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 감독)가 그랬다. 마지막을 보고 앞으로 되감기 하고 싶은 영화였다. N관람을 했다. 영화는 총 11개의 시퀀스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11번째에 가서야 여기가 현재 시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엔딩을 제외한 장면들은 전부 과거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마지막에 가야 알게 된다. 때문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치매환자였다. 맞다. 그걸 놓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모든 장면은 치매환자의 기억 또는 망각이었다. 사실과 망상을 구분하려면 첫 씬부터 다시 돌려 꼼꼼히 '느껴야' 한다. 여기서 '분석하다'가 아닌 '느낀다'라고 했다. 어차피 분석은 어렵다.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 치매환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보여주는 장면들은 상당히 왜곡된 기억일 것이다. 분석해봤자 '참'을 가려내기는 어렵다. 어쩜 불가능하다. 그걸 감독은 의도했다. <더 파더>를 처음 볼 때는 알츠하이머의 뇌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봤더니 <더 파더>는 환자의 '심리'를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치매에 걸렸다'면 그 순간부터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기 이름도 모르고, 딸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웨터 입는 방법도 까먹는다면? 당장 어제 일도 생각나지 않고, 1분 전에 말해준 것도 기억 못 한다면 남은 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치매는 노인이 걸리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더 파더> 주인공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치매와 사투 중이다.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안소니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잃어가는 자신의 인지능력이 무섭다. 안소니는 모든 것들이 낯설다. 여긴 분명 내 집인데, 사위라는 사람은 자기 집이라고 하니 안소니는 황당하다. 그는 딸(앤) 얼굴도 헷갈려한다. 분명 딸 얼굴은 저렇게 안 생겼는데 엉뚱한 여자가 앤 이란다. 앤서니는 어이가 없다. 전부 뒤죽박죽 엉켜져 버렸다. 정확한 게 하나도 없다. 안소니는 여기는 어디이며,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을 믿을 수 없다. 불확실은 삶을 두렵게 만든다. 치매는 자기를 점점 잃어가는 병이다. 컴컴한 미로 속 같은 안소니의 '마음'을 다룬 영화 <더 파더>를 지금부터 느껴보자.
치매라는 용어는 라틴어 'demens'(디멘시아)에서 유래된 말로 '정상적인 마음에서 이탈된 것', '정신이 없어진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치매는 정상적이었던 뇌가 손상되어 망상, 환청, 인지기능의 저하를 가져온다. 치매 증상을 알면 영화가 더 잘 보인다. 치매 초기 증상은 기억력 감퇴부터 시작된다. 이어 언어능력 감소, 시공간 감각의 저하, 판단력 저하, 행동 및 정신 장애, 신체상의 장애를 가져온다. 디멘시아에 걸린 연기를 누가 할 것이냐. 감독은 안소니 홉킨스를 선택했고, 그는 디멘시아를 앓는 80대 노인 '안소니'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아마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지도!). 이미 <더 파더>는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와 <노메드랜드>와 동일하게 6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어 있다. 현재 안소니 홉킨스는 84세이다. 그는 <양들의 침묵>으로 1992년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두 교황>, <킹 리어> 등 플모그래피가 화려하다. 오십 평생 배우의 길을 걸은 안소니 홉킨스는 <더 파더>에서 빛이 난다.
플로리안 젤러(1976년 생) 감독은 <더 파더>가 데뷔작이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에 시나리오 작가였다. <더 파더>는 그가 쓴 동명의 연극에서 탄생한 심리 드라마이다. 이미 연극무대에 <더 파더>는 프랑스 토니상이라고 불리는 몰리에르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연극이 영화화되면서 감독까지 맡게 된 경우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스물여섯에 <악의 매혹>으로 프랑스 콩쿠르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감독은 밀란 쿤데라, 르 클레지오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하다. <더 파더>의 각본은 크리스토퍼 햄튼이 맡았다. 크리스토퍼 햄튼은 이미 유명학 각본가이다. <어톤먼트>, <위험한 관계>로 1989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다. 앤을 맡은 올리비아 콜맨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철의 여인>에서 2019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명배우와 명연출팀은 아버지와 딸의 호흡을 긴박하게 끌고 간다.
