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이 많은 아이와, 부끄러움을 연습하는 밤

by 스틸노트


드디어 미루던 아이의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다. 도서관 회원증 하나로 책을 일곱 권까지 빌릴 수 있다. 나는 다 읽지 못하더라도 일단 관심 가는 책을 일곱 권 가득 빌린 뒤, 차분히 읽으며 책을 골라 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에게 읽힐 책까지 더하려니 일곱 권은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2주 전에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간 김에 도서관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 이름으로 회원증과 카드까지 바로 발급받았다. 대출 한도가 늘어나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지만, 정작 진짜로 놀아주는 시간은 많지 않다. 아이 옆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늘 다음 할 일로 가득 차 잇다. 밥 하기, 남편 퇴근 전에 저녁 차리기, 설거지 같은 일들. 시계만 바라보는 엄마를 아이가 모를 리 없다. 자꾸만 자리를 뜨는 나를 붙잡으며 아이는 말한다.


“이것만 하고 가..”


마음이 약해진 나는 잠시 하려던 일을 멈추고 놀아주다가도 결국 다시 자리를 뜬다. 그래서 잠자리만큼은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하려 애쓴다. 읽던 책을 덮고 함께 잘 준비를 하며 장난을 치고, 오늘 인상 깊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는 잘 시간이 되면 아이가 먼저 대화 좀 나누자고 말한다.


요즘 아이는 부끄러움이 유독 많아졌다. 더 어릴 적부터 낯가림이 심했고, 사람을 대할 때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다. 엘리베이터나 길에서 어른들이 예쁘다며 인사를 건네면, 아이는 곧장 엄마 다리 뒤로 숨어 얼굴을 파묻는다. 어린이집에서도 새로운 보조교사가 반에 들어와 반갑게 말을 걸면, 긴장한 채 담임선생님 옆에 꼭 붙어 있으려 한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에게는 낯선 상대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럴 여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경험들이 쌓여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의 세계에 불청객처럼 들어온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면접을 앞두고 모의면접을 하듯, 충분한 시뮬레이션이 긴장을 낮춰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잠자리에서 책을 몇 권 읽어준 뒤, 아이와 마주 보고 앉았다. 아이가 겪어본 상황 하나를 골라 설명했다.


“만약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아주머니를 만났어. 네가 예쁘다며 인사를 하고 요구르트를 주셨어. 이럴 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는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지 몸을 움츠리며 아무 말도 못 하겠다고 했다.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가 너무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는 대신, 제스처로 인사를 받고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말로 인사하기 어렵다면, 요구르트를 두 손으로 받고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도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어?”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처음 상황으로 돌아가, 내가 이웃 아주머니인 것처럼 가상의 요구르트를 건넸다. 아이는 배운 대로 두 손으로 받으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있는 힘껏 칭찬해 주자 아이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기뻐했다.


같은 시뮬레이션을 반복할수록 아이의 움직임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그 뒤로 어른들이 나이를 물으면 손가락을 펴서 답하기, 언니 오빠들이 인사하면 손을 흔들어 답하기 같은 연습도 이어갔다. 자신감이 붙은 아이는 ’나 그건 할 수 있어!‘라며 먼저 나섰다.


남들이 보기엔 쉬운 일도 이 아이에게는 커다란 산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 눈앞에 놓였던 거대한 산들처럼. ’잘게 쪼개기’는 아이에게도 통했다. 더 작은 퀘스트로 나누고, 가장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해내자 아이는 분명히 달라졌다.


도서관에서 용기와 부끄러움에 관한 그림책을 여러 권 빌려 왔다. 책으로 먼저 경험하게 하고, 집에서 엄마와 여러 번 연습한 뒤, 실제 삶에서 적용해 보는 일.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며 넘지 못할 산은 없을 거라 믿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낯가리는 아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다. 내가 삶의 가이드이자 연습 상대로 곁을 지켜준다면, 아이는 언젠가 스스로 두려움을 넘고 내 곁을 떠나 앞장서 걷게 될 것이다.


그날이, 아주 천천히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