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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Nov 29. 2023

최은영<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몫>리뷰

샛별BOOK연구소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중에서 <몫>, 최은영, 문학동네, 2023. 


<몫> 리뷰 


   새내기 대학생이라면 힘차게 캠퍼스를 누비며 지낼 때 <몫>에 나온 주인공은 글쓰기와 여성문제에 천착한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이라는 찬란한 시절에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을 보면서 당황한다. 소설은 2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해진을 '당신'이라고 칭하고 있다. 해진은 학보사 동아리 수습위원으로 발탁됐고, 'A 여자대학교에서 집단 폭력, 일부 학생들의 문제인가'(p.51)에 대한 기사를 날렵하게 쓴 선배 정윤에게 반한다. 정윤은 수습 세미나의 간사이자 사회학과 2학년 선배였다. 


  해진(어문학과)과 함께 수습위원으로 들어온 동갑내기 희영(사회학과). 희영의 글은 존재감이 상당했다. 글에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지력'(p.59)이 보였다. 해진은 희영의 글을 부러워하지도 못하고 머나먼 재능으로 동경한다. 그래서인지 해진은 희영의 글쓰기 재능을 알았으면서 그것에 대해 희영에게 한 번도 말해주지 못했다. 해진이 못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반면, 희영은 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었다. 선배 정윤이 해진의 글에 대한 지적이 상당해 그 영향도 받았으리라. 해진은 자기 확신이 없을뿐더러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p.64)을 안고 있었다. 아마도 희영은 자신의 글과 삶을 동일시했던 거 같다. 글은 곧 행동이고, 행동하지 못하는 글은 가식이라고 봤을까.   


  <몫>은 여성 문제를 등장시킨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여성문제를 짧은 단편 안에 열거한다. 최은영 작가는 여성문제를 깊숙히 들어가진 않겠지만 다 보여주고 싶다, 여성문제가 한 특정 여성에게 치우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시도였을까. 교지에 실을 기사를 위해 회의하는 과정에서 'A 여자대학교에서 집단 폭력'(p.51), 'B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p.56), '매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p.65), '미군에게 살해당한 어느 기지촌 여성의 오 주기 추모 집회'(p.69), '어린 죽음들'(p.82)에 관련된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건들을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 


-소설에 등장하는 관련 사건들- (추측)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화여대 축제 난입 사건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사건- 1993년 최초로 제기된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소송.

*매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1997.5.21. 정오.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추진 범국민 운동본구'에서 개최

*미군에게 살해. 윤금이 피살사건 -1992.10.28. 

*2002년 미군 장갑차 압사한 미순이 효순이 사건. 


  여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단단하지 않을 때, 문제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자 여성문제는 공적 장소로 올라왔고, 사람들은 인권을 앞세워 연대했고, 시위했고, 싸웠다. 여성들의 참혹한 상황을 대학생들은 글로 밝히고 싶어 분투했다. 그러나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 회의하는 과정에서 서로는 갈등을 겪는다. 복학생 용욱의 목소리는 마치 남성을 대변하듯 힘이 있었고 그 힘에 굴복하고 마는 정윤을 볼 때마다 희영은 실망했다. 정윤이 용욱과 사귀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급변하는 태도는 당황스러웠다. 총명했던 불의는 사랑 앞에 꺾였고, 용욱의 생각(남성의 시선)으로 흡수되어 가는 정윤의 발언들을 보면서 더 이상 존경했던 선배가 아니었다. 정윤을 통해 연애와 결혼으로 변해가는 여성의 한계를 보게 된다. 교지를 편집하고 출간하면서 정윤, 희영, 해진의 관계는 점점 벌어진다. 


  희영은 왜 정윤을 보지 않기로 했을까. 정윤은 희영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희영은 답장하지 않는다. 정윤과 희영의 어긋난 관계는 지켜보는 해진. 글과 삶을 일치시키고 싶던 희영은 자신이 봐버린 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희영은 기지촌에서 활동가의 삶을 살기로. 해진은 희영이가 기지촌에서 식단을 짜고, 언니들의 아이들을 맡아 봐주고, 쉼터의 세탁기가 고장나 고쳤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네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사회운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p.79)라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희영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게 못내 안타까웠던 해진이다. 희영은 반문한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p.79) 아마도 희영의 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정윤과 용욱이었으리라. 


  해진이 우려했던 대로 희영의 장점들이 때론 해가 되는 재능이었을까. 희영은 '명확한 주장과 그를 받쳐주는 논리적인 근거로 짜인 단단한 글'(p.67)을 쓸 줄 아는 친구였다. 사회구조의 잔인함을 온몸으로 느낄 줄 알았다. 그렇지만 기지촌에서 3년을 일하고 희영은 고립감을 느꼈고, 이후 식품회사 총무과로 옮긴다. 희영의 글쓰기는 멈췄다. 그러나 희영은 기지촌에서 활동가로 일할 때 가장 순수했고, 편안했고, 빛났다. 글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간 행동. 글은 그러라고 쓰는 것 아닌가. 행동하지 않는 가슴은 더 이상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해진, 정윤, 희영, 해진, 용욱-을 통해 글과 삶의 거리를 보게 된다. 누구는 글과 갈등했고, 누구는 도망치고, 누구는 맞서고, 누구는 무시했다.  가장 재능이 없었던 해진은 졸업반이 될 때까지 그 학보사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2년 동안 함께 했던 그들과의 시간들은 해진을 변화시켰다. 나약했던 글이 힘 있는 글로 변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슈를 다르면서 성격도 글도 운명도 바뀌었다. 희영은 글이라는 게 대단한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해진은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p.75)에 고무됐다.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다. 글에도 그만큼의 '몫'이 있을 것이다. 글은 어떤 몫을 다하며 써야할까. 그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 글이란 무엇일까. 여성이란 무엇일까. 오늘도 글 앞에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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