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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Oct 26. 2021

장류진 <달까지 가자>

샛별의 고독한 문장

샛별의 고독한 문장 11. <달까지 가자>, 장류진 장편소설, 창비, 2021. 363쪽 분량.


  아슬아슬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언제 비트코인(정확하게는 이더리움)이 떨어질지, 대출까지 받아 투자한 암호화폐가 휴지조각이 될지, 불안불안거리며 읽었다. 그런데 소설 속 인물들은 점점 암호화폐로 돈을 벌고, 호캉스를 가고, 인생 역전을 하는 상황. 엔딩에 가면 쪽박 차나. 일확천금을 꿈꾸면 망한다, 곧 투자의 쓴맛을 보겠지라는 고정관념(티끌 모아 태산)에 사로잡힌 나는 혼자만의 진부한 결론을 내리며 읽어나갔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 하나. 그래. 가난은 꼭 세습되는 건 아니지. 흙수저 여성들이라고 33억 벌지 말라는 법 없지. 외제차 타도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도 안 드는 원룸에 아등바등 사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잖아.  


  그래도 이 책은 좀 위험하다. 누구나 비트코인(대표적인 암호화폐 이름)에 투자한다고 소설처럼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 폭망할 확률이 높다. 읽으면서 '나도 비트코인 해볼까'라는 독자들도 나오겠다 싶었다. 소설은 환상을 담고 있다. 돈이 그리 쉽게 벌리는 물건이던가. 돈을 벌어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만약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만큼 고생했을 것이다.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가상화폐에 돈을 투자했고, 시간을 들였고, 신경을 썼고, 위험을 안고 뛰어든 보상이겠다. 코인에 투자한다고 다 벌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달까지 가자>, 장류진, 창비, 48쪽.


  작가 장류진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3억씩은 주고 싶었다고 했다. 결말을 달콤하게 정해놓고 썼으니 문장마다 달달할 수밖에. 정말 설탕에 굴린 핫도그 같은 소설이다. 망하면 어쩌나 우려하며 읽었지만 결국 나의 코를 납작하게 해버린 작가. 생기발랄한 젊은 작가가 아닐 수 없다. 20대 직장인 여성들이 월급으로 3억을 모으기는 어렵다. 생활비, 월세, 교통비, 공과금 등을 내고 나면 먹고살기 빠듯하다. 겨우 적금을 부어두면 다음 이사 때 오른 보증금으로 써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33억, 3억, 2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럼, 이야기를 풀어보자.  


  소설 속 그녀들(다해, 은상, 지송)은 '마론제과'에 다닌다. 40년 된 마론제과는 업계 톱은 아니지만 회사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가장 베스트셀러 제품은 '초코밤'과 '아이스초코밤'이다. 서울 한복판에 번듯한 사옥도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이 아니다. 동병상련이라고 끼리끼리 모여 회사 험담을 하면서 돈독해진다. 그녀들의 단체 카톡방 이름은 'B03'(비공채 출신 3인)이다. 단톡방에서는 회사 뉴스와 가십들, 팀 정보가 실시간 오간다. 


그녀 1. 스낵팀 정다해


주인공. 마론제과 입사  6년 차. 스물여덟. 소위 흙수저. 

원룸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열여덟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았지만 학자금 대출은 여전히 남은 상태. 현재 원룸 화장실과 방, 현관에 턱이 없어 신발에 묻은 흙들이 방 안으로 굴러오는 게 짜증 나는 상황이다. 빨리 이사를 가고 싶은 다해. 번듯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다. 언제쯤 투룸을 얻어 살 수 있을지 막막하다. 다해는 스낵팀 막내로 허드렛일을 다한다. 능력 없는 팀장은 다해에게 깐깐하게 군다. 팀장은 점심시간 3분을 넘겨도 눈치를 주며 잔소리를 한다. 만년 팀장은 회사에서 위치가 불안하다. 그 스트레스를 직원들에게 푼다. 다해는 팀장 눈을 피해 자기 시간을 쓴다. 차분하고 꼼꼼하고 일 잘하는 다해. 어느 날 은상 언니의 말을 듣고 이더리움을 300만 원 매수한다. 


