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정한아 장편소설 <친밀한 이방인>, 문학동네, 2017. (255쪽 분량)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장편소설 <친밀한 이방인>의 주인공은 거짓과 위선으로 사는 여자다. 이름을 이유진, 안나, 이유상으로 바꾸고, 위조증명서를 이용해 가짜 여대생, 음대 교수, 의사라는 직업을 얻는다. 결혼식도 가짜 부모를 앉히고 신랑 측을 속인다. 유미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셨고, 어머니는 청각장애가 있다. 두 분은 고아원에서 만났다. 45세에 늦둥이를 얻은 아버지는 딸 어리광을 받아주며 키웠다. 유미 방에 장난감이 한가득 있는 걸 보고 친구들은 놀랜다. 유미는 구두와 옷을 좋아했다. 아버지에게 S 대학 의상디자인과에 합격했다고 처음으로 거짓말하는 순간 유미의 삶은 꼬인다.
한 번의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처음에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지만, 거짓말이 거듭될수록 둔해진다. 걸리지만 않으면 거짓말한 삶을 진짜처럼 살 수 있다. 때론 S대 학생으로 사업하는 부잣집 딸로 말이다. 유미의 거짓말에 사람들은 숱하게 속는다. 유미는 조건을 부풀려 결혼을 하고, 거짓말이 들통나 이혼을 당하고, 또 다른 곳에서 거짓말을 하고 결혼을 반복한다. 네 번의 결혼과 파혼.
도대체 유미는 어떤 사람일까. 불안과 초조 속에 살면서 거짓말은 마약처럼 끊지 못한다. 독자는 이 부분에 당혹감을 느낀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거짓말한 자신을 반성하거나 뉘우친다. 점점 대범해지는 유미의 행동에 연민을 주기 어려워진다. 위조는 범죄행위다. 거짓서류를 만들어 기관에 제출하고, 신분세탁에 힘쓴다. 거짓말의 끝판왕을 본다.
세상 밖에서 유미는 가짜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 공간은 오로지 '일기장'뿐이다. 현실은 거짓 투성이지만 일기장만큼은 유미로 살아간다. 일기장에 자신의 거짓을 상세히 적고, 진실을 쓴다. 그리고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사라진 유미를 찾는 역할은 화자다. 화자는 소설가이며 유미의 일기장을 보고 자신의 소설을 구상한다. 유미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기억하는 유미를 구체적으로 취재한다. 유미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실체를 허상으로 안다. 유미의 거짓, 위선, 껍데기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화자는 일말의 현상을 본다. 그렇다면 유미를 위선자로 증언하는 사람들은 진실한가. 그렇지 않다. 그들 또한 거짓된 삶을 살아가며 방관하거나 위선자다.
우선 화자부터가 그렇다. 화자는 소설가이며 대학강사로 일한다. 신학대학교수였던 아버지는 위암 말기 4기 진단을 받는다. 화자의 어머니는 이혼을 요청하며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유럽여행을 떠난다.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유럽으로 떠나는 엄마. 화자는 공감이 안 된다. 그렇지만 엄마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식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고,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화자도 작업실에서 남편을 속이고 옛 애인을 만난다. 우리는 조금씩 거짓의 삶을 산다.
유미의 아버지는 무학으로 양복점을 하면서 유미를 키웠다. 아버지도 가족을 속인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야산에 올라가 마리화나를 피운다. 고질적인 마리화나 중독자였다. 유미의 두 번째 남편 임재필은 성형외과 의사다. 유미는 베라 왕의 미카도 실크 드레스를 입고 서울 특급호텔에서 결혼식을 했고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다녀온다. 임재필은 유미를 두고 어린 매춘부를 찾아다닌다. 유미는 이 사실을 묵인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다들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산다.
화자는 난파선이 된 유미를 잠수부가 되어 찾으러 다닌다. 저 밑바닥까지 추락한 유미를 탐사하면서 화자 또한 자신의 민낯을 봤으리라. 알 수 없는 미지의 바다처럼 유미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난파는 결국 부식되고 가라앉았다. 거짓의 속성과 결말은 당연한 듯 보였다. 소설은 많은 인물들과 거짓 투성이로 엮어있다. 가독성 좋고, 구조도 탄탄하다. 다소 개연성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논제는 수두룩하게 나올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유미가 하는 거짓말들에 대해서.
