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에세이 <식물적 낙관>, 김금희, 문학동네, 2023.(259쪽 분량)
-소설가 김금희를 스쳐간 식물과 사람들, 그 후 화분처럼 남은 이야기-
여름날 초록 나무들과 키우는 식물들을 보면서 읽으니 더더욱 좋다. 글도 말랑하고, 식물집사인 작가님 감수성이 예쁘다. 글을 쓰면서 식물을 키우기 쉽지 않을 텐데 식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무언가를 이토록 좋아할 수 있는 거. 그 에너지는 무엇일까.
작가는 무엇 하나 건성으로 하는 게 없는 듯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무덤덤하게 식물을 키우는 나와 다르다. 식물을 이토록 사랑하는 분이니 소설의 결도 따스한 걸까.
<식물적 낙관> 속표지에는 작가 사인이 있다. '우리의 낙관이란, 식물'하는' 그런 마음'이라고 쓰여 있다. 식물'하는 그런 마음'은 무엇일까. 식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식물을 가꾸는 마음이 있다. 식물이 잘 자라길 희망하며 돌보는 마음. 식물을 향해 애쓰고, 관심을 갖고 지켜 보는 마음. 죽을 것 같았던 식물도 어느 순간 다시 싹을 틔우는 경이를 본다. 잘 살고 있던 나무가 어느 순간 바스러진다. 그럼에도 삶에 낙관을 가진다면 식물을 돌보는 마음일까.
에세이는 식물집사의 일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글 쓰는 작업이 고독하다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불안감, 작업분량, 소설진도 등등... 소설가는 오롯이 혼자 투쟁한다. 김금희 작가는 심리 상담도 받았다고 말했다. 작가는 식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명 '호더'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현상인데 작가는 거실에 화분이 70개가 있다고 했다. 이를 덕후, 식물집사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식물을 하나 둘 키우다 보니 식물에 빠졌고, 식물을 애지중지 키운다. 우리는 저마다 호더이지 않을까.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식물을 키운 경험에 희로애락이 크다. 잎이 나올 때, 식물이 커가는 기쁨, 잎이 떨어질 땐 슬픔도 생각한다. 식물은 바람, 물, 햇볕이 있으면 자랄 수 있다. 노지에서 자랄 때와 거실이나 베란다에서 키울 때의 환경은 다르다. 식물집사는 돌봄을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물을 많이 주면 썩고 물을 덜 주면 말라죽는다. 추우면 얼고, 더우면 숨 막혀 시들해진다. 벌레가 생기면 관리가 어렵다. 식물집사는 너무 부지런해도 안 되지만 게을러도 키우기 어렵다. 식물의 종류, 생김새도 다르고 성향도 달라 각자에 맞춰 관리하고 애정을 줘야 한다. 식물집사의 책무. 그 책무는 실로 무겁다.
식물집사에게는 '발코니의 시간'(p.219)이 따로 존재한다. 발코니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한 작가다. 발코니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풍성하고 싱싱하다. 그곳에서 식물에 물을 주고, 화분을 갈고, 통풍을 시키고, 벌레를 퇴치한다. 각각의 개성이 강한 식물들은 섬세하게 돌본다. '매일같이 물시중을 들고 해충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며 잎이 지면 그 쇠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름 사랑의 서사를 펼쳐 보이고 있는 셈이다.'(p.192)
책을 통해 새로운 용어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식쇼핑, 식테크, 식물집사, 원예수업, 가드닝 등등. 식물 이름은 발음하기도 어렵다. 책에 나오는 식물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많이 봤던 식물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몰랐을 뿐. 책에는 식물에 관련된 책들도 소개하는데 권여선 단편 <내 정원의 붉은 열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화분에 관한 이야기라고 되어 있어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삶을 대하는 가치도 달라진다. 작가는 변하는 마음을 에세이에 담았다. 내 삶에 식물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작가는 어느 순간 '이제 마음에 대해 그만 생각할까 해.'(p.224)라는 말을 뱉었다. 마음을 생각하는 건 괴롭다. 그냥 식물들처럼. 상념 없이 자라는 것. 인생도 그러하면 좋겠다. '인생적 낙관'
발췌
계속되는 낙관을 움켜쥐고 싶어서 하는 일이 가드닝인 것 같다. 막막하고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면 가장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생각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 뿌리가 있고 뿌리를 심는다. 지키고 싶은 여름이 있고 그 여름날들을 지킨다. 여기 묶인 글들은 그런 낙관의 날들에 관한 기록이다. (p.11)
행위가 영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양이 안 멋지더라도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만 하면 일단 나는 흐뭇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가드닝에 있어서는 꽤 낙관주의자인 셈이다. 적어도 식물을 대할 때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어느 면에서는 무덤덤해진다. 정확히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 든다. 쓸 때나 읽을 때나 심지어 스스로 펼쳐나가고 있는 생각의 연쇄 속에서도 정말 그런가, 옳은가, 착시가 아닌가를 묻는데 식물들 앞에서는 그런 날카로운 반문을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질서로 움직이는 완전한 세계가 있으니까. 나의 몫으로 남는 건 의혹이나 불신이 아니라 경탄과 그를 통한 일종의 발심(發心)이다. (p.28)
