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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Sep 21. 2023

김금희 에세이 <식물적 낙관> 필사노트 소개

샛별BOOK연구소 

에세이 <식물적 낙관>, 김금희, 문학동네, 2023.(259쪽 분량)

-소설가 김금희를 스쳐간 식물과 사람들, 그후 화분처럼 남은 이야기-

[낭독&필사클럽] 9기에서 <식물적 낙관>을 필사하고 있는데요, 매일 필사와 그림이 올라오는 노트가 있어 소개합니다. 볼 때마다 황홀해서 흠뻑 취하네요~~ 열심히 쓰고, 식물까지 그려주신 아티스트 성O 샘 감사합니다. 



▮1부 여름 정원에서 만나면 ‘식물적 낙관’  


행위가 영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양이 안 멋지더라도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만 하면 일단 나는 흐뭇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가드닝에 있어서는 꽤 낙관주의자인 셈이다. 적어도 식물을 대할 때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어느 면에서는 무덤덤해진다. 정확히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 든다. 쓸 때나 읽을 때나 심지어 스스로 펼쳐나가고 있는 생각의 연쇄 속에서도 정말 그런가, 옳은가, 착시가 아닌가를 묻는데 식물들 앞에서는 그런 날카로운 반문을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질서로 움직이는 완전한 세계가 있으니까. 나의 몫으로 남는 건 의혹이나 불신이 아니라 경탄과 그를 통한 일종의 발심(發心)이다. (p.28)  



▮1부 여름 정원에서 만나면 ‘헤세와 울프의 여름 정원’


 헤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여름에 필요한 건 고독을 지우기 위한 노력보다 헤세가 「여름 편지」라는 산문에 남긴 이런 제안들의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열흘 동안 화병에 꽂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 관찰하기. 그 잎의 뒷면도 세세히 들여다보기.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장미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응시하기. 그렇게 해서 삶의 무상함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하여 삶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고독과 여름과 정원과 관찰. 이제 무르익고 있는 계절에 이 말들을 자주 떠올릴 것 같다.(p.56) 



▮1부 여름 정원에서 만나면 ‘휴가와 발코니’


 그날 엄마는 국수에 넣을 고명까지 다 챙겨와 잔치국수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음식들의 이름을 남몰래 좋아하고 음미할 때가 있는데 ‘잔치국수’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였다. 검박하고 정겹고 활기차고 가볍고 순수한 공동체가 생각나는 말. 엄마와 나는 애호박을 많이 넣은 칼칼한 국수를 나눠 먹으면서 정말 맛있다, 서로 맞장구쳤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발코니와 각방에 놓인 식물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 





언젠가부터 우리는 나중에 꼭 한동네에 살자고 다짐해왔다. 이십대 이후로는 한 번도 같은 도시에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되면 ‘비 오는 날 부친 부침개가 식지 않을 거리’에 가까이 살자고. 우중雨中에는 부침개지, 하는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다. 처음에는 낭만적이고 재미있다고만 여겼던 그 말은 이제 떠올리면 가장 힘이 되는 일종의 노후 설계가 되었다. 거기다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들과 금전수와 친구네 집으로 잘 옮겨가 무럭무럭 자란 베멜하까지 있다면 더욱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보살펴야 할 것들을 보살피며 나이 들어간 우리는 낮술보다도 이른 ‘아침 술’을 즐기는 참 괜찮은 할머니들이 돼 있을 것이다. (p.117)




그날도 그런 생각의 연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발코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지나치게 나 자신을 넣어서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식물을 이 공간으로 오게 한 것이 나라는 이유로 발코니에서 겪는 모든 실패와 성공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관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의 관여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와는 다른, 부자연스럽고 맹목적인 ‘연연함’처럼도 느껴졌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우리는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그런 공백 때문에 어떤 식물은 자라고 어떤 식물은 성장을 멈춘다. 그러니 빛, 바람, 물이라는 답은 가드닝의 수많은 실패자들을 북돋우고 자책에서 구해내는 치유의 말일지도 몰랐다. (p.110)



물을 주고 오는 길에 또다른 화분이 눈에 띄면 싱크대로 데려와서 샤워를 시킨다. 그러고 도로 화분 진열대에 가져다놓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므로 일단 싱크대에 둔 채 그대로 요리를 시작한다. 간단한 볶음밥이나 계란 토스트가 내가 즐겨 만들어 먹는 아침 메뉴다. 그렇다보니 상황에 따라 화분에 기름이 튀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재료들과 화분들이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가장 자연스럽고 흔한 우리집 풍경이기도 하다. 주방 개수대는 물을 흠뻑 맞은 뒤 그 물이 다 흘러나올 때까지 식물이 대기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고 동시에 인간인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하는 공간이니까. (p.82)



