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을 봤다. 엔딩이 올라가는데 마음이 요동쳤다. 슬픈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끝나자마자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였다. 10점 만점에 9점을 준다.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나온 감독의 11번째 영화. 제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감독은 또 다른 사랑을 보여줬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데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리는 말. 그것은 무엇일까. 사랑해라는 정확한 말보다 때론 스치면서 했던 말들이 '사랑한다'라고 들릴 때. 사랑은 더 파괴적이고 지독하다. 장해준(박해일)은 송서래(탕웨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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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한마디에 서래의 사랑은 시작된다. 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서래는 그 어떤 말보다 진하게 들린다.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해준의 말이 녹음된 파일을 듣고 또 듣는다. 중국인으로 한국말이 서툰 서래는 한국인 남자 기도수(유승목)와 결혼했다. 서래는 엄마의 부탁을 받고 독립운동을 했던 외조부 계봉석의 산을 찾기 위해 한국에 밀입국했다. 할아버지의 나라는 그녀에게 가혹한 땅이 된다.
남편 기도수는 소유욕이 많다. 자신의 물건마다 KDS라는 이니셜을 새긴다. 지갑, 위스키 통, 핸드폰에도 새긴다. 심지어 서래의 몸에도. 거실에는 클래식 LP 판이 가득 진열되어 있고, 위스키 병도 나란히 놓여있다. 그는 암벽등반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교묘하게 서래의 뼈를 골절시키고 안 보이는 곳마다 수많은 멍자국을 남긴다. 서래는 남편의 협박과 구타에 무방비 상태다. 기도수의 겉모습은 자연을 사랑하고, 클래식을 듣는 교양있는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이 있어 산에 가기 싫다는 아내를 무지막지 학대한다. 말로 5번 교향곡을 듣지만 그는 쓰레기다.
요양보호 간호사로 일하는 서래는 집집마다 방문해 어르신들을 간병한다. 손끝이 야무진 서래는 마사지도 시원하게 잘하며, 주사도 잘 놓고, 정성스럽게 일한다. 할머니들은 그녀가 손녀딸인지, 간병인인지 모를 정도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더 이상 남편의 학대를 견딜 수 없자 죽일 방법을 찾는다. 서래가 조사실에서 했던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은 '마침내 죽였습니다'처럼 들린다. 젊은 여자, 외국인, 서툰 한국어, 밀입국자의 조건을 가진 서래. 그녀는 과감하고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형사 해준은 비금봉 정상에서 추락한 변사사건을 맡는다.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10초 동안 바라본다. 서래를 보고 첫눈에 끌려버린다. 그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동요치 않는 서래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라고 말한다. 남편이 죽었는데 저렇게 담담할까 품었던 의심은 그녀를 관찰하며 점점 옅어진다. 그러나 후배 형사 수완(고경표)는 계속 서래를 의심한다. 서래는 자신의 엄마를 죽인 여자라며, 용의자로 수사할 것을 권한다. 해준이 뜨뜻미지근하자 수완은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라고 하지 않았냐며 소리친다. 선배 형사가 여자에게 휘둘리는 거 같아 못마땅한 후배. 촉이 좋다. 둘의 케미가 유쾌하다.
그녀가 '꼿꼿하다.'라고 생각하는 해준. 호들갑스럽지 않고, 우아하다. 해준은 서래에게 죽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말씀으로 드릴지 사진으로 볼지를 묻는다. 서래는 "말씀"이라고 했다가 "사진"이라고 정정한다. 사진이라고 말하자 해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마 이 순간 해준은 서래가 같은 종족임을 눈치챈다. 죽은 시체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겠다는 의지. 해준은 그녀가 마음에 든다. 말은 공허하고 사진은 정확하다.
해준은 서래를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주변을 돌며 잠복근무를 선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잠드는 서래. 식후 담배를 피우는 서래. 할머니들 간병에 정성을 다하는 서래. 그녀의 '실루엣'이 아름답다. 점점 그녀에게 스며드는 해준이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해준은 잠이 잘 온다. 평생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말이다. 해준에게 서래는 편안한 여자였다. 세상 모든 걱정을 서래에게 맡겨도 좋을 만치.
해준은 서래가 월요일마다 간병하는 이해동 할머니(정영숙) 핸드폰 앱에서 '138층'이라는 숫자를 발견한다. 날짜를 보니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이다. 해준은 왜 이날 138이 찍혔는지 의심하며 서래의 손바닥이 거칠었던 기억과 연결시킨다. 해준은 재수사를 한다. 그는 서래가 할머니 핸드폰을 바꿔 산 정상에 올라갔고, 바위에서 남편을 밀었음을 확인한다. 서래는 팜므파탈이었을까.
그에게 접근해 집에 드나들게 만들고, 같이 요리도 하고, 해준이 갖고 있던 증거들을 자연스럽게 지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해준은 그녀에게 이용당했다고 말한다. 서래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지만 해준은 "우리일?"이라고 반문한다. 해준은 여자에 미쳐서 일을 망친 자신을 탓하며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냐며 묻는다. 자신은 형사라는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며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한다. 그녀의 계획에 당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해준은 감정을 응축해 말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저 말은 형사가 범인을 잡지 않겠다는 뜻이다. 해준은 형사로 살아온 자신의 신념이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라는 태도로 살아온 해준. 사건 현장에서 죽은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들이 마지막 봤을 범인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하는 해준.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사건을 꼭 해결하겠다는 철칙을 갖고 있는 형사였다.
