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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Oct 05. 2021

헤르만 헤세 <크눌프>

샛별의 고독한 문장

고독한 문장 11. <크눌프>, 헤르만 헤세, 민음사, 147쪽 분량. 


헤르만 헤세 (Hesse, Hermann 1877~1962)의 <크눌프>는 1915년 작품이다.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에서>(1906), <크눌프-크눌프 삶의 세 가지 이야기>(1915),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황야의 이리>

(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유리알 유희>(1943) 등을 썼다. 작가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는 군국주의, 파쇼적 정치 성향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를 갈구했던 작가이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한다. 독일 신문들은 그를 '절조가 없는 인간', '조국의 배반자'라 낙인찍었다. 헤세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해 심신을 치료받는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정권은 헤세 책의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의 문학적 근저는 1, 2차 세계대전, 독일제국과 유럽 문명에 대한 고뇌라고 볼 수 있다.


“내 나라 사람들의 삼분의 이가 그런 종류의 신문을 읽고, 매일 아침 매일 저녁 그런 논조에 설득당하고, 경고당하고, 선동당한 나머지, 불만과 악의에 차 있어. 그 모든 것의 목적과 종착점은 또 전쟁이야. 다가오는 다음 전쟁은 이번 전쟁보다 훨씬 더 끔찍할 거야.” -헤르만 헤세-


<크눌프>, 헤르만 헤세, 민음사, 147쪽 분량.

  한국 문단에  헤세의 작품은 1927년 불교잡지를 통해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소개됐다. 전혜린은 1964년 직접 <데미안>을 번역해 출판했다. <싯다르타>가 성인층에게 감응을 줬다면, <데미안>,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청소년의 성장소설로 읽혔다. 15세가 되던 해(1892년 6월 20일) 헤세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바트 볼Bad Boll에서 정신요법을 실행하는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1935년에는 헤세의 동생 한스가 자살을 한다. 동생의 죽음으로 헤세는 그 누구보다도 삶과 죽음에 천착했다. 헤세는 1892년 9월 1일에 렘스탈에 있는 슈테텐 신경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얼마나 죽음을 생각했는지요!”라는 글을 적어 보냈다. 그의 우울한 심정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크눌프>의 주인공 '크눌프'는 인생을  '일요일'처럼 살아간다. 남들은 무두장이나 기계공, 수선공으로 일할 때 크눌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연을 벗 삼아 지낸다. 일도 없이 친구들 집에서 신세를 지며 떠돌아다닌다. 친구들은 크눌프를 기꺼이 환대한다. 친구들은 크눌프가 자신들의 집을 방문하면 따뜻하게 맞이해 보살펴주고, 치료해 주고, 옷도 벗어주고, 돈까지 손에 쥐여 준다. 재단사 슐로테베크는 크눌프에게 “자네는 가난뱅이일 뿐인데, 마치 백작이나 되는 것처럼 우아하게 하고 다니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p.36)라고 묻는다. 또, 무두장이 친구 로트푸스는 크눌프를 떠올리며 그가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 일요일처럼 살았다.’(p.31)고 회상했다. 남들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아갈 때 크눌프는 일일일일일일일~~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크눌프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노래도 잘 부르고, 휘파람도 잘 분다. 책을 읽고 사색하길 좋아한다. 여행수첩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기록한다. 시 쓰기와 시 낭송도 좋아하고 산책을 즐겼다. 음악에 맞춰 춤도 잘 춘다. 자연관찰에 탁월하며 바람과 교감하는 크눌프. 한량이 따로 없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다. 나무와 꽃 가꾸기를 사랑했다. 마치 헤르만 헤세처럼 말이다. 주목할 점은 크눌프가  톨스토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점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했던 톨스토이의 질문을 크눌프도 계속 되물었다.  또, 크눌프는 셰익스피어도 읽었다. 친구들과 죽음을 얘기할 땐 <햄릿>의 대사를 인용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라고들 하잖아."(p.66)라며. 