우리는 가만히 마주앉아 각자의 잔에 막걸리를 더 따랐고 묵묵히 건배를 한 다음 서로에게 별다른 위로를 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 발코니와 거실에서 몇 해를 함께 보내온 식물들이 그런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기 불행을 스스로 관리하게 된, 한때는 너무 작은 아이였던 어른들을. (p.123)

 

 

어려서 우리집은 야자나무 화분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야자나무를 왜 기르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는데 초등학생이던 내 키만했고 가지가 사방으로 좍좍 벌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반짝반짝거리는 비닐 장식과 솜과 전구를 야자나무에 걸었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야자와 크리스마스라니, 불협화음 같은 장면이지만 그 앞에 선 나와 언니의 표정은 성탄을 기뻐하는 것처럼 밝다. 케이크가 놓인 사진도 있는데 그런 해에는 더 근사한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것이다. (p.134)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뭔가를 들여와 자기 공간을 채우는 사람, 쓰임이 다한 줄 알면서도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기에 도저히 ‘폐기’ 할 수가 없는 사람.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단어가 바로 ‘호더hoarder’다. 물론 이 단어에는 병리적이고 집착적인 뜻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요즘 세상에 넓은 의미에서 호더 스펙트럼에 들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p.143) 


어디 식물 기르기만 그럴까.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는 세상 어느 관계보다 안전하면서 대가 없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사이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수치가 없고 평가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식물과 금붕어와 달팽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한없이 밝았던 우리 얼굴도 쓰는 일로 대화 주제가 넘어가자 다시 어두워졌다. (p.160)


식물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좋은 마음도 그런 안도였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식물들이 피고 지는 숱한 반복을 하며 가르쳐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경탄이나 미적 수사들이 아니라 공기와 물, 빛으로 만들어낸 부드럽고 단순한 형태의 삶의 지속이었다. 그런 식물의 녹록함이 우리에게 지혜로서 머물기를, 녹록지 않은 순간에도 고개를 돌려 나무 한 그루, 잎 한 장에 시선을 맞출 수 있는 용기가 새해에는 마음속 포토에 늘 담겨 있기를 바랐다. (p.173)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그대로인 것들이 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가지를 크게 흔들었다가 다시 바로 서는 나무들처럼. 다행히 내 곁에 그렇게 남아준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큰 좌절에 빠져 있든, 얼마나 아프게 실패했든. 그렇게 선선히 있어주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만나면 실패에 대한 감각 자체가 누그러지고, 새날을 향한 기대감이 찾아온다. 그리고 넘어질 일이 생기더라도, 기우뚱한 상태로도 그전보다는 삶의 무게를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중력을 이기고 서 있는 식물들처럼, 꽃이 아닌 잎이라도 뿌듯하게 밀어올려 찬탄을 만들어내고 마는 부겐빌레아처럼. (p.167)



차라리 꽃대를 자를까도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일반적인 형태로 다시 자라지 않을까. 가위를 들 일이 있을 때마다 앞에서 고민했지만 끝내 자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겨울을 보내며 나 역시 여러 번 생각의 겹을 벗었고, 그 중에는 지나간 시절에 감정적 서사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있었다. 그건 잊는 것과는 다르고 동일한 감정적 반응을 하면서 그 상처에 계속 갇히는 것과도 달랐다. 더이상 나를 약자로 여겨 연민하지 않는 것. 위기를 맞아 뒤틀렸던 나를 이해하는 것. 내가 원하던 형태와 달랐다며 어느 시절을 다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p.180)



굼벵이를 실제로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둑한 발코니와 흰 꽃을 무성하게 단 철쭉, 그 철쭉의 발치에서 희고 희게 빛나는 굼벵이들. 나는 분갈이를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갈등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적요로운 풍경에 마음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아직 기관의 분화가 시작되기 전 최소한의 형태만을 갖추고 철쭉나무 뿌리 부근에서 계속되고 있는 굼벵이들의 깊은 잠이, 그 시간들이, 내 일상에 봄밤의 환한 장막을 드리워준 기분이었다. (p.186)


이사 준비는 결국 나 사는 모양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당장의 불편을 참지 못해 사들였던 각종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왔고 그건 불안과 걱정이 많은 나 자신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했다. (...) 그렇게 나의 낭비와 허영과 방만함을 탓하며 물건의 홍수 속에서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할까. 진을 빼며 하루를 보낸 끝에 그런 자괴감이 들 때면 발코니 식물들을 지켜봤다. 흙속에 조용히 발을 묻은 채 식물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을 보내고 있었다. (p.199)


 


<식물적 낙관> 필사 프로그램


https://blog.naver.com/bhhmother/22315916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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