그런 그가 그녀를 놓아준다. 해준은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반면, 서래는 이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자신을 품위 있게 대해줬던 단 한 사람. 심문하며 시마스시 모둠초밥을 시켜줬던 사람. 양치하라고 칫솔도 주고, 방수밴드도 건네는 사람. 중국식 요리를 만들어줬던 사람. 중국어를 배워 "예뻐"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걸 아는데도 풀어준 사람. 서래는 그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형사라는 신분을 버리고 자신의 범죄를 감춰주기 위해 한 말.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는 서래에게 "당신을 사랑해"라고 들린다. 그녀를 뒤흔든 말.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서래. 1부는 여기서 끝난다. 13개월 후.
해준과 서래가 '이포'(가상의 도시)에서 재회하며 2부가 시작된다. 서래와 헤어지고 우울증에 걸린 해준은 아내 안정안(이정현)이 있는 이포로 발령을 받아 내려온다. 서래는 해준이 이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 번째 남편 이무신(박용우)과 이사를 온다. 해준은 아내와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고르다 서래와 그녀의 남편 임호신(애널리스트)과 마주친다. 서래의 등장에 당황스러운 해준. 해준은 서래를 보고 심장이 뛰었을까. 살아있는 것처럼 느꼈을까. 서래는 과감하다. 경찰서에 들어가 해준을 보기 위해 비상벨을 누른다.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 속에서 해준을 보고 그녀는 애플워치에 녹음을 시작한다. '구두를 신었네.' '깔끔한 사람이 머리도 안 자르고 면도를 안 했네...' 서래의 사랑은 자극적이며, 솔직하다. 며칠 후 서래의 남편이 살해된다.
서래의 남편은 칼에 찔려 죽었다. 배와 가슴에 13군데, 등에 4군데. 서래는 사건 현장을 훼손한다. 이곳에 와서 수사를 할 형사 해준을 위해서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피많은 현장이에요."했던 해준의 말을 서래는 기억한다. 서래는 해준이 싫어하는 피비린내를 물 호스로 뿌려 지워놓는다. 이무신은 왜 피살되었을까. 남편은 서래가 듣는 녹음 목소리가 해준이라는 걸 알고 협박한다. 이 녹음이 공개되면 해준은 위험에 처해진다. 파일은 형사가 살인 용의자를 검거하지 않고, 도주를 도왔다는 증거가 된다. 해준을 파멸시킬 순 없다. 그녀는 또다시 살인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사철성(서현우) 어머니를 죽인다. 남편을 없애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이번 이포 살인사건을 맡은 형사 연수(김신영)는 자꾸 해준에게 불편한 질문들을 한다. 해준이 서래를 의심하자 "그 여자 불쌍하지도 않습니까"라며 묻는다. 이번 살인사건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해준은 비장하다. 그는 바닷가에 서 있는 서래에게 다가가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라고 묻는다. 이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말한다.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대답한다. 결국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해준은 뒤늦게 알게 된다. 사철성의 엄마도 남편도 모두 자신과 연관 있어 죽었다는 걸 말이다. 해준은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서래 차례다. 그녀는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해준에게 자신은 방해물일 뿐이다. 그녀는 해준을 지켜줄 방법을 선택한다. 또한 자신을 미해결 사건으로 남겨두면 해준은 두고두고 자신을 기억할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녀의 행동은 파도처럼 거세다.
영화는 퍼즐처럼 풀어진다. 결국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왔구나 생각했다. 바닷가에서 해준이 서래를 찾는 장면. 압도적인 엔딩이다. 파도는 사랑처럼 해준에게 밀려온다. 바다는 해준의 마음처럼 일렁인다. 서래의 핸드폰에 저장된 녹음파일의 제목 '무너지고 깨어짐'을 누른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서래는 삶이 괴로울 때마다, 자신이 불쌍할 때마다, 남자들에게 맞을 때마다 그의 사랑고백을 듣고 또 듣는다. 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버티며 산다. 술을 마시고,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녀에겐 해준이 있었다.
서래는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고, 자살을 선택한다. 서래가 들은 해준의 마지막 말은 "어휴 답답해. 왜 자꾸 딴소리를 해요. 서래 씨 어디 가요?"이다. 그러나 서래가 죽어가는 순간에 해준도 모래사장에 도착한다. 바로 서래가 있는 그곳에서 "서래 씨 서래 씨 어디 있어요?" 해준은 목이 메게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서래는 저 소리를 들었을까. 아마도 들었을 것이다. 해준이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소리를. 해준은 파도치는 물결을 걸으며 넘어지고 쓰러진다. 해가 지는 바다는 컴컴해져 간다. 안 보이려는 찰나. 정훈희, 송창식의 <안개>가 들려온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노래는 마치 이승과 저승에서 해준과 서래가 주고받는 말처럼 들린다.
둘의 사랑은 안개 같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사랑한다는 단 한마디의 말도 안 했지만 둘은 태양처럼 뜨겁다. 해서는 안 될 사랑. 금지된 사랑을 해준과 서래는 해버렸다. 형사와 용의자로 만나 수갑을 같이 차고, 심문과 탐색을 하며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 해준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서래는 기꺼이 용의자가 된다. 그가 이포에서 시켜준 핫도그는 서글펐지만... 그녀는 해준의 '붕괴'에 가슴 아팠다. 바다에 버리라던 폰을 다시 해준에게 주며 명예를 회복하라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해준의 불면증에 자신의 잠을 건전지처럼 빼주고 싶어 하는 서래.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정확히 아는 서래. 다시 사는 거 같은 마음까지 알아버리는 서래. 해준은 드디어 눈을 떴다. 서래와 자신의 사랑을.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