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쓸모

흩어졌던 나를 다시 모으는 시간

by 스틸노트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이라야 당신은 자기만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
_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번 주 내내 유난히 어수선했다. 정확히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는 ‘어떤 상태’에 시달렸다. 짙은 안개가 두개골을 가득 메운 듯 종일 머리가 멍했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손이 가지 않았다. 공간을 바꿔보면 나아질까 싶어 카페, 도서관, 공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마음은 대체 뭘까.


집에 돌아와 눈앞의 일감을 치우면서도 머리 위에 뜬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멀게만 느껴졌다. 마음은 답답했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붙잡혀 있는 걸까. 무엇이 두려워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몰입하는 게 어려울까.


막혀버린 세면대의 배수구처럼 내 안의 에너지가 꽉 막혀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단순했다. 머리가 몸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지난날 아이를 통제하려 애쓰던 나처럼, 이번엔 그 화살을 내게로 돌려 “넌 해야만 해”라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러다 결국 넘쳐 버렸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건 욕구,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건 이성이다. 여기에 ‘만’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모든 것은 통제가 된다. 나는 내 욕구를 무시한 채 늘 이성의 편에 서 있으려 했다. 한없이 느슨해지려는 나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어른이라면 그렇게 해야 ‘만’ 하는 줄 알았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믿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사실 가장 모르는 존재가 ‘나’였다. 매일 같은 방향으로만 걸으며 선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욕망의 색깔들을 애써 지워버렸다.


나는 여전히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그걸 알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수면 위의 빙산만 보고 그 아래 거대한 뿌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겸손해지자. 고작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라고 믿지 말자.


오전 요가를 하는 내내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억누르지 말자. 억누르지 말자.

잠깐이라도 좋으니 흘러가게 두자.”


흘러가는 대로 둔다는 것은 나를 더 믿어보겠다는 의지다. 오늘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하고, 그대로 조금 더 멀리, 깊게 들어가 보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면, 왔던 길로 돌아가 다시 방향을 잡으면 된다. 그때를 대비해 나에게 맞는 리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자리로 천천히 걸어가자.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3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감각이 되살아났다. “해냈다”의 감각, “조금만 더”의 감각, 뛰는 동안 팝콘처럼 떠오르던 영감까지. 몸의 리듬을 되찾자 마음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이 날의 흐름대로 불렛저널을 펼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과 감정을 제자리에 정리했다. 기록해 두면 단순해진다.


“우리는 때로 길을 잃어보아야 한다. 세계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쯤 서 있는지 우리를 둘러싼 무한한 관계 속에서 나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길을 잃으면서부터다.”
_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방황은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니라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시선의 전복이다. (중략) 방황이란, 더욱 대차게 나다움을 벗어던짐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나다움을 되찾는 방법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방황하지 않는 비법이 아니라 더욱 멋지게 방황하는 법이었다. “
_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이게 바로 방황의 쓸모가 아닐까. 길을 잃어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알게 된다. 잠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을 때는, 그저 낯선 여행지를 즐기듯 여유를 가져보자.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다시 방향을 정하면 된다.


긴 인생의 시간 속에서 나는 고작 며칠 방황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