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안녕의 의식> 미야베 미유키 소설집 중 ‘성흔’, 비체.(255쪽부터~344쪽까지) 총 447쪽
단편의 장점은 '압축'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길게 늘여 쓸 수 있지만 압축의 묘를 발휘해 독자에게 상상을 펼치게 만든다. 이 작품도 그랬다. 태초에 신이 있었으니 그는 정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단편 같았다. 소년, 소년의 아버지, 전문조사원이 펼쳐지는 질문과 대답, 관찰은 얽히고설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결국 <성흔>은 어른의 폭력과 무능을 고발하고 있는데, 이에 희생되는 건 자녀들이다. 주인공 소년도 부모살해라는 범죄를 저질렀고, 악인이 되었다. 그는 8년 동안 벌을 받고 회개한다. 그러나 소년은 또 다른 얼굴로 세상에 돌아다녔다.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소년 A는 신적인 존재였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걸 소년 A는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그를 추앙했다. <성흔>의 내용이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3월 말의 어느 오후 '센카와 조사 사무소'로 후드 달린 회색 우비를 입고 들어온다. 회사 대표 센카와 씨(여성)는 손님을 맞는다. 손님은 하시모토 씨에게 이곳을 소개받았다고 전하며 앉는다. 화자(센카와)는 반백의 다크서클의 남자를 관찰한다. 전문조사원의 눈은 탐정과 비슷했다. 남자는 데라시마라는 일식가게를 한다며 자신의 이름인 데라시마 고지로를 말해준다. 남자는 작은 일식 가게를 맡고 있고 딸부부가 돕고 있다. 팔 개월 된 외손자 미하루가 있다.
센카와는 어린이 전문 조사원이다. 학교와 가정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조사원이라 어린이들의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데라시마는 조사원에게 열서너 살 쯤으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 사진을 보여준다. 소년의 이름은 가즈미. 십이 년 전 '소년 A'로 통했던 인물이다.
데라시마는 "부모를 죽이고, 담임선생도 죽이려고 교실을 점거했죠. 이래도 생각나시는 게 없나요?"묻지만 화자는 대답하지 않고 사진만 바라본다. 화자는 그 소년의 사건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모른척한다. '십이 년 전 4월 어느 아침, 사이타마 시내 자택에서 잠들어 있던 친엄마와 내연의 남자를 군용 칼로 살해하고, 사체의 머리를 절단한 다음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해, 여성 담임교사에게도 같은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히고 인질로 잡은 채, 출동한 경찰과 두 시간 이상 대치했던 열네 살 소년을'(p.266)
데라시마는 가즈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시바노 나오코와 결혼하고 몇 년 만에 이혼했다. 친권은 나오코가 가져갔다. 이십칠 년 전 롯폰기 일식집에 일하면서 시바노 나오코를 알게 되었고 데라시마는 스물한 살, 나오코는 스물여덟 살로 같은 식당 직원이었다. 속도위반으로 결혼하려고 했는데 외삼촌이 나오코를 뒷조사해 본다. 나오코는 한 번 이혼했고 열여덟에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나오코의 어머니가 키운다. 나오코는 파친코 중독이었고 씀씀이 헤프고 남의 돈을 구별 못하고 썼다. 나오코는 남자가 있었는데 카시와자키 노리오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는 불법 사채업자 주변에서 빚 독촉 일을 하고 살았다. 한물가버린 건달이었다. 데라시마와 나오코와 헤어지면서 양육비로 삼백만 엔을 주고 그는 일 년이 지나 재혼했다. 상대는 고향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엄마와 사는 가즈미는 이후 폭행에 시달린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끼자 엄마와 그의 남자친구를 살해하고 담임교사를 인질로 잡았다. 가즈미는 담임교사에게 의지했지만 이십 대 여성으로 교직 경험이 많지 않았고 그녀는 가즈미에게 도움이 못 되었다. 학교에는 전담 상담교사도 없었다. 가즈미의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이트가 개설된다.
데무루라는 사람은 '제물의 어린 양'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해 안심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한다. 이 사이트를 개설하고 운영하는데 사이트 안에 교주가 등장한다. '내 이름은 유다스 마카바이우스' 히브리어로 '철퇴의 유다'라는 뜻이다. 즉, 메시아라는 의미를 지녔다. 교주가 누구인지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운 책이다.
