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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Sep 03. 2023

[여름밤+낭독여행] <각각의 계절> 진행후기

샛별BOOK연구소


  단편집 <각각의 계절>, 권여선, 문학동네, 2023.


  뜨겁던 여름 한 달. 우리는 8월 내내 단톡방과 ZOOM에 모여 또 하나의 계절을 보냈습니다. 권여선 작가의 단편집 <각각의 계절>을 읽고, 낭독하고, 녹음하고, 공유하고, 줌으로 만나서 토론하고, 발췌와 단상, 필사, 리뷰도 쓰면서 지냈습니다. 인생의  그 많은 계절 중 2023년 8월 권여선 작가와 함께 한 여름을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행복했고, 보람찼고, 즐거웠습니다. 특히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한 단톡방 녹음기록은 신선했습니다. 저는 좋았는데 샘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총 7편의 단편이 들어있어요. 저희가 토론한 단편은 총 네 편입니다. 



[토론한 챕터 목록]


8/9(수) <사슴벌레식 문답>

8/16(수) <실버들 천만사>

8/23(수) <무구>

8/30(수)  <기억의 왈츠> 


<하늘높이 아름답게>,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는 낭독은 했지만 토론은 일정상 할 수 없었습니다. 추후 세 편의 단편들도 토론할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낭독은 일정부분 녹음해서 단톡방에 공유했습니다. 이렇게요~  짧으면 1분 정도, 길면 2분이 걸렸습니다. 낭독하면 새롭게 문장이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네요. 저는 하루 종일 같은 문장을 다른 샘들의 목소리로 여러분 들었더니 문장이 더 외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ㅎㅎ


낭독한 후 단톡방에 공유합니다. 



▮1일차 (8/2 수) 낭독하기 /  <사슴벌레식 문답> 첫 문장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 둘 다 들어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올리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읽는 것 같지도 않더니 잠시 뒤 경애가 대화방을 나갔다는 알림이 떴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모르기도 했다. 나는 부영이 먼저 나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부영은 계속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게 대화방을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가는 최소한의 행위도 하지 않는 방치나 무시, 또는 자신이 초청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망각 같았다. 그렇게 부영은 끝까지 메시지를 읽지 않은 ‘1’의 숫자로 남아 있었다. 올해에도 정원의 추모 모임에 간 사람은 나 혼자였다.(p.9)


필사도 잠깐 해봅니다. 



우리가 10년, 20년이 지나 "그때 낭독하고 토론하고 그랬었지. 라고 추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축복일까요. <각각의 계절>과 이별하려니 아쉽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새로운 가을! 잘 맞으시길 바랍니다. 



<사슴벌레식 문답> 샘들의 발췌 모음입니다.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지 오래인데 말이다.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p.42)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p.28)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p.29)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묻다,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p.39~40)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p.37)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p.28)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p.29)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 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p.42)


밤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기억하는 듯한 겹기억이 탄생한다. 아마 부영도 잠이 안 오던 밤에 정원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신의 현재를 함께 떠올리곤 했을지 모른다. 불면이 만드는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오래된 과거를 향해 하염없이 거슬러올라가다보면 그 끝에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그런 무서운 기억의 원환을 하염없이 더듬더듬 헤매 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 과거를 기억하려 애쓰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도 함께 떠올릴까. 그런 겹기억의 순간을 경애도 견디며 살고 있을까. (p.41)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허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박혀 있었다. (p.29)





<실버들 천만사> 샘들의 발췌 모음입니다. 


채운을 기다릴 겸 반희는 앞마당 벤치에 나가 앉아 담배를 피웠다. 공기는 차고 주위는 어두웠다. 가끔 들리는 새소리, 나뭇가지가 부딪치거나 꺾이는 소리, 휙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외에는 완전무결한 적막이었다. 소리가 들이지 않으니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아주 먼 곳에서 오옹 오옹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채운이 오는 소리 같았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숲의 적막 속에 앉아 있는 늙은 자신만큼이나 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오는 젊은 채운의 존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곧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이 어두운 숲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p.68)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p.75)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p.79)


채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에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 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반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p.73)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p.50)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아무것도 아니야, 채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p.79)


 반희는 담배를 끄고 두 손을 맞잡았다. 바람이 휙 지나가면서 진한 흙내와 풀 향이 스쳤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이 숲은, 이 벤치는 참 이상도 하지. 그러면서 반희는 어제저녁과 똑같이,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p.79)


10월에 시작하는 [가을밤+ 낭독여행] 안내입니다. ^^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blog.naver.com/bhhmother/223194503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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