그녀 2. 구매팀 강은상.


그녀는 서른이다. 경영학과 출신으로 숫자에 밝다. 잘 웃지도 않고, 냉철하며 감정 기복도 적은 캐릭터. 남자친구와는 2년 전 헤어진 상황. 은상은 셋 중 가장 침착하다. 회사 내에서 '강은 상회'를 차릴 정도로 또순이 스타일. 슈퍼 하는 엄마의 물건을 가져와 직원들한테 판다. 직원들에게 치약도 팔고, 커피색 스타킹, 대일밴드, 페브리즈도 팔았다. 급기야 컵라면까지 갖다 놓는다. 비품 창고에 공간을 마련해 물건을 들이고 입금계좌번호와 저금통, 수기 외상장부도 비치했다. 직원들은 은상이 없어도 자유롭게 사고 결제할 수 있다. 물건을 팔고 남은 순이익은 한 달에 9만 원 정도다. 누구는 9만 원 안 벌고 말지 하겠지만 은상은 9만 원에 진지했다. 결국 강은 상회는 영리활동을 한다는 누군가의 제보로 판매활동이 중단됐다. 그녀는 이후 이더리움 코인을 샀고, 대박을 친다. 


그녀 3. 회계팀 김지송


'오피스 오퍼레이터(Office Operator)직렬'로 입사한 그녀. 고등학교에서 회계를 공부했고 정산 업무만을 위해 '오오'로 고용된 상황. 같은 비정규직이어도 강은상과 정다해와는 다른 처지다. 오오는 상여금, 성과급도 못 받았고, 명절마다 주는 제이마트 5만 원 상품권도 제외였다. 오래 일해도 직급이 부여되지 않는 악조건이다. 지송은 타이페이로 웨이린을 만나러 다닌다. 웨이린은 일곱 살 연하남으로 잘 생겼고 대만에 있는 남자 친구다. 은상은 극구 말렸지만 지송은 웨이린의 잘 생긴 얼굴을 포기할 수 없단다. 주말엔 서핑에 빠져 다닌다. 은상 언니와 다해가 코인을 하자 못마땅해한다. 



  셋은 끈끈하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그녀들의 아지트인 커피빈 4호칸으로 달려가 달달한 카페라테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수다를 떤다. 점심도 같이 먹고 은밀한 얘기도 나눈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며 챙겨준다. 어느 날, 은상 언니가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히죽거리자 다해와 지송은 저 언니가 왜 저러는지 궁금했다. 결국 은상 언니는 자신이 암호화폐에 투자를 한다면서 너희들도 함께 들어오라고 꼬드긴다. 현재 1 비트코인 가격은 150만 원이니 이더리움을 하자며. 이더리움 한 개 가격이 13,950원이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자신만만해한다. 은상 언니의 말에 다해와 지송은 멀뚱하게 쳐다본다. '언니가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가상화폐에 대해 지송은 부정적인 반응을, 다해는 궁금해했다.  


언니는 이더리움을 하자고 했다.
(48쪽)


 은상 언니의 말을 믿어도 될까. 나의 전 재산을 '이더리움'에 걸어도 될까. 이더리움을 믿을 수 있을까. 다해는 몇 날 며칠을 고민고민했다. 다해는 좀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 월급 짜게 주는 회사에 다녀도 보람 있게 다니고 싶었다. 부모님은 빚이 있고, 경제적인 지원을 1도 받을 수 없는 자신. 다해는 투룸을 얻고, 후진 동네도 벗어나고 싶었다. 제발 '현관과 방 사이의 턱, 그리고 방과 화장실 사이의 턱'(p.63)이 있는 집을 욕망했다. 턱이 없으니 현관문을 열면 바로 장판으로 이어졌다. 모래가 방바닥으로 들어왔고, 샤워도 짧게 해야 했다. 여차하면 물이 방으로 넘쳤다. 푼돈을 버는 족족 생활비, 대출금으로 나가는 현실이 지긋지긋했다. 어쩜 엄마, 아빠 노후도 다해가 책임져야 할지 모른다는 무게가 벅찼다. 사십 대는 관짝 같은 원룸 벗어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이더리움으로 인생역전 할 수 있을까. 이더리움을 살까. 그녀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아주 조금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다. 남들이 사는 만큼 갖추고 싶었다. 그 방법이 '이더리움'밖에 없을까 고민한다. 이더리움에 미래를 건 다해. 이런 자신이 안 됐다. 


