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거대한 산들이 말해주는 것

압도 앞에서 멈췄던 내가 다시 흐르기까지

by 스틸노트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막막한 순간들이 있다. 눈앞에 거대한 산이 여러 개 서 있어, 금방이라도 그 기세에 압도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저 산들을 모두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자신 없음과 무력감에 주저앉지 않으려 두 발을 버티고 서 있을수록 온몸에는 더 큰 힘이 들어간다.


나는 이럴 때 공황이 온 것처럼 뇌가 마비된 느낌을 받는다. 종일 앞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처럼 지끈거리고 어떠한 새로운 생각도 떠올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선택과 판단이 어려워지고 집중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마치 수많은 청중 앞에서 발표를 앞둔 순간처럼 긴장과 압도감에 휩싸인다.


이 감각은 고3 시절 수능을 준비하던 때, 잠시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여러 과목의 성적을 어떻게 동시에 끌어올릴지 고민하며 괴로워하던 시간과도 닮아 있다. 그때의 나는 압도감을 피하기 위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한 과목만 선택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그 결과, 시간을 많이 쏟은 과목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었지만, 끝내 외면한 과목들은 목표한 기준선을 넘기지 못했다.


그때의 후회와 좌절이 떠올라, ‘이번에는 반복하지 말아야지’, ‘이번에는 모든 산을 정복해야지’ 스스로를 다그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써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버거운 일은 잘게 쪼개면 쉬워진다.’ 큰 산을 조각내어 작은 조각 하나부터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빈 노트를 펼쳐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은 키워드를 적어 내려갔다. 거미줄처럼 펼쳐진 목록 가운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에 표시를 했다.


그중 가장 쉬운 것 하나와 가장 굵직한 것 하나를 골라 ‘오늘 꼭 해내면 좋은 일’로 정했다. 쉬운 것을 택한 이유는 멈춰 선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함이었고, 굵직한 것을 고른 이유는 큰 산 하나를 넘겨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마냥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산들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넘으면 반드시 좋은 벽‘으로 보기로 했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넘으면 좋다는데, 그럼 넘어가 봐야지. 그 순간, 막혔던 흐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름을 유지한다는 것은 흘러간다는 감각을 기억하는 일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 혈관이 열려 혈액이 순환하는 감각을 몸은 기억한다. 그 감각을 되살리는 데에는 요가와 달리기가 도움이 된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크게 숨을 들이마셔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 힘을 빼면 비로소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들이 있다. 공기가 어디에서 막히고, 어디에 깊이 머무르는지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막힌 부위로 의도적으로 숨을 보내다 보면 숨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며 빈틈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순환은 유지된다. 한 시간 동안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는 사이 굳어있던 근육은 풀어지고 거칠던 숨은 점차 자연스러워진다.


며칠에 걸쳐 큰 산 하나를 넘겼다. 작은 조각들을 담담히 부수다 보니 어느새 큰 산을 단숨에 넘어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아이의 고열이라는 또 다른 산이 등장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체감한다. 그래도 흘러가는 감각을 기억하는 한 새로 나타난 산도 리드미컬하게, 자연스럽게, 거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이 차오른다.


그 후련함을 남편과 나누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변화 없는 평탄한 삶보다, 다음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가며 성장하고 도약하는 삶이 더 멋진 게 아닐까. 언젠가 삶의 끝에서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때때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선택한 시간이 아무 일 없이 지나 보낸 날들보다 덜 후회로 남지 않을까.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우는 과정이 이제는 제법 재미있기까지 하다. 우리 삶은 가능하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 하고, 선택 앞에 놓인 거대한 산은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폭이 된다.


어쩌면 산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산 앞으로 걸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하고 싶은 마음의 크기만큼 산이 커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기꺼이 발을 딛고 올라가 보는 거다. 산 중턱마다 정복의 깃발을 꽂으며, 끝내 정상을 지나 산을 넘어간다. 오로지 반드시 정복하겠다는 의지와 승리의 깃발을 꽂는 기쁜 상상을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