영화는 치매환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증상을 11개 시퀀스에 담았다. 첫 장면은 안소니가 클래식을 듣고 있다. 혼자 있는 걸로 봐서 치매 초기 단계였겠다. 큰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빠른 걸음으로 아버지 집(앤의 집일 수도 있다)을 찾아와 안젤라(간병인)를 왜 내보냈냐고 묻는다. 안소니는 간병인이 손목시계를 훔쳤다고 하자, 앤은 벌써 몇 번째냐며 한숨을 쉰다. 간병인과 지내기 싫으면... 하더니 말꼬리를 흐린다. 앤은 더 이상 아버지를 돌볼 수 없다. 앤은 떠날 예정이다. 안소니는 당황한 눈빛에 손까지 떨더니 "난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묻는다. 앤은 이해해달라며 고개를 떨군다. 보호자였던 앤마저 떠난다면, 안소니는 혼자 남는다. 공포스럽다. 안소니는 버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안소니는 두 딸이 있다. 큰 딸은 앤, 둘째 딸은 루시이다. 안소니는 앤보다 루시를 더 예뻐했던 거 같다. 자꾸 루시랑 앤을 비교한다. 앤에게 "넌 원래 그래. 걱정이 태산이지. 동생하고 딴판이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종일관 루시는 지금 어딨냐며, 소식을 들었냐며 앤에게 묻는다. 화가였던 루시는 사고로 사망했다. 안소니에게 둘째 딸의 죽음은 일생일대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은 자식의 죽음을 겪는 거겠지. 그것도 젊은 나이에 사고사였다면. 그래서인지 안소니는 딸의 죽음을 모른다. 루시의 죽음이 고통스러웠던 아버지는 그 기억을 지어버렸다. 영화에서 아내는 등장하지 않는다. 추측이지만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난 거 같다. 가족사진에도 아버지와 두 딸뿐이다. 아마도 안소니는 홀로 딸들을 애지중지 키웠을 것이다. 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간병인과 잘 지내지 못하는 앤은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온다. 당연히 앤의 남편 제임스는 못마땅해한다. 그는 장인어른 때문에 일상이 꼬이는 게 싫다. 장인은 사위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꾸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우기고, 잠깐이라도 보호자가 없으면 곤란한 상황이다. 아내 앤이 없을 땐 자기가 장인을 돌봐야 한다. 간병인을 두고 아내와 여행을 가려해도 '일부러' 그러는지 귀신같이 말썽을 부린다. 아내의 모든 초점은 아버지에게로 향해 있다. 요양원에 모시자고 말해도 앤은 간병인을 쓰자고 고집을 부린다. 제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아마도 부부는 이 문제로 오랫동안 싸웠을 것이다. 안소니는 사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잊고 싶은 얼굴이었겠다. 안소니는 '폴'이라는 작자가 자기 뺨을 때리는 걸 기억해낸다. 아마도 사위 제임스가 때렸을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어느 날 앤은 아버지를 때리는 남편을 봤고, 앤은 이를 계기로 이혼한다. 영화는 이런 정황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남편의 행동을 알게 된 이후 화면이 바뀐다. 비워진 책장들과 박스들, 이삿짐처럼 보이며 둘이 헤어졌음을 암시한다.
디멘시아를 겪는 80대 노인이지만 몇 가지는 확실한 기억을 갖고 있다. 유년시절에 비닐봉지를 갖고 놀았던 기억이다. 밖에 어떤 아이가 비닐봉지에 바람을 넣어 공처럼 가지고 논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안소니의 시선이 따뜻하다. 자신도 저렇게 놀았는데.. 어린 시절이 그립다. 마트 물건을 빼내고 비닐봉지를 주머니에 챙기는 걸 보면 어릴 때 습관이 아직 남아도 있다. 탭댄스도 몸이 기억하는 것 중 하나다. 엔지니어였지만 취미로 쳤던 탭댄스를 새로 온 간병인 앞에서 선보인다. 앤은 처음 보는 풍경이다. 아버지가 언제 탭댄스를 쳤냐고 묻자 '네가 뭘 안다고 그래?'라고 반문한다. 그렇지. 자식은 부모의 생을 잘 모른다. 자식은 아버지라는 역할만을 기억할 뿐 아버지가 걸어온 삶의 시간들을 잘 모른다.
앤은 혼자서 아버지를 정성껏 모신다. 효심 가득한 딸이다. 앤은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노년이 슬플 뿐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딸도 못 알아본다. 아버지는 거실 벽에 걸려 있던 로라 그림은 어디 있냐고 묻는데, 그건 아버지 집에 있는 그림이라고 앤은 설명해야 한다. 매번 이런 상황이 반복될 텐데도 앤은 애틋하게 아버지를 대한다. 앤은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이혼하고 아버지를 모셨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파리로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앤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시킨다. 아버지를 요양원 작은 방에 두고 나오는 딸의 심정은 아팠을 것이다. 차를 타고 오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마지막 시퀀스 장소는 요양원이다. 안소니는 요양원에 입원한 지 몇 주가 지났고, 주말마다 파리에 사는 앤은 아버지를 방문한다. 앤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커피와 차, 과자를 사놓고 갔다. 일어났더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안소니. 다시 아침이 시작되었고, 원점의 상태부터 출발한다. 안소니는 거실로 나간다. 거실이라고 나간 곳은 요양원 복도다. 너무 놀란 안소니는 문을 확 닫아버린다. 여기가 어디인지 또 혼란스럽다. 어제도 이곳에서 지냈을 안소니는 또다시 기억과의 전쟁이다. 당신은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간호사 캐서린(올리비아 윌리엄스)이 들어와 불안해하는 안소니를 안심시키며 약을 먹자고 다독인다. 간호사는 침구를 정리하고, 안소니를 소파에 앉히더니 앤이 보내온 엽서를 보여준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안소니의 아침 풍경이다. 안소니는 처음 겪는 일 같지만 간호사는 매번 이런 안소니를 다독였을 것이다.
안소니는 갑자기 간호사에게 자기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간호사는 당신은 '안소니'라고 알려준다. 안소니는 다시 새롭게 알아가야 한다. 안소니는 간호사에게 당신 이름은 뭐냐고 묻는다. 간호사가 캐서린이라고 대답했지만, 안소니는 5분 후에 다시 물을 것이다. 기억할 수 없다. 육체는 멀쩡한데, 정신이 아프다. 치매라는 슬픈 병은 삶을 무너뜨린다. 보호자였던 딸은 없고, 간호사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안소니는 어린아이가 된다. 엄마가 그립다. 안소니는 고단했던 삶을 이제 놓으려는 거 같다.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보고 싶다며 흐느껴 우는 안소니.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 잎사귀들이 흔들거린다. 안소니는 요양원 병실에 갇혀 있지만 시간은 계속 흐른다. 여름날은 화창하고, 세상은 변함없이 흐른다. 인간은 태어났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탄생과 죽음. 노년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노년은 슬픈 시간이다. 생이 소멸하는 마지막 시간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