   다해는 은상 언니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은상 언니는 돈에 관심이 많다. 대학 논술시험으로 넘쳐나는 인파를 보며 손난로, 담요를 팔면 얼마가 남겠다고 바로 계산을 할 정도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도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바로 매출을 계산해버렸다. 은상 언니는 회사 사무실에서 1년 동안 '강은 상회'를 차린 경험도 있다. 돈 9만 원을 벌기 위해 동전을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본 다해는 은상 언니가 기이했다. 언니를 믿어보자. 돈을 벌어보자. 다해는 결정한다. 이더리움에 올인하기로. 


  다해는 2017년 5월 5일에 300만 원을 투자했다. 1ETH(이더리움 한 개)을 149,980원에 샀다. 다해가 핸드폰을 볼 때마다 1ETH=164,850원(5월 19일). 1ETH =246,400원(5월 23일)이 찍혔다. 다해의 가상화폐 총자산은 2,558만 원이 됐다. 이더리움의 그래프는 널을 뛰었고, "내 전 재산은 9,000만 원이 되었다가 2,000만 원이 되었다가 했다"(p.121) 만져보지는 못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속이 탔다. 자신이 탄 사다리에서 추락하면 어쩌나 불안했다. 과연 달까지 갈 수 있을지. 헛된 욕망으로 죗값을 받는 거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더리움에 투자하면서 셋은 우당탕탕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은상과 다해가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쑥덕거리자 소외감을 느낀 지송은 의기소침했다. 은상 언니의 주도하에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도 셋은 좌충우돌이다. 그녀들은 7성급 호텔에 머물고, 풀파티를 즐기고, 폭신한 침대 시트에 몸을 감고, 바다의 물결을 봤다. 그럼에도 지송은 그동안 언니들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한켠에 켠켠이 쌓았다. 결국 여행지에서 또 비트코인 이야기를 하자 지송은 폭발한다. 은상은 지송의 눈치를 보다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못된 말을 하고... (헉)


  결국, 지송도 언니들을 따라 코인 열차에 탑승한다. "우리는 같은 코인을 샀고, 같은 그래프 선상에 있었다. 같은 운명의 파도 위에 배를 띄우고 있었다.'(p.246) 한배를 탄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셋은 '이더리움'이라는 코인에 하나로 묶여버렸다. 그 코인이 달나라로 데려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해는 퇴직금을 헐고, 빚을 내고, 월급을 받는 족족 넣은 돈이 2,000만 원 정도였다. 현재 3,000만 원을 벌었으니 총자산이 5,000만 원이 됐다. 은상 언니는 3억 정도 벌었다. 이쯤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천 단위를 불려 억 단위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셋은 달까지 가자~~ 외친다.


  셋은 이더리움을 더 들고 가기로 결정. 탕탕탕. 12월 12일. 1ETH(이더리움 한 개)= 63만 원을 돌파. 다해의 가상화폐는 1억 1,82만 원이 됐다. 12월 29일  1ETH=102만 원을 찍었다. 다해의 자산은 1억 7,978만 원이다. 2018년 1월 7일. 1ETH=170만 원을 돌파. 운상 언니와 다해는 1 이더리움이 200만 원일 때 모두 매도했다. 지송은 좀 더 기다렸다 237만 원에 팔았다. (현재 2021년 10월 26일 이더리움 시세정보: 5,095만 원. 출처:네이버)