센카와 조사사무소에 근무하는 센카와 씨와 의뢰인 데라시마 씨는 [제물의 어린 양]이라는 사이트를 언급한다. 여기에 올라온 ‘가정내 살인사건’을 두고 검은 어린 양들이 반응을 보인다. 철퇴의 유다는 이 여중생 사건을 검은 메시아가 한 일로 지정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어린 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린 양들에게는 모든 사건이 철퇴의 유다가 한 일이어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센카와 씨는 시바노 가즈미(28세)를 만난다. 성인이 된 가즈미는 선해 보였다. 센카와 씨는 자신이 바로 철퇴의 유다며 ‘유다스 마카바이우스’(p.330)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센카와는 사이트에 들어가 ‘철퇴의 유다’를 자칭하며 활동했다. 그녀는 검은 메시아가 나타나 정의를 실현해 준다는 스토리를 남겼는데 시바노 가즈미가 1월 차량충돌 사고에서 검은 메시아를 보았다고 했다. 센카와 씨는 “한편으로는 그저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도 살 만하구나. 우연이 정의를 집행하는 일도 있구나 하고.”(p.337)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시바노 가즈미는 그다음 날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가즈미는 철퇴의 유다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실체가 되었고, 실체는 증명됐다. 놀라운 일이다. 우연이 정의를 집행하고 있다고 믿는 센카와이다. 그래도 더 이상 살인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가즈미. 둘의 대결은 어떻게 끝날까. 미미 여사의 SF소설은 따라가기 힘들다. 부모의 역할을 모르는 어른들. 핍박받은 자녀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고 토론한 단편이다. 점수는 후하게 4.0을 줬다.
현대단편토론 샘들 1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발췌
-“저 집에서 엄마를 살해한 소녀는 알아주는 문제아였어요.” 한층 더 핏기를 잃어가는 시바노 가즈미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다. “몇 번이나 경찰 지도를 받았고, 정학 처분을 받은 적도 있어요. 공립학교에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정학까지는 안 시킵니다.” 시바노 가즈미가 페이지를 넘겨 모친의 사체 검안서를 읽었다. “거기 적혀 있죠? 모친의 몸에 일상적으로 구타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상과 골절에서 회복한 흔적도 있다. 저 문 너머에서 학대받은 건 딸이 아니라 엄마였어요. 딸의 문제 행동을 어떻게든 멈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엄마 쪽이었다고요.” 이 사건은 검은 메시아가 하신 일이 아니다. “철퇴의 유다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린 양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 사건을 지목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검은 어린 양들은 멋대로 소란을 떨고, 이 사건도 그 분이 하신 일이 틀림없다고 떠받든다. (p.32)
'유다의 주장은 단순한 선악 이원론으로, 현 세계는 악마에 지배당했고 철저히 썩었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신이 지상에 강림해 악마의 군대와 마지막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는 천년왕국을 지상에 건설한다. 그곳에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신의 군대에서 용맹하게 싸운 전사들, 한때는 악마와 그 부하들에게 박해받고 고통당하다가 구제된 희생자들뿐이다......(p.300)
철퇴의 유다는 그 가운데 하나를 들어 어린 양들에게 고한다. "이것은 검은 메시아가 하신 일이다." 그거면 된다. 유다가 한번 말하면 아무 근거나 증거도 필요치 않다. 불행하지만 흔해빠진 가정 내 살인 사건, 건설 현장의 사고, 어느 주방에서 벌어진 강도 살인 사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진 자살이나 해난 사고, 뭐라도 좋다. 거기 악마의 부하와 박해받은 이가 있고, 그를 구하고자 검은 메시아가 철퇴를 내려친 증표가 된다. 말하자면 틀림없는 '성전'이란 것이다.(p.303)
학내 집단 따돌림 실태를 조사한들, 학교가 덮으려 들면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중략) 정의 따위는 그곳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무사 안일주의뿐. 사악함이 지상을 활보했다. 정의의 가치는 먼지보다 가벼웠다.(p.333)
-가정 내 살인사건이었다. 도내 공공주택에 사는 중2 소녀가 엄마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싱글맘과 딸, 두 식구였는데, 자신의 생활과 교우 관계에 일일이 간섭하는 엄마가 귀찮았다. 엄마만 없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고 소녀는 살해 동기를 밝혔다. (p.317)
-철퇴의 유다는 이 사건을 ‘검은 메시아가 하신 일’로 지정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어린 양들에게서 반응이 일어났다.
‘이것도 그분이 하신 일 아냐?’ ‘검은 메시아가 하신 일을 우리가 제대로 구별해내는지, 시험 하시는 거 아닐까?’ ‘그러게 이 여자애는 인생을 엄마한테 지배당한 거잖아? 노예처럼 묶여 있었다고. 나랑 똑같네.’ 그분이 하신 일이다. 그분이 하신 일이다, 그분이 하신 일이다! 수군거림이 사이트상에 퍼져 나간다. 나는 그것을 지켜 봤다. 시바노 가즈미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p.317)
-오직 자신들만 진실을 알고, 자신들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왠지 몰라도 결국 그런 방향으로 가버리거든. 그렇다, 이것도 그 ‘방향’의 하나다. 유다가 침묵하거나 말거나, 이토록 화려한 요소를 지닌 사건을 어린 양들이 그냥 둘 리 없다. 그릇된 믿음, 분별없는 믿음은 어느 단계부턴가 자립한 생물이 된다.(p.318)
-‘신이에요’라고 나는 말했다. “복수의 신, 정의의 신,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아요. 박해받는 어린 양들을 구하고 사악한 자를 벌하는 분. 철퇴의 유다가 그토록 도래하기를 기다렸던 존재.”(p.330)
-어린 양들의 목소리가 메시아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땅히 메시아기 되었어.” 그리고 나는 예언자가 되었다. “당신이 거기서 본 것은 신이에요.” 당신이 낳은 신, 하고 나는 말했다.(p.338)
그는 아버지에게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 슬퍼하지 마.