  자유롭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크눌프를 친구들은 왜 좋아할까? 친구들은 크눌프에게 대리만족을 느꼈다. 크눌프와 함께 지내면  축제 같은 분위기에 취했다.  자신들은 늘 똑같은 노동, 똑같은 시간, 똑같은 사람들과 생활하는데 크눌프가 찾아오면 지루한 생활에 활기를 줬다.   크눌프는 친구들에게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봤던 세상 물정도 알려주고, 시도 써주고, 여행 이야기도 들려줬다. 크눌프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대신 친구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말을 해도 받아 줄 거 같은 넉넉한 친구였다. 친구들은 크눌프와 포도주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노래했다.  사람들은 크눌프에게 동심을 느꼈고, 맑은 웃음을 전달받는다. 그가 항상 자신들 곁에 머물러도 불편하지 않았다. 크눌프에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의 세계와 다르게 사는 그가 부러웠다. 


  크눌프는 두렵지 않았을까. 친구들은 모두 안착해서 가정을 일구고 일을 하고 안정감을 갖고 사는데  자신은 이곳저곳 떠돌이 신세로 살아야 하니 말이다. 크눌프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집도 없이 사는 인생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면 크눌프의 삶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친구들도 가끔은  우려를 표했다. 무두장이 로트푸스는 떠돌아다니는 크눌프에게 “이보게, 자네도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장인이 되었을 테고 나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을 거야.”(p.16) 말한다.  40대 초반이 된 크눌프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의사 마홀트를 만나는데 그도  “자네는 자네가 살아온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나?”라고  묻더니 “자네가 신부나 교사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도, 아마 자네 정도면 자연 연구가나 시인 정도는 되었을 걸세.”(p.98)한다.  또, 석공 샤이블레는 크눌프에게 “자네는 이런 가련한 떠돌이로 머물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구(...) 자네에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어. 그런데도 자넨 아무것도 되지 않았잖아.”(p.127)한다. 


  사람들은 크눌프가 부럽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내비친다. 크눌프의 재능이 아까워서 이런 말들을 했을 텐데, 정작 크눌프는 방랑의 삶을 선택했고, 충실했다. 삶에서 무엇이 된다는 건 중요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크눌프는 장인도 신부나 교사도, 연구가나 시인도 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선택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기에 홀가분하게 길 위에서 살 수 있었다. 



1984년 크눌프에 대한 공익 광고 @사진출처: 네이버


"낭만은 청춘의 본질이며 자유는 청춘의 당위입니다. 또한 청춘은 혼돈과 시행착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청춘의 속성은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헷세의 ‘크눌프의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는 청춘이 단순한 낭만, 무절제한 혼돈만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크놀프는 스스로를 삶의 방랑자, 모험적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또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삶, 인생이라고 여기는 방관자, 예외자로서 젊음을 허비합니다. 결국 그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눈 덮인 산에서 얼어 죽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면서 후회합니다. “왜 나는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또한 옳은 사람이 못되었을까”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땅 위에서 크눌프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젊음이란 소비적 낭만도, 무조건적인 부정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끊임없는 절제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젊음은 진정한 낭만일 수 있습니다."

    (신문사 공익광고. 1984.4.23) 