  그녀들의 투자성향을 보자. '이더리움' 한 종목에 올인했다. 팔았다 샀다를 하지 않고, 장기투자를 했다. 전 재산을 털었다. 돈이 생길 때마다 계속 샀고, 가격이 떨어질 때 손절하지 않고 버텼다. 목표가를 정해놓고 그 가격이 왔을 때 모두 팔아 현금화했다. 한마디로 존버. 존버는 승리하는가. 굉장히 공격적인 투자였다. 한방에 성공할 수도 있고, 한방에 나락 갈 수도 있는 상황. 대출까지 받아 투자를 했으니 배짱도 좋다. 아마 혼자 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시간들을 셋은 똘똘 뭉쳐 버텼다. 투자 금액이 서로 달라 번 돈은 다르다. 은상 언니는 33억을 벌었고, 지송이는 2억 4,000만 원, 다해는 3억 2,000만 원을 벌었다. 여덟 달 동안 번 돈이다. 


  이게 가능한가. 세 명은 아주 운이 좋았던 케이스다. 나중에 은상 언니는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괜히 같이 하자고 했나, 걱정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모두가 끝난 코인판에 들어가는 거 아닌지. 실체가 없는걸 돈 주고 사는 거 아닌지. 나 혼자 할 걸 괜히 애들을 끌어들인 건 아닌지. 은상은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걱정이 태산이었다. 결국 이들은 기회를 잡았고, 그 기회를 이용했다. 남들이 하지 않을 때 세 여성은 무모해 보일 정도로 코인에 집중했다. 럭키했다. 코인판에서 모두가 그녀들처럼 되는 건 아니다. 


  돈은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은상 언니는 회사를 그만뒀고, 성수동의 5층짜리 꼬마빌딩을 샀고, 벤츠 E클래스를 샀다. 얼떨결에 지송과 다해는 소형SUV신차를 5년 할부로 계약했다. 지송은 흑당밀크티 사업을 할 예정에 있다. 다해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즐겁게 다닐 두둑한 돈이 생겼다. 그 돈이란 게 뭔지 위로가 됐다. 이제 그녀들은 행복할까.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나. 삶은 순간순간의 찰나이다. 돈이 많다고 미래가 보장되거나 행복한 건 아니다. 다만, 그녀들이 만지고 싶었던 돈. 갖고 싶은 돈을 벌었을 뿐. 여기서부터 생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돈을 벌면 사랑도 넘친다. 셋은 자동차를 하나씩 뽑고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운전하다. "언니!" "왜?" "사랑해!" "언니! 내가 더 사랑해!" "거봐, 내가 다 잘 될 거라고 했잖아!"(p.326). 셋은 꼬마 로켓 타투를 함께 했다. 세 명의 우정이 보기 좋다. 회사에서 이토록 친해지기가 어렵다. 은상 언니는 혼자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투자해도 좋았을 텐데 동생들을 끌어주고, 나눔 하는 모습이 따뜻했다. 동생들도 언니를 믿었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 망하면 서로 원망했겠지만 흥해서 다행이다. 한마디로 흐뭇한 해피엔딩~~ 


  책은 가볍게 읽기 좋다. 20대 직장여성들의 애환을 세밀하게 엿볼 수 있다. 늘 제자리에 쳇바퀴 돌듯 사는 흙수저. 앞날을 생각해도 뻔한 인생. 작가는 이런 여성들에게 '돈'이라는 달을 꿈꾸게 했고 보름달을 줬다. 현재 젊은 세대의 욕망을 포착해 엮었다. 가독성도 좋다. 재밌다. 재밌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 'To the Moon' 달까지 가자는 제목만으로 팍팍한 청년들의 현실을 조금은 쓰다듬어 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건 잊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 




발췌

-언니는 암호화폐를 이해하려면 우선 블록체인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블록체인이라는 시스템에 참여한다는 건 내가 가진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디바이스를, 말하자면 공통의 '거래장부'로 사용한다는 의미라는 거였다. 대략 10분에 한 번씩 이 시스템을 통해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의 거래장부가 갱신되었는데 이 거래내역 묶음이 바로 블록, 그리고 그 블록의 묶음이 블록체인인 것이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p.44)


