠라는 사람은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에도 버클리 대학을 보냈지만 지금은 반백수가 되어 여자 친구와 동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께 빌붙어 살고 있다.
"레이디버드"는 논리적이지 않은 엄마의 이야기에 항변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씨알도 안 먹힌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하든 레이디버드는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후 영화는 주변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개척해가는 "레이디버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당선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매년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특이한 선거 포스터를 붙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린다. 어디 그뿐인가 학교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오디션에 참여하고 학교 대표 킹카인 대니에게도 적극적으로 대시도 한다. 물론 수학선생님이 정확히 채점해 놓은 시험지를 훔쳐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고 낙태의 비도덕성을 이야기하며 여학생들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성교육 강사에게는 조금은 짓궂게 대답해 학교 전체를 들썩이게 한다.
문제는, 악의는 없고 순전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대로 행동한 "레이디 버드"에게 가족과 학교 그리고 친구들은 너무나 가혹하게 대한다는 점이다. "레이디 버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보통의 기준과 규칙에 맞지 않는다며 다그치기만을 한다. 그중 레이디버드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의 엄마가 레이디버드에게 퍼붓는 독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정말 욕을 '먹는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부모는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정성껏 욕과 비난을 꾹꾹 담아 레이디 버드에게 '던진다.'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조롱보다 몇 만배 아프게 들리는 엄마의 욕은 사실, 들어보면 그게 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더 환장할 노릇이다.
하지만,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는 엄마의 절규 아닌 절규에 "레이디 버드"는 분명히 답할 수 있다.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일상처럼 반복되는, 엄마와 레이디버드와의 싸움이었지만
조금은 지친듯한, 하지만 나를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 돼요?라는 간절함이 담긴 레이디 버드의 반문은 대부분의 관객들을 멈칫하게 만든다. 겉으로 보면 적반하장 같아 보이는 말처럼 보여도 그 질문은 우리 누구나가 한 번쯤 가져본 적 있는 혹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 상대가 엄마에게든 친구에게든 혹은 개념 없는 회사 상사에게든. 나를 들들 볶는 모든 것들에게 보내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레이디버드의 말처럼 레이디버드는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어른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한참은 부족해 보이지만 레이디버드는 매 순간 마주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려 나름의 최선의 방법으로, 최대한 자신이 다치지 않는 방법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조금은 서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어쨌든, 영화는 꾸준히 그리고 잔잔히 바람 잘날 없는 레이디버드 일상과 그 일상을 겪어내며 레이디버드 본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과연 레이디버드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순정 만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이상적인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평생 이해하지 못할 엄마와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얼마 전 오스카 시상식이 열린 LA 돌비극장에서 우리나라 작품 <기생충>의 영어 원제인 parasite 가 4번이나 불린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백인 우월주의가 강한 아카데미에서 대한민국의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을 수상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레이디 버드" 역시 자신이 그런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고 있는 줄 모르겠다)
기생충의 4관왕과 함께 오스카 시상식에 화제가 되었던 또 하나의 일은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인 나탈리 포트만의 드레스였다.
나탈리 포트만은 디올에서 특별 제작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는데, 그 드레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별한 '장치'가 하나 있었다. 바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8인의 여성 감독들의 이름이 나탈리 포트만의 드레스에 새겨져 있었다. (물론 작은아씨들, 레이디버드의 그레타 거윅의 이름 역시 당당히(?) 올랐다.)
실제로 아카데미 역사상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 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재능 있는 많은 여성 감독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한국이나 외국이나 똑같은 것이다.
무튼, 여성 배우와 여성 감독이 그들의 능력을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그레타 거윅과 시얼샤 로넌의 이름은 꼭 기억하시길.
그리고 영화 <작은아씨들>과 <레이디 버드>는 꼭 한번 봐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