  1980년대 한국에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다.  당시 <크눌프>는  <크눌프의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됐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신문사는 청소년 대상 공익광고로 ‘크눌프’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이 땅에 살고 있는 크눌프(청소년)들에게 절제와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요일처럼 사는 크눌프 같은 청춘들에게 우려를 표했다. 광고 문구로 크눌프가 시간을 낭비하며 살며 인생의 낙오자가 돼 산에서 얼어 죽었다는 표현을 썼다. 1984년 광고이니 아시안 게임(1986)이 있기 전이다. 정부는 젊은이들이 크눌프처럼 따라 할까 이런 광고를 냈을까. 문학작품을 왜곡해 재해석한 문장들이 놀랍다.  공익광고만 보면 크눌프가 마치 허송세월 하는 노숙자처럼 적혀 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급속 성장이 일어났기에 크눌프의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 십상이었다. 방랑하는 삶은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정말 '일요일' 같은 삶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까. 크눌프가 시간을 낭비했다기보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성찰하며 생활했다. 방랑자이면서 수도자의 삶을 산 부분이 많다. 크눌프처럼 사는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많은 것들을 내려놔야 하고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크눌프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크눌프의 친구 마홀트는 20년 만에 만나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크눌프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한다. 크눌프가 왜 갑자기 라틴어 학교를 다니다 독일어 학교로 옮겼는지 궁금해하며. 크눌프는 당시 직조공의 딸 프란치스카를 좋아했었다.  그녀가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애인은 필요 없거든”(p.103)하자 크눌프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프란치스카와는 사귀지 못했다. 크눌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녀에게 상처 받았다. 자신은 학교까지 그만두며 그녀를 사랑했지만 배신감은 컸다. 이후 크눌프는 어떤 약속도 하지 못한다. 약속을 가지고 사람을 구속하지도 않기로 마음먹는다. 질풍노도 때 얻게 된 신념은 그의 삶에 반영되어 버렸다. 크눌프는  옛날을 회상하며 “그녀가 자신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라고.”(p.122)라고 했다.


  이후 크눌프는 사랑도 했고, 아들도 있었다. 아이를 낳다 산모는 죽고, 아이의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다른 곳에 입양되었다. 크눌프는 이 사실을 알고 아들이 입양된 주변을 기웃거리며 아들을 먼발치에서 볼 뿐이다. 사람들은 크눌프가 자유로워 보여 부럽겠지만 크눌프도 사연이 많았다. 사랑도 자식도 떠나보냈으며 자신의 길을 찾으며 긴 세월을 살았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크눌프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폐결핵에 걸린 크눌프는 신과 마주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살아온 길에 후회와 한탄이 가득하다. 신은 크눌프에게 말한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크눌프에게 비친 신은 자신이 믿는 신일수도 있고 내면의 자아일 수도 있다. 신의 존재는 내 안에서 울리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일 것이다. 크눌프는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 못됐다고, 나쁜 놈이었다고 나약해하자 하느님은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p.133)며 그가 선택한 삶에 대해 충분한 가치를 부여해 준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지나온 삶을 만족하는 게  가능할까. 그러나  하느님은 경고하듯 말씀하신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p.134) 


 신은 크눌프에게 네가 추구한 삶. 원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하셨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크눌프는 생각한다. 죽음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대부분 후회로 남을 것이다. 신의 음성은 그를 홀가분하게 만든다. 자유롭게 살려고 애썼고, 자신의 삶을 찾아 묵묵히 걸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자기 삶에  만족하라는 조언은 인간이 지닌 한계를 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크눌프는 신의 경고를 듣고 비로소 평온을 얻는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작아지며 가련해진다. 


헤르만 헤세 <크눌프>, 민음사, 133쪽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이 고독한 문장이 나를 붙든다. "나는 어떨까? 지금 만족하고 있을까?"  이제 그만 만족하라는 말은 나를 찌른다. 끊임없이 욕망하는 삶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다. 목표만을 지향한다. 늘 외롭다. 스스로 내려놓는 마음. 버리는 마음. 절제하는 마음도 삶의 길에선 중요하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선망, 동경, 후회, 미련, 욕심, 이기, 질투 등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끝도 모르는 추구는 심신을 들들 볶는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까지 지치게 만든다. '이제 만족한다'라고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다면 지나온 시간은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제 그만'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도 개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를 받아들이려면 기준선을 정해야 한다. 내가 만족하는 선! 그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을 너무 높게 긋지는 않았는지 체크하는 것도 필수이다. 높이 그었다면 자신의 상황에 맞춰 조정해 본다. 살다 보면 선을 완전히 삭제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그래도 헤세는 괜찮다고 말해준다. 고독한 문장은 나를 늘 반성케 한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작품 발췌  <크눌프> 헤르만 헤세, 민음사.