-그런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게 블록체인이라고, 언니가 열띤 설명을 이어갔다. 거래 장부를 블록체인 시스템에 참여한 사람의 수만큼 복사해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거였다. 중앙에서 하나의 주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장부인 셈이다. 그러면 전 세계 컴퓨터에 장부가 분산되어 유지비용도 거의 들지 않고, 따라서 수수료도 없고, 누군가로부터 감시받을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p.46)


-은상 언니는 경제적인 인간이다. 이윤욕이 강하다. 다시 말해 이익을 추구한다. 매사에 금전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하고 싶어한다...... 뭔가 부족하게 여겨진다. 그래,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은상 언니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순수하게 좋아한다. 우리 팀장이 커피를 좋아하는 것처럼, 지송이가 서핑을 좋아하는 것처럼, 은상 언니는 돈을 좋아한다. 


-나는 지금 블록체인이, 암호화폐가 뭔지도 모르면서 언니가 시키는 대로 전재산을 털어 이더리움을 구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더리움이 어떤 혁신적인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내겐 그 기술이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가상화폐는 손에 쥘 수도 없다. 코드로만 존재한다. 만약 이걸 다시 되팔 수 없다면 나는 허공에 전재산을 날려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p.89)


-월급을 받는 족족, 최소한의 생활비와 대출 상환을 위한 원금과 이자를 제외하고 남는 현금으로 전부 이더리움을 사들여온 셈이었다. 깨알 같은 숫자가 펼쳐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내게 언니가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이게, 지금은 얼마가 된 줄 알아?"(p.92)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지날수록, 한살 더 먹을수록 늘 전보다 조금 나았고 또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마치 서투른 박음질 같았다. 전진과 뒷걸음질을 반복했지만 그나마 앞으로 나아갈 땐 한땀, 뒤로 돌아갈 땐 반땀이어서 그래도 제자리걸음만은 아닌 그런 느낌으로, 그렇게 아주 조심씩......천천히......서서히......차츰차츰......매일매일......하루하루......그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감히 더 바랄 수 있을까?(p.98)


-내가 미쳤지, 그때 더 샀어야 했는데. 애초에 다 걸었어야 했는데. 전 재산을 때려넣어야 했는데......정말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소심했을까? 매일 밤, 잠을 다 설쳤다. 후회를 잠재우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남은 적금을 비롯해 통장에 있는 모든 현금을 이번 달 생활비만 최소한으로 남기고 죄다 털어서 다시 추가 매수에 들어갔다.(p.111)


-그 사이에 질곡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가격이 내려갈때도 있었다. 그야말로 피가 다 마르는 것만 같았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열흘 연속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이만큼 벌었으면 된 게 아닐까? 이제 현금화를 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이러다가 하루아침에 폭락해서 모든 걸 잃는 게 아닐까? 걱정하며 은상 언니에게 조언을 구했다. 언니는 늘 차분히 답했다. (p.115)


-나도 네가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네 말 듣고나니까......너 안 그래 보여. 그런 느낌, 그러니까 박탈감 같은 게 든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거야. 너도 우리처럼 돈 벌고 싶은 거야. 부정하지 마. 그리고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가상지갑에 있는 건 당장이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돈이야. 더 벌려고, 더 불리려고 안 하고 있을 뿐인 거지..... 이 돈, 진짜 우리 돈이야.(p.120)


-두달 사이, 그래프는 하루에도 몇번씩 요동쳤고 내 정신도 그에 따라 널을 뛰었다. 1ETH의 가격이 위로는 48만원까지도 찍었고, 아래로는 13만원까지도 찍어봤다. 그때마다 내 전재산은 9,000만원이 되었다가 2,000만원이 되었다가 했다. (p.121)


-"언니가 이런 데 데려와줘서 너무 좋아. 좋은데...... 내가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어. 모르겠어. 마음 한구석에선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 고기도 먹어본 놈이나 많이 먹는다는 말이 맞나봐. 내가 이런 것들을 즐길 자격이 있나 싶은 거 있지. 솔직히...... 아까부터 주책맞게 엄마 생각까지 나."(p.192)


