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가 많아 오히려 좋았던 여행

by 스틸노트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여행이자, 세 살배기 아이와의 첫 여행을 계획했다. 사실 계획이라기보다는 가평의 독채 펜션을 예약한 다음, 근처의 가 볼 만한 곳을 몇 군데 기록해 두고서 그날이 왔을 뿐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여행이 주는 피로감과 고생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의 여행 스타일은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끼는 방향으로 굳어진 것 같다. 이를테면 출발하기 전날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동선을 정하고, 출발예상시간이 나오면 아이가 일어나기 전 후다닥 짐을 싼다. 하루의 일정이 끝난 저녁, 잠자리에 누워 다음날 일정을 짜는 식이다. 계획은 굵직하게 최소한의 틀만 짠다.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변수가 별처럼 쏟아졌다. 출발하기 전날 밤, 남편 회사 상사 부친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들렸다.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밤은 늦었고, 거리도 먼 데다, 우린 여행을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다. 평소 남편을 잘 챙겨주시던 분이라 직접 얼굴 보고 위로를 전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장례식장과 여행지가 가는 방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들렀다 가기로 했다.


출발한 지 30분쯤 되었을 때, 아이의 외투를 놓고 온 걸 깨달았다. 양손 가득 짐을 챙기다 보니 놓쳤나 보다. 마침 아이의 패딩을 하나 사려던 참이어서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장례식장 근처에 스타필드가 있어 들렀다 가기로 했다. 패딩을 사고, 점심을 먹은 푸드코트 바로 옆에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위글위글> 매장이 보였다. 아이의 애착인형이 같은 브랜드의 곰인형이라, 즉흥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같은 캐릭터의 무드등을 구매했다.


여행보다는 안 가본 동네 구경이 더 흥미로운 우리 부부이기에 가평의 숙소로 향하는 길에 보는 서울 외곽 구경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펑펑. 여행하는 이틀간 비 소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눈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우린 깊은 산속의 언덕에 있는 숙소에 묵어야 했다. 운전을 하던 남편은 걱정이 앞섰지만, 나는 아이처럼 마냥 신이 났다. 눈이 쌓이면 더 운치 좋을 숙소의 풍경이 그려져서였다.


진눈깨비처럼 내리다 녹던 눈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숙소를 800m 앞두고 언덕길에 차가 멈춰 섰다. 겨우 언덕 한편의 공간에 차를 세워 두고서 짐을 들고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방금 쌓인 눈길에 앞장선 남편의 발자국과 캐리어 바퀴 자국을 아이가 뒤따랐다. 차가 미끄러져 사고가 나지 않았고, 걸어서라도 숙소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라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눈이 와서인지 투숙객도 거의 없어 고요한 밤, 줄지어 켜진 전구 아래에서 눈싸움도 했다.


그날 새벽,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40분 거리의 크리스마스 테마로 꾸며진 장소와 양 떼목장 두 군데를 들르는 대신, 숙소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동물원과 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밤사이 눈이 그쳐 아침 해가 눈길을 녹여두길 바라며 잠에 들었다. 체크아웃할 때쯤, 미리 제설작업을 해둔 사장님이 SUV로 언덕 아래의 우리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덕분에 어설프게 녹다가 얼음길이 되어버린 언덕에서 아이와 슬라이딩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동물원에는 입김이 나오는 추운 겨울에도 기세가 대단한 사자와 뱅골호랑이, 사막여우, 미어캣, 알파카, 말, 양 등은 물론 새와 파충류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동물들에게 당근을 주느라 신이 났다. 남편은 사자와 호랑이가 뿜어내는 강력한 기운에 감동했는지 그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제 숙소에 거의 도착하는 길에 발견한 한옥으로 된 카페에 가려다 남양주의 카페로 향했다. 눈길 운전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집과 가까운 곳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가는 길에 진하게 잠든 아이가 충분히 자고 일어날 때까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사이 다시 해가 지고 있었다.


시야가 트인 한강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과감하게 우리는 갈대밭을 지나 한강변까지 걸어갔다. 계단에 앉아 해가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붉은 노을을 가만히 감상했다. 계획 없이 마주한 아름다움 앞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러너들처럼 아이와 달리기를 하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순간이 잊지 못할 우리 셋의 추억으로 남았다. 가득 차고도 넘친 1박 2일 여행이었다.


인생을 자주 여행에 비유하는 것도 이처럼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데서 오는 신선한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출발 전에 꼭 챙겨야 했던 짐을 놓치는 것도, 갑자기 날씨가 확 변하는 것도, 일정 중 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모두 너그럽게 허용해 준다는 것이 여행의 묘미 같다.


여행 중에는 모두가 여유를 만끽하고 마음속 여백에 바람을 초대하머 좋은 기분을 만들어주니까. 아이와 남편과 여행 다니며 그곳에 가봤다는 사실보단 여행의 과정에서 만나는 변수들을 함께 겪고 해결하는 경험을 공유하는 측면에서 이런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