나는 그것을 봤어. 부정할 수 없어. 그 괴물을 봤어. 환각 같은 게 아니었어. 그로부터 또 한 건, 가정 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현장에 찾아갔다.
-거기서도 봤어. 역시 그걸 봤어.
검은 어린 양이 있는 곳을 찾아온 신을 봤다고, 시바노 가즈미는 아버지에게 글을 남겼다.
그분이 하신 일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건 나야. 그래서 결심했어. 역시 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만 해. 죽으면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어. 이 육체를 버리면 그것에게로 갈 수 있어.
-내가 그것이 되면, 그것은 분명 모두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거야. 그것이 나니까. 내 일부이자 내 전부니까. 내 죄고 내 정의니까.
-그러면 아버지, 다 함께 그것을 멈출 수 있어. 그것이 그분이 하신 일을 계속하기 전에. (p.341)
-제 앞으로 보험을 들고 저를 죽일 의논을 하고 있었어요. 몰래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몇 번 들었습니다. (p.281)
사건 후 가택 수색 때 그들이 살았던 빌라에서 생명보험과 상해보험 팸플릿이 대량 발견되었다. (p.282)
-역 플랫폼에서는 끝 쪽에 서지 않았다. 셋이 함께 외출하면 차도 쪽으로 걷지 않았다. 언제나 주의했다고, 열네 살 소년은 증언했다.(p.283)
소년A 즉 시바노 가즈미 사건은 어떤 사이트에 닉네임 '데루무'라는 인물이 이런 문장을 남겼다.
'사이타마 교실 점거 소년A가 심사원에서 자살했다고 함'(p.294)
엄연한 오보이자 가짜뉴스지만, 글을 올린 인물은 '확실한 정보원에게 들었다'고 주장하며 물러나지 않았다.(p.295)
'요컨대 모조리 '날조'였다. 하지만 일단 '보도'로 세상에 나온 정보는 특히나 오늘날 같은 인터넷 사회에서 완전히 지워져 사라지지 않는다. 닉네임 '데루무'는 어딘가에 남은 그것을 접촉하고 그대로 믿었다는 말이다. (p.297)
샘들이 뽑은 발췌
“당신은 마땅히 메시아가 되었어.” 그리고 나는 예언자가 되었다.
“당신이 거기서 본 것은 신이에요.” 당신이 낳은 신, 하고 나는 말했다.(중략) “말씀이 신을 탄생시키는 일고 가능해”(p.338) (중략) 신이 죽을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신이 없는 세계에 인간이 신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언어라는 정보로 상징되는 세계에, 정보에 의해 창조된 신을.(p.339)
요 오년동안, 멤버가 다소 늘기도 줄기도 하고,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가라앉기도 하는 부침을 되풀이하면서도 현재는 어린 양들이 자립적 공상을 ‘교의’로 신봉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소년A의 자살도 사후에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부활해서 세상에 돌아왔다는 설도, 그들에게는 이미 사실이다. 그 사실 위에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새기고 있었다.(P383)
“이것은 검은 메시아가 한 일이다.”그거면 된다. 유다가 한번 말하면 아무 근거나 증거도 필요치 않다. (중략) 거기 악마의 부하와 박해받은 이가 있고, 그를 구하고자 검은 메시아가 철퇴를 내리친 증표가 된다. 말하자면 틀림없는 ‘성전’이란 것이다.(P.383)
‘믿으면 나도 언젠가 구원 받는다.’
‘언젠가 내게도 검은 메시아가 나를 찾아오신다. 나를 구해주신다.’(P.384)
“그 애는 아직도 시바노 가즈미라는 이름을 씁니다. 전 반대했거든요. 데라시마 성을 쓰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가즈미는.”
- 그럼 아버지 가족한테 미안하잖아.
“시바노라는 성을 버리면, 나오코한테도 미안하다면서.”
자신을 학대하고 보험금 살인까지 꾸몄던 엄마한테 미안하단다. 시바노 가즈미에게 그것은 진짜 갱생일까.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이 올바른 선악의 판별일까. 시바노 가즈미 자신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할까.
“물론 전부 원만하게 해결된 건 아닙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데라시마씨의 목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저도 그 아이도 여전히 서로 사양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 가즈미는 자기 때문에 행여 제 가정이 삐거덕거릴까 걱정해요. 제가 만나러 가도, 얼른 집에 가라고 밀어 냅니다.”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