-1890년대 초, 크눌프는 몇 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퇴원했을 때는 2월 중순경으로 날씨가 몹시 고약했다. 겨우 며칠을 돌아다녔을 뿐인데도 다시 열이 올라 잠시 머물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 어느 도시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점에 대해 그가 느끼는 자부심은 특별해서, 만일 누구든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영예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p.7) 


-그는 온갖 수단을 다해 이 위태위태한 허구의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현실 속ㅇ에서의 그는 금지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직업도 없는 방랑자로서 불법적이고 비천한 존재였다. 모든 경관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렇게 멋진 허구의 삶을 방해받지 않고 지속해 나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명랑하고 유쾌한 사내가 정식적으로 탁월하고 때때로 진지하다는 점을 존중해주었으며, 가능한 그를 괴롭히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p.15)


-무두장이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지하 작업장으로 가면서 그저 구경하는 것 외에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 독특한 친구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태도를 거만한 것이라 해야 할지 겸손하다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일을 하고 발전을 이루어가는 사람은 당연히 여러 가지 면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는 하지만, 결코 그토록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손을 가질 수 없었고 그토록 가볍고 날렵하게 걸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p.31)


-그녀는 크눌프가 던지는 질문과 그의 맞장구에 흥이 나서, 열정적인 어조로 자신의 고향,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과 할머니, 그리고 오리와 닭, 우박과 질병, 결혼식과 교회헌당기념일 축제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고 소중한 경험들을 다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다양하고 많았다. 마침내 이야기는 그녀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더나온 일, 현재 하는 일과 주인집의 일에까지 이르렀다. (p.53)


-“자, 이젠 향수병이 사라졌죠?” 노래가 끝나자 그가 물었다. “오, 그럼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우리 꼭 다시 한번 이런 산책을 해요” 

“유감스럽겠지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군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싫은 건가요?”

“아녜요, 베르벨레. 하지만 난 내일 떠나야 합니다. 그만두겠다고 말을 해두었거든요.”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죠! 그게 사실인가요? 정말 서운한 일이군요.”

“나 때문에 서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난 오래 머무를 생각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난 그저 무두장이일뿐인 걸요. 당신은 곧 애인을 사귀게 될 겁니다. 정말로 멋진 애인을요. 그러면 향수병도 더 이상 없을 거구요. 두고 보세요.” 

“아, 그런 말씀 마세요! 당신이 내 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을 매우 좋아한다는 걸 아시잖아요.”(p.58)


-“그래서 난 밤에 어디선가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것을 제일 좋아해. 파란색과 녹색의 조명탄들이 어둠 속으로 높이 올라가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은 곡선을 그리며 사라져버리지. 그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이 금세 다시 사라져버릴 거라는 두려움도 느끼게 돼. 이 두 감정은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p.69)


-계획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야. 사실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거든. 실제로는 바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매순간 아주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구. 친구가 된다거나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아마도 내가 말한 경우에 해당되겠지.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없는 거야. 누군가가 죽었을 경우에도 그걸 알 수가 있지. 하루, 한 달, 또는 일 년 동안 사람들이 통곡하며 애도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죽은 자는 영원히 죽은 거야.(p.71)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 불어댈 뿐이지.(p.79)


-내가 말했다. “크눌프, 자넨 사상가야. 교수가 되었더라면 좋을 뻔했어”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언젠가 구세군이 되는 게 가능한일일걸”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농담할 생각은 하지 말라구! 성인도 한번 되어보고 싶다고 하지 그러나?(p.81)


-즐겁던 마음은 사라지고 난 수치심과 슬픔에 온통 휩싸였다. 지금 나의 친구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의견에 반박하면서, 내가 그의 영혼을 조금은 이해하고 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이제 그는 떠나버렸고 나는 홀로 실망한 채로 남아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비난하며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크눌프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맛볼 거라고는 전혀 믿고 싶지 않았었다. 고독은 쓰라린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날만 그랬던 게 아니다. 그동안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 날 이후 고독이 나를 완전히 떠난 적은 없었다.(p.90)


