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펴고 싶다

by 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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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8일, 목요일(날씨: 바람이 차서 얄밉다.)

1. 위기가 찾아왔다.

2. 남편이 회사에서 퇴직을 통보받았다.

3. 위기는 곧 기회! 내가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줘야지.




우리 집 거실 벽을 보니 여전히 2025년 12월 달력이 걸려있다. 새해가 밝았으니 달력을 떼어내고 2026년 달력을 새로 걸었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새해 소망을 빌거나 버킷리스트 따위를 만들지는 않았다. 나는 성격이 소박해서 크게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바란다면, 어제 같은 오늘을,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살면 좋겠다. 정말 이거면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에게도 나쁜 일이 언제든 올 수 있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쩌면 이 기적을 매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가족은 흔들리고 있다. 남편이 작년 말, 12년을 일한 직장에서 퇴사 통보를 받았다. 남편은 나와 같은 사회복지 분야에서 청소년지도사로 일한다. 상황을 들어보니 기관을 운영하는 위탁법인이 변경되면서 고용승계 대상에서 남편이 제외되었단다. 그래서 남편은 강제로 직장을 그만 둬야 한다. 불과 며칠 전까지 딸이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어떻게 돌봐야 할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남편이 나에게 상황을 처음 들려주었을 때 너무 불안했지만, 마음을 감추고 나름 쿨하게 말해주었다.


“오히려 잘 됐어, 난 걱정 안 해.”


우리 가족은 남편이 퇴사하라고 통보받은 날 서울로 미술관에 다녀왔다. 관람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전철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퇴직은 우아하게’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저거 아빠 얘기 아니야?” 딸이 광고판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하게 말한다. 상황이 ‘웃퍼서’ 우리 가족은 크게 웃었다. 우리는,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별일 아닌 듯, 평소처럼 저녁을 보냈다. 그런데 마음은 결국 티가 난다.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나 보다. 남편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 걱정 안 한다는 말 방금 일곱 번째 말했어.’라고 말하더니 결국 마음이 상해서 방에서 나가 버렸다. 이런. 입이 방정이다.


남편은 이후에도 직장에 출근하고 있다. 남은 연차도 있고, 일도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하루는 신랑이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오늘 얼마나 힘들게 견뎠을까 싶어서, 말 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남편 머리와 이마 쪽에서 뜨끈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남편은 증기기관차가 열을 뿜어내듯 머리로 스트레스를 다 뿜어내나 보다. 나는 팔에 힘을 더 꽉 주고, 말 대신 마음으로 말을 건넸다. 다행히 남편은 건강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새 출발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로서 나는 어떻게 도울지 생각해 본다. 그래, 남편이 편하게 숨을 고르고, 새 길을 찾도록 내가 더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줘야지. 암.


살다 보면 반갑지 않은 일도 만난다. 그러니 우리 가족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내 나이 42살, 이제는 흰머리가 너무 자연스럽고, 피부 곳곳에 검버섯이 생겼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 뭔가를 잃어가겠지. 그때마다 놓지 않으려고 손을 꽉 움켜쥐지 않고, 오히려 손을 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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