헤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여름에 필요한 건 고독을 지우기 위한 노력보다 헤세가 「여름 편지」라는 산문에 남긴 이런 제안들의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열흘 동안 화병에 꽂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 관찰하기. 그 잎의 뒷면도 세세히 들여다보기.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장미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응시하기. 그렇게 해서 삶의 무상함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하여 삶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고독과 여름과 정원과 관찰. 이제 무르익고 있는 계절에 이 말들을 자주 떠올릴 것 같다.(p.56)
그날 엄마는 국수에 넣을 고명까지 다 챙겨와 잔치국수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음식들의 이름을 남몰래 좋아하고 음미할 때가 있는데 ‘잔치국수’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였다. 검박하고 정겹고 활기차고 가볍고 순수한 공동체가 생각나는 말. 엄마와 나는 애호박을 많이 넣은 칼칼한 국수를 나눠 먹으면서 정말 맛있다, 서로 맞장구쳤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발코니와 각방에 놓인 식물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
나이가 들고 독립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엄마와 만났다 헤어지는 건 여전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일이다. 아무리 사회생활을 해도, 어디 가서 무슨 행세를 하는 사람이 돼도 그치지 않을 분리에 대한 거부감, 혹은 미약한 슬픔 같은 것. (p.66)
언젠가부터 우리는 나중에 꼭 한동네에 살자고 다짐해왔다. 이십대 이후로는 한 번도 같은 도시에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되면 ‘비 오는 날 부친 부침개가 식지 않을 거리’에 가까이 살자고. 우중雨中에는 부침개지, 하는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다. 처음에는 낭만적이고 재미있다고만 여겼던 그 말은 이제 떠올리면 가장 힘이 되는 일종의 노후 설계가 되었다. 거기다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들과 금전수와 친구네 집으로 잘 옮겨가 무럭무럭 자란 베멜하까지 있다면 더욱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보살펴야 할 것들을 보살피며 나이 들어간 우리는 낮술보다도 이른 ‘아침 술’을 즐기는 참 괜찮은 할머니들이 돼 있을 것이다. (p.117)
그날도 그런 생각의 연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발코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지나치게 나 자신을 넣어서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식물을 이 공간으로 오게 한 것이 나라는 이유로 발코니에서 겪는 모든 실패와 성공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관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의 관여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와는 다른, 부자연스럽고 맹목적인 ‘연연함’처럼도 느껴졌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우리는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그런 공백 때문에 어떤 식물은 자라고 어떤 식물은 성장을 멈춘다. 그러니 빛, 바람, 물이라는 답은 가드닝의 수많은 실패자들을 북돋우고 자책에서 구해내는 치유의 말일지도 몰랐다. (p.110)
물을 주고 오는 길에 또다른 화분이 눈에 띄면 싱크대로 데려와서 샤워를 시킨다. 그러고 도로 화분 진열대에 가져다놓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므로 일단 싱크대에 둔 채 그대로 요리를 시작한다. 간단한 볶음밥이나 계란 토스트가 내가 즐겨 만들어 먹는 아침 메뉴다. 그렇다보니 상황에 따라 화분에 기름이 튀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재료들과 화분들이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가장 자연스럽고 흔한 우리집 풍경이기도 하다. 주방 개수대는 물을 흠뻑 맞은 뒤 그 물이 다 흘러나올 때까지 식물이 대기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고 동시에 인간인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하는 공간이니까. (p.82)
순간 나는 말을 멈췄다. 최근 들어 나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하기로 결심했는데 실천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내가 그 결심을 한 건 자기의 작은 자아에 집착하는 사람은 오로지 “두려움에 가득찬 자기 보호”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이겐 드레버만의 말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라는 좁은 면적에 갇히고 싶지 않았고 내가 본 나무들처럼 더 넓고 높은 성장을 향해 있고 싶었다.
우리는 가만히 마주앉아 각자의 잔에 막걸리를 더 따랐고 묵묵히 건배를 한 다음 서로에게 별다른 위로를 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 발코니와 거실에서 몇 해를 함께 보내온 식물들이 그런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기 불행을 스스로 관리하게 된, 한때는 너무 작은 아이였던 어른들을. (p.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