-저녁 늦게 우리는 덤불 숲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마주 앉아 각자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쉬첸 소시지 반 개씩을 들고 먹으면서 밤이 깊어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낮은 언덕들은 석양을 받아 노랗게 빛나며, 솜털처럼 부드럽고 밝은 광선 속에 아련하게 녹아 있는 듯 하더니, 이제는 벌써 시커멓고 뚜렷한 자태로 나무들과 산등성이와 덤불 숲을 하늘 위에 까맣게 그려놓고 있었다.(p.74)


-시월의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가볍고 햇빛 가득한 대기는 가끔씩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들판과 정원 쪽으로부터 가을 벌판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푸르스름한 연기가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머뭇머뭇 다가오면서, 주변을 잡초와 어린 나무가 타는 매우 향긋한 냄새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을 정원에는 진한 빛깔의 과꽃 덤불, 때늦은 창백한 장미와 달리아가 피어있었고, 울타리 이곳저곳에서는 이미 하얗게 빛 바랜 잡초들 사이에서 새빨간 자작나무버섯이 벌써부터 활활 타오르듯 돋아 있었다.(p.91)


-“자네 그리 젊어보이질 않는군, 크눌프. 우린 둘 다 이제 겨우 사십대인데 말야. 그리고 자네가 날 그냥 지나쳐 가버리려고 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야. 그런데 말야, 자네에겐 어쩌면 의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p.95)


-“그건 두고 볼 일이야. 정원에 아직 해가 비치고 있는 동안에는 햇빛 아래 앉아 있도록 하게. 리나가 자넬 위해 손님용 침대를 준비해 둘 걸세. 우린 자넬 철저히 감시해야겠네. 크눌프. 평생을 햇빛과 공기 속에서 보낸 자네 같은 사람이 하필 폐가 망가졌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야.(p.97)


-크눌프는 열한 시간을 자고 난 후, 안개 짙은 아침에 침대에 혼곤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누구네 집에 있는 것인지를 차츰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해가 뜨자 마홀트는 그가 일어나도 좋다고 허락했고, 식사를 마친 그들 두 사람은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햇빛 가득한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좋은 식사와 포도주로 원기를 회복한 크눌프는 말이 많아졌다.(p.98)


-“그래, 자네는 자네가 살아온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나?”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겠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네 같은 친구한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야 할 걸세. 자네가 신부나 교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 해도, 아마 자네 정도면 자연 연구가나 싱인 정도는 되었을 걸세. 자네가 자네의 재능을 잘 이용하고 개발해 왔는지 어떤지는 내가 알 수 없네만, 자네는 그걸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어, 그렇지 않은가?”(p.98)


-그녀에 대한 험담은 하고 싶지 않네. 일이 제대로 진행되었더라면 난 아름답고 행복한 방식으로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덕에 독일어 학교도 잘 다니고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왜냐하면 말일세, 글쎄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까? 그래, 그때 이후로 난 많은 친구와 친지, 동료와 사랑까지도 얻게 되었지만, 더 이상 사람의 약속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p.106)


-다음날 아침엔 안개가 짙었다. 크눌프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몇 권의 책을 가져다 놓았지만 그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불쾌하고 답답했다. 왜냐하면 세심한 간호를 받으며 편안한 침대에서 좋은 음식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전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느끼게 된 때문이었다.(p.109)


-“자넬 생각하면 정말로 안타까워. 자네 알지, 크눌프. 난 분명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에 씌어 있는 말은 진심으로 믿는다구. 자네도 생각을 해봐야 해. 자네는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걸세. 자네에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어. 그런데도 자넨 아무것도 되지 않았잖아.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선 안 되네.(p.127)


-이제 곧 알게 되겠지, 샤이블레. 하느님은 아마 날더러 너는 왜 판사가 되지 않았느냐? 하고 묻지 않으실 거야. 아마도 그 분은 그냥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네가 다시 왔구나, 이 철부지야? 그러시면서 저 위에서 애를 보게 하시거나, 뭐 그런 쉬운 일을 맡기실 거야.(p.127)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p.133)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p.134)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결국 맞는 말씀이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모두 제가 아직 젊었을 적, 옛날 이야기입니다! 전 왜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훌륭한 인간도 못 되었을까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한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든 일이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니?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보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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