-우리, 같은, 애들. 난 은상 언니가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을 말할 때, 이상하게 마음이 쓰리면서도 좋았다. 내 몸에 멍든 곳을 괜히 한번 꾹 눌러볼 때랑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리지만 묘하게 시원한 마음, 못됐는데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만 못된 마음, 그래서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p.193)


-그애는 나와 언니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아느니 차라리 다시 주식을 하라고. 주식은 실체라도 있는 회사에 대한 가치를 매긴 거지만, 가상화폐는 정말이지 아무 가치랄 게 없다고. 언니들이 투자한 돈이 하루아침에 0원이 되고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런 불분명한 것에 대책 없이 올인하지 말고, 자기한테 권유하지도 말라고. 나보다 똑똑한 언니들이 대체 왜 그러느냐고......그럴 때마다 은상 언니는 "가치가 없지 않아. 가치가 있어. 블록체인이 보장하는 거래 시스템이 바로 미래에 우리가 지향하게 될 거래방식이며....."를 기계처럼 읊었지만 지송이는 항상 이렇게 받아쳤다.(p.211)


-"근데 나도 이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싶어졌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게......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어. 언니, 난 웨이린 얼굴이 좋아. 나 이제야 나 자신을 알게 됐어.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고 난...... 잘생긴 게 좋은 사람이야. 이제 다른 애는 못 만나겠어. 날 아무리 좋아해줘도 내가 좋지 않으면, 그러니까 이 얼굴이 아니면 나 이제 못 만나."(p.237)


-"응,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스무개면 오늘 가격으로 870만원이거든? 이게 8,700만원...... 아니, '억'소리 날 때까지....."(p.239)


 -1.2룸에 살게 되자, 침대에 누워서는 현관과 부엌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제는 먹고 난 음식 냄새도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또 창문 두개가 마주 보고 있어서 환기가 잘되는 곳에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게 욕심일까? 잘 때는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이 욕심이든 욕망이든, 나는 이제 방과 부엌이 분리된 투룸에 살고 싶었다. (p.248)


-돈에는 총량이 있어서 결국 한쪽에서 빠지면 그만큼 또다른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돈들이 어느 길로 다니는지 잘 눈여겨봐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결연하게 말했다.(p.263)


-만약 사실이라면 그 어린 여자애가 노력도 없이 그렇게 큰 돈을 쥐었다는 게, 그 시기를 다 지나온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땐 영 좋아 보이지만은 않거든. 그 친구, 조심해야 될 거야. 유혹도 많을 거고, 사기 치려는 사람도 많을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다 그나이 때에 맞게 겪어야 할 것들이 정해져 있는거야. 걔가 몇살이래? 서른? 하이고......한창 일 배우고, 인맥 쌓고, 경험 쌓고 그런 거 해야 할 나이에, 큰일이다. (p.290)


-"최종적으로, 지송이는 2억 4,000만원을 벌었다.

나는 3억 2,000만원을 벌었다.

은상 언니는 33억을 벌었다. 

내겐 이 모든 게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단 여덟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p.298)


-"있잖아......다 잘될 거라고 했던 거. 달까지 갈 거라고 했던 거." 지송이와 내가 양옆에서 언니를 바라봤다. "뭐랄까, 사실 그건 주문 같은 거였어. 그냥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될 거라고 믿어야만 했어. 잘되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도 한쪽으로는 늘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어. 그래서 문득문득, 찌르듯 괴로웠어."(p.327)


-"예전에 언니가 그랬잖아. 돈의 속성을 알아내고 말 거라고. 돈이 어디로 가는지,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그런 것들을 밝혀낼 거라고."

"그랬었지."

"그거, 알아냈어?"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던 언니가 다시 입을 뗐다. 

"응. 이제 알 것 같아."

"어느 쪽으로 가는데?"

여전히 시선을 바다에 둔 채, 언니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돈도,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가는 거야."(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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