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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Sep 01. 2023

권여선 <각각의 계절>중 '기억의 왈츠' BOOK리뷰

샛별BOOK연구소

 단편집 <각각의 계절> 중 '기억의 왈츠', 권여선, 문학동네, 2023.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까맣게 잊었던 기억의 편린이 불쑥 떠올랐을 때가 있다. 권여선의 <기억의 왈츠>도 이런 소재를 갖고 엮은 단편이다. 화자는 정년퇴직을 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이다. 코로나로 외출이 적은 화자는 어느 날 동생과 제부와 차를 타고 국숫집에 갔다가 사십 년 전의 에피소드를 또렷하게 기억하며 대학원생 시절로 들어간다.

 

  화자는 그때 고작 스물네 살일 뿐인데 세상 다 산 것처럼 행동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모르겠다. 그때 왜 삶을 끝내려고 했을까, 이유도 없이 자신을 괴롭혔고,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 행위를 되짚어본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지 못했고, 그토록 무심했는지 말이다. 당시 화자는 청춘도 싫고, 사랑도 싫고, 가족도 싫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p.211)

  생에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화자는 술에 취해 다녔고, '이상한 불안과 충동에 시달렸다'(p.210). 그건 삶의 끈을 놓고 싶다는 슬픈 감정으로 치달아 결국 '죽어, 버릴까.... 죽어, 버릴까'(p.238)로 마무리된다. 시대는 불안했고, 사는 건 낭비였다. 그래도 화자는 구선배, 승희, 경서와 함께 자주 술을 마셨고, 국수 잘하는 집을 찾아갔다. 함께 노래도 불렀다. 경서가 '내 머릿속으로 차돌멩이로 슬픈 노래 부르지 마라'(p.215)를 부르자 화자도 이어 '한 사람이 죽으려 태어난 것 같다 산산이 부서져라....(p.216)를 부른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날 왜 그런 노래들만 부르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화자와 경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심한 화자에 비해 경서는 '정교해지기를 바라'(p.217)는 사람이었다. 경서는 '모든 텍스트를 정교하게 읽고 분석하는 걸 즐기는 사람'(p.217)이었다. 화자가 어두운색을 갖고 있었다면 경서는 '경쾌한 반짝임'(p.218)을 뿜어냈다. 경서의 감각은 화자를 향해 있었고 화자는 이런 경서가 두려웠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p.219). 그녀는 아무리 경서를 읽으려 해도 읽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움텄다. 이미 둘은 대화부터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경서는 중학교 때부터 썼던 10년 치 일기를 화자에 보냈다. 자신을 다 보여줄 테니 읽어달라고. 

  그러나 화자는 지금 그 누구도 읽어낼 욕망도, 의지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괜한 심보를 부려본다. 사람을 건드려본다고 할까. 5월에 수박을 사달라고 조르는 '영악한 술수'(p.231). 술에 취해 혀를 짧게 하고 수박을 쭈박이라고 발음하며, 먹고 싶지도 않은 수박을 사달라고 울면서까지 연기하는 그 악착같은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드디어 손에 넣은 수박을 먹었는지 버렸는지도 모르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p.233) 무엇이었을까.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그 스물넷에 그런 추악함을 보였는지 사십 년이 지나 생각하니 '자신이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p.204) 

  경서의 일기를 받은 화자는 수박처럼 무심하게 방구석에 굴린다. 경서는 자신의 일기를 어떤 심정으로 화자에게 보냈을까... 자신의 내면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마음이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화자다. 자신이 두려워하며 발사한 일기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화자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경서. 화자는 이런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차리지도 않는다. 경서 또한 자신의 일기를 그녀에게 발사하고 연민과 공감의 반응을 얻고자 했지만 그 행위는 화자의 마음에서 불발된다.  

지나고 보니 경서에게 받은 건 수박, 일기, 그리고 편지가 있었다. 경서는 편지에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둘이 함께 왈츠의 스텝을 밟는 날.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그날 우리 숲속 식당에 가자.'(p.240)

라고 적었다. 경서는 이 편지를 4년 후에 뜯어본다. 편지는 1월 23일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해 양력 1월 23일은 음력으로 12월 3일이니 1, 2, 3이 스텝을 밟듯 둘이 함께 왈츠를 추는 날이라며 너와 내가 만나 숲속 식당에 가자고 썼다. 1 2 3도 운명처럼 만나는 날. 경서와 화자는 왈츠의 스텝을 밟지도 못했다.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화자는 자신의 이런 무심함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진저리 나게 무섭다. 당시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와 하루걸러 싸우고 오빠에게 맞아 병원과 경찰서를 오고 갔다고 치더라도 그건 경서에게 변명이 될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숲속 식당에 와서 다시 40년 전을 소환한 화자는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고 생각한다. 그때 추지 못한 왈츠를 언젠가는 출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회를 걸어본다. 또다시 1월 23일을 기다리고, 음력 12월 3일이 만나는 날 경서와 화자는 왈츠의 스텝을 밟게 될 것이다. 차창 밖으로 흘러 흘러 가는 강물처럼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을 옆에서 쳐다보는 관객이었다면 이젠 '기억의 왈츠'를 추는 주인공이 되리라고. 그 기억의 왈츠가 불편해도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화자는 스텝을 하나 밟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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