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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라는 사치, 영화 <세 자매>

우리에게 당장 사과하세요!

    어렸을 때 이해가 잘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는 열혈 워킹맘이자 가부장 문화가 찌든 시댁의 큰며느리인 엄마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말 그대로 뼈가 빠지도록 일만 하고 나서도 일요일마저 아침 일찍 교회로 출근하는 일이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간절하게 기도하고 예배 이후에는 목사님 장로님 이하 모든 교회 구성원분들의 안부를 챙기며 점심 국수 배식, 성전 꽃꽂이, 성가대 등 여러 봉사를 섭렵하는 엄마의 모습은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내가 봐도 참 비효율적인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죽은 듯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점을 먹고 또다시 늘어지게 낮잠을 자며 피로를 푸는 것이 훨씬 더 엄마의 정신, 육체 건강에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지금도 가끔씩 해본다. 

    지금보다 삶의 고단함을 잘 몰랐던 어린 눈에 비친 엄마의 행동은 '신앙'이라는 숭고한 단어로도 설명이 안 되는, 참으로 이상한 모습이었다. 도대체 엄마는 무엇이 간절했기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온갖 노동과 여러 책임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도 왜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요일마저 교회에 헌납했을까. 엄마가 꿈꾸는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길래 엄마는 그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이었을까


어느 누구 하나 속편하게 사는 이 없는 영화 <세 자매> 속 세 자매


    영화 <세 자매>는 영화의 대부분을 중년에 접어든 첫째 희숙(김선영 분), 둘째 미연(문소리 분), 셋째 미옥(장윤주 분)의 현재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쫓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불합리한 희생을 당연한 듯 감수한 첫째 희숙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주눅이 들어 살고 있다. 본인은 암에 걸렸어도 여전히 중2병을 극복하지 못한 딸을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기도 하고 예약을 해놓고 뒤늦게 꽃을 사지 않겠다는 손님에게도 조금의 싫은 내색 역시 하지 않는다. 남 보기에 어떻든 자신이 참으면 모든 게 다 괜찮다는 희숙의 근시대적 K-장녀의 모습은 집안의 평화유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세 자매가 속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둘째 미연은 세 자매 중에서 겉으로 제일 멀쩡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를 꿈꾸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매일 같이 남편과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들이받는 셋째 미옥과 첫째 희숙이 못해내는 '딸'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기 때문이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도 미연이고 교수 남편과 어린 아들 딸을 완벽히 케어하는 것도 미연이며 그 와중에 교회에 나가 성가대를 이끄는 것도 미연이다. 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힘을 끌어 모아 모든 걸 완벽히 해내는 미연의 속내는 매일을 참고 사는 첫째 희숙이나 순간을 참지 않고 모든 걸 쏟아내는 미옥만큼이나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으며 그만큼 불안정한다. 결국 희숙, 미연, 미옥 모두 어느 누구 하나 속 편하게 사는 이가 없는 것이다.  



    자매임에도 생김새, 성격, 성향, 사는 환경 등 뭐 하나 겹치는 것 없는 희숙, 미연, 미옥 자매가 마주하고 있는 일상의 불행을 진득하게 따라가다 보면 세 자매 그리고 그들의 남동생 진섭이의 불행이 현재 각각 다른 형태를 띠거나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중국에는 같은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며 무조건 가장인 자신의 말이 옳다 믿는 그들의 아버지와 폭군보다도 더한 아버지의 행동을 방관하며 오히려 그 행동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는 어머니까지.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가족 구성원의 행복과 안위보다는 밖에서 보이는 울타리의 모습이 훨씬 더 중요했던 부모 아래서 세 자매와 남동생 진섭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고 행복을 강탈당한다. 결국 참느냐 안 참느냐 완벽을 추구하느냐 자포자기로 사느냐처럼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세 자매 스스로의 몫이었으나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은 결국 부모세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꿈꾸던 천국이 무엇이었는지 외치는 미연


  가족이라는 알량한 이유로 혹은 예전에는 다 그러고 살았다는 안일하면서 무식한 이유로 여전히 자매들을 배려하지 않는 부모에게 총대를 매는 것은 결국 가장 완벽해 보였던 모범생 둘째 미연이다. 매일같이 교회에 헌신하며 자신과 가족들의 천국을 기도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꿈꾸는 천국은 오지 않았음을. 그리고 아주 오래전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천국 역시 아직 오지 않았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던 천국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미연은 반성은커녕 여전히 자신들의 위신만 중요시하는 부모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불행의 책임을 단호히 묻는다. 그리고 요구한다. 지금 당장 사과하라고

  누군가는 세 자매와 동생 지섭의 인생을 집어삼킬 만큼의 큰 잘못을 단순히 '사과'하나로 퉁칠 수 있느냐 물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다 지난 일 이제와 사과받으면 뭐가 달리지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과가 어쩌면 평생을 고통받은 세 자매에게 구원이 될 수 있으며 위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더 이상 미연이 헛된 천국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고 희숙이 더 이상 주눅 들고 살지 않을 수도 있고 미옥과 진섭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과하길 바란다. 누가 되었든 우리에게 상처 준 모든 사람은. 

나와 내 자매 들은 각자 알아서 천국이라는 사치를 부려 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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