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곰출판, 2021. (276쪽)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서 방향을 잃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삶의 끈을 놓거나, 다시 끈을 잡는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뉴욕주 태생,1851년생)이라는 한 과학자라는 끈을 찾아 집착했고, 투쟁했다. 더불어 경외했고, 숭배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3000명 가까운 사람이 희생됐다. 데이비드 조던이 수집한 물고기 표본들이 흔들려 바닥에 떨어졌고, 유리병이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 들었던 물고기들이 나뒹굴었다. 조던은 동료와 제자를 동원해 에탄올이 올 때까지 호스로 물고기들에게 물을 뿌렸다.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룰루 밀러는 이 에피소드를 읽고 큰 감명을 받고, 그를 추적하며 흠모한다. 절망 앞에서 체념하지 않고, 나아간 그의 '힘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며. 그녀는 그가 지닌 삶의 에너지를 갈망했다. 이 답을 알아내면 무기력한 자신도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 기대했다.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생화학자로 괴짜였다. 7살 룰루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p.54) 묻자 그는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라며 인생은 "아무 의미는 없어!"란다. 허무주의자 같은 아버지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지만 룰루는 "너는 중요하지 않아"(p.58)라는 말을 듣고 고뇌한다. 인생이 그렇게 의미 없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열심히 사는 것인가. 학교에서 놀림을 당했던 룰루 밀러와 자매들. 그녀들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조던을 추적할수록 의문이 들었고, 베일에 싸인 부도덕이 드러나 혼돈에 휩싸인다. 인생도 혼란스러운데, 데이비드 조던을 존경했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과학자의 눈으로 조던의 인생, 루머, 범죄를 정확하게 보려 애썼다. 데이비드 조던이 음폐했던 진실을 캐려 했고, 결국 그의 업적을 부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p.236)
"우주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그가 사랑하는 물고기를 빼앗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약간의 병적인 만족감을 제외하면, 내게 그것이 중요한 일인가? 조금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표본들을 유리단지에 정리하는 것이 직업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범주로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일일까?"(p.247)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떤 단죄도 받지 않고, 상처하나 입지 않고 세상을 빠져나간 게 이상했다. 우주는 정의 감각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이 문장을 발견한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을 룰루 밀러는 '캐럴 계숙 윤의 경이로운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p.236)을 보고 알았다. 바다 생물은 수많은 미묘한 차이가 있음에도 인류는 그냥 '어류'라고 불렀다. 데이비드 조던을 향한 양가감정과 혼돈에 대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위안이 됐다. 데이비드 조던이 평생을 바친 어류분류가 존재하지 않았다니.
조던의 생을 쫓으며 룰루 밀러는 혼란스러웠던 자기정체성을 찾았다. 조던의 삶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려는 마음이 생겼다. 조던의 생을 보며 지나온 시간을 반추했다. 이제는 그의 아내와 침대에서 뒤척이며 따스함을 느낀다. 작가는 이 순간의 평화로움을 위해 집요하게 걸어왔던 거 아닐까.
발췌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치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p.57)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파괴의 잔해들은 스나이더 교수와 스타크스 교수가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린 덕분에 젖은 상태를 유지했다."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할 가능성이 무척 낮은 출처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출처는 바로 제임스 뵐케가 쓰고 <스탠퍼드 어류학 편람>5권에 실린 <스탠퍼드대학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최근 어류의 모식 표본 카탈로그>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p.114)
데이비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좋은 면을 발견하도록, 그 좋은 면에 귀를 기울이도록 나 자신에게 강요했다. (p.174)
조수웅덩이 틈새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리는 탓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뭘까? 바로 독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추천한 종류는?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묘사했던 위험하고 강력한 물질, 바로 스트리크닌이다.(p.175)
그러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신실한 청교도라 법을 어기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생학적 불임화의 합법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7년 블루밍턴에서 사귄 그의 친구들 몇 명이 인디애나주에서 우생학적 강제 불임화를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 우생학의 대의에 대한 그의 헌신이 어찌나 눈에 띄었던지, 미국양육가협회 우생학위원회는 그에게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열성적으로 요청을 받아들였다. (p.185)
20세기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p.185)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p.227)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자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