-유미의 거짓말 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거짓말에 대해.
-이유미(이유상)은 왜 일기를 두고 갔을까요?
-유미의 반복된 거짓과 위증,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일들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했을까요?
-그녀가 일기를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화자가 집필하는 방에서 K와 있었던 관계를 남편에게 얘기한 부분에 대해.
-남편이 암 4기 판정을 받자 이혼하자고 하는 어머니 선택에 대해.
-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진이 엄마를 속이고 러시아로 떠나는 여정에 대해.
-윤노인 칠순잔치에서 결혼발표를 하는 부분에 대해.
-윤노인과 유미의 관계에 대해.
-유미의 남편들과 그 이웃에 대해.
-'난파선'이 주는 상징성에 대해.
발췌
-지난 3월, 나는 신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광고를 보았다. '이 책을 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신문 전면에 소설의 한 부분이 실려 있었다. (p.7)
-검은 배경에 하얀 나선이 새겨진 표지는 그대로였다. 다만 그 위에는 '이유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p.13)
-"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위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과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p.14)
-피아노 교사, 대학교수, 심지어 의사로 신분을 바꿔가면서 남자를 셋이나 갈아치우고 인생을 거짓으로 살아가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왔어요. 마지막에 그 여자는 남자로 탈바꿈해서 소설가 행세를 하죠. 그때까지 그 원고를 순수한 허구의 창작물로 읽어가던 저는 희미한 각성이 찾아드는 것을 느꼈어요. (p.19)
-이것은 소설이 될 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쓴 그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글을 쓸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다. 정지되었던 삶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p.29)
-마치 날더러 이걸 읽으라는 듯이 말이에요. 그건 또다른 기만이었을까요, 아니면 일말의 참회였을까요?
-일주일에 두 번, 나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대학에서 교양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명은 '문학적 읽기와 쓰기 훈련'이었는데, 주로 점심 이후 자유로운 오침시간으로 활용되었다. 대놓고 엎드려 자는 무리도 있었다. 학생들은 '읽기'는 물론 '쓰기'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p.24)
-이유상, 이유미, 혹은 또다른 어떤 이름의 그 여자. 음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그 여자는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고, 그 와중에 학생들 다수를 콩코르에 입상시켰다. 그녀는 또한 자격증 없는 의사였고, 또 각기 다른 세 남자의 부인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p.24)
-저는 그 사람의 반복된 거짓과 위증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그 시작과 끝을 알고 싶어요. 단순한 흥미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p.30)
-며칠 뒤, 종이 상자에 담긴 물건들이 도착했다. 이유상이 남겼다는 책, 수첩, 전화번호부, 공문서들, 그리고 여섯 권의 일기장이었다. 가짜 삶을 살았다는 그 여자가 일기를 썼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p.31)
-매주 금요일에는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근처의 야산 기슭으로 기어들어가서 몰래 마리화나를 피웠다.(p.40)
- 남편은 내가 부탁할 때, 간청할 때, 정확한 지령을 전달할 때에만 아이를 돌봐주었다. 그런 식으로는 어떤 파트너십도 생길 수 없었다. 아이는 결국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온종일 작은 아파트에 갇혀 아이를 돌보면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 존재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젊음, 내 자질, 내 영혼, 위대한 것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이라는 구멍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미웠고, 아이가 제 욕구를 채우기 성을 내며 울 때도 조금의 연민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이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짓뭉개버리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어머니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p.102)
-그녀는 다시금 종로의 위조업자를 찾아갔고, 몇 군데 콩쿠르의 입상 기록을 만들었다.(p.111)
-강미리는 한낱 점원이었던 이유미가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입성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p.123)
-이유미가 능숙한 거짓말쟁이였다면, 임재필은 이기적인 방관자였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어떤 위선과 기만을 품고 있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p.130)
-남편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연민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나는 그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선물한 작은 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꿈을 잃고 낙망한 아내에게 선물했던 작은 방. (p.137)
-그녀는 다시금 위조 전문가를 찾아갔다. 몇 년 새 그는 사무실을 두 배로 넓혀 이전했다. 이유미는 가정의학과 졸업증명서와 노인건강학회 회원 인증서를 구매했다. 의학 학위는 가격이 더 높았는데, 이유미는 단골 디스카운트를 적용받았다.(p.141)
-상주 의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실버타운 측에서는 이유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