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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y 20. 2021

백수린 소설 <여름의 빌라> 리뷰

백수린 소설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 2020.


백수린 작가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이후 나온 세 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

8편 수록.

<시간의 궤적>(젊은작가상), <여름의 빌라>(문지문학상), <고요한 사건>(젊은작가상), <폭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현대문학상), <흑설탕 캔디>, <아주 잠깐 동안에>,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는 총 8편의 단편이 들어 있다. 주인공들은 다소 소심하고 조용하고 단정하다. 대신 주변 인물들은 입체적이며 돋보인다. 왜일까? 주인공들이 주변 인물들을 선망하거나 자신의 삶을 반추해서일까. 우선 화자와 친밀한 인물들을 보면, <시간의 궤적>의 주재원 언니는 세련되게 그려졌고, <여름의 빌라>의 한스 부부는 인품이 넉넉하다. <폭설>의 화자 엄마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녔고, <흑설탕 캔디>의 할머니도 손자들 모르게 로맨틱한 사랑을 한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도 화자의 날라리 친구 다미가 더 성숙해 보인다.


  <여름의 빌라>의 공간적 배경도 광범위하다. 세계 여러 도시가 등장한다. 백수린 작가의 이력을 보면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리옹 2대학 불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으로 <시간의 궤적>은 프랑스 파리가 주 무대이고 잠깐 노르망디도 나온다. <흑설탕 캔디>도 파리이고, <여름의 빌라>는 독일과 캄보디아가 배경이다. 특히 앙코르톰의 바욘 사원과 톤레사프 호수 수상가옥이 나온다. <폭설>은 미국 시카고 근교 글렌뷰라는 백인 중산층 도시가 나오고, 마크트웨인국유림, 그랜드티턴국립공원, 옐로스톤공원까지 등장한다.


  단편들은 자신을 흔들어 놓는 사건과 마주한다. <시간의 궤적>에서 화자는 8년 사귄 남자와 헤어지고 무작정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프랑스 남자 브리스를 만나 결혼한다. <여름의 빌라>에서 주아는 한스로부터 캄보디아에서 만나자는 초대를 받아 남편과 가게 된다. 남편을 동반한 여행은 왠지 모르게 어석거린다. <폭설>도 화자가 열한 살 때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미국으로 가버렸다. 화자에게 엄마의 부재는 텅 빈 상실감을 낳는다. <흑설탕 캔디>도 할머니가 프랑스에서 어떤 남자랑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으며 화자는 의아해한다.  

제목과 어울리는 빌라

 단편들은 말이 화근이 되어 관계를 삐거덕 거리게 만든다. <시간의 궤적>은 프랑스에서 사귄 언니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함께 마지막 여행을 간다. 숙소에서 화자는 뼈 때리는 말을 한다. 언니가 결혼한 옛 애인을 못 잊고 전화를 하는 걸 두고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p.36)라고. 이로써 둘의 관계는 깨진다. <여름의 빌라>도 한스 부부가 초대한 캄보디아 '여름 빌라'에서 맥주를 마시다 의견 차이를 보인다. 낮에 톤레사프 호수 수상가옥을 보고 온 한스가 "불행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의 천성이 경이로워"(p.62)라고 하자 주아의 남편 지호(독일정치사 전공)는 그들은 즐거운 게 아니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갈 뿐인 거죠."(p.63)라고 받아친다. 긴장감 팽팽한 둘의 대화에서 결국 지호는 한스의 주장에 "개소리"(p.65)라고 뱉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슬픈 한스의 부인 베레나는 울고 만다.


  그러나 어떤 말들은 인연을 만들어 준다.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의 화자는 친구 한나가 레스토랑을 열어 축하해 주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한나의 후배 발레리노를 만난다. 발레리노는 처음 본 주인공에게 "너무 아름다운 골격을 가지셔서 그래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 말을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p.164) 한다. 그녀는 쿵쾅거린다. 아이 둘을 낳고 육아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녀에게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이란 타이틀을 가진 발레리노가 해준 말은 감췄던 욕망을 들썩거리게 만든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에서 중학교에 전교 일등으로 들어온 화자(윤아)는 다미를 만난다. 다미는 교무실에서 혼나고 있었고 밖은 비가 내렸고 둘은 우산을 함께 쓰게 된다. 이날 다미가 윤아에게 "너도 보러 갈래?"(p.249)라는 말을 했고 윤아는 따라간다. 둘이 보러 간 건 바바리맨의 처진 성기였다. 다미의 말은 이후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든다.


  8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 여성들이다. <시간의 궤적>은 서른 즈음이며, 외국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며 프랑스에서 살아갈 자신을 고민한다. <여름의 빌라> 주아와 지호도 30대 독일 유학 생활을 거쳐 현재 시간강사 생활을 하며 아이 낳기를 미루는 상황이다. <폭설>의 주인공은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그녀를 조급하게 했다'(p.127). 정신상담까지 받았던 화자는 서른이 되어 엄마랑 여행을 결심하며 층층이 쌓인 앙금을 흔들고 싶어 했다. 엄마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였는지, 사랑이 그렇게 중요했는지 근원적 질문을 말이다.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는 서른을 조금 넘은 거 같은 화자인데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육아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올인하는 자신을 본다. 팽팽했던 젊음은 가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자신도 허물어지는 건 아닌지 상념에 젖는다. 공사장 젊은 인부를 보고 잊고 있던 성적 충동이 올라오는 걸 보고 당황해한다.


 <흑설탕 캔디>는 화자가 프랑스에 온 지 20년이 지났으니 서른 중반쯤(36세) 된다. 동생 상우는 결혼했지만 자신은 아직 미혼이다. <아주 잠깐 동안에>는 상가건물에 살다 전세 아파트를 구해 이사 온 부부들 이야기다.(가장 현실적인 소설이며 화자는 남자 주인공이다.) 아내 여주는 임신했고, 화자는 세탁기를 리어카로 끌로 가는 노인을 잠깐 돕는다. 집 장만하는 과정이 짧게 묘사됐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유나는 은행 차장이 되어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니 서른 즈음으로 보인다.


<여름의 빌라>와 어울리는 꽃

 소설은 삼십 대라는 나이를 조망하며 그 시절에 겪을 성장통에 대해 말한다. 삼십 대는 대학을 졸업(박사까지 하면 더욱 길다)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하면서 폭풍 변화가 있는 시절이다. 자녀를 낳고 엄마가 되고, 창업을 하거나 집 장만을 한다. 외국에 나갔다 현지인과 결혼도 결정한다. 청춘은 갔고, 중년의 삶이 다가오는 시절. 순수했던 관계들은 소원해지고, 별것 아닌 것들로 사이가 틀어지고 오해를 낳는 시기도 포함된다. 먹고 사느라 바빠 엉킨 실타래를 풀기도 어렵다. 타인보다 자신에게 초점이 가 있는 특징도 있다. 삼십 대를 거친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부딪힌 경험으로 '삼십 대의 초상'을 농밀하게 그려냈다.  


  삼십 대는 아니지만 아름다웠던 인물은 <흑설탕 캔디>의 할머니이다. 할머니 장례를 치를 때 장례식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화자에게 "아이고, 너네 할머니는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산 여자잖냐."(p.175)라고 떠드는데 어쩜 이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폭설>의 엄마이다. 네 번째 할머니 기일날 화자는 남동생 상우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4년 정도 프랑스에 살 때 아파트 일층에 살던 할아버지 브뤼니에 씨랑 할머니가 사귀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디슨 카운터의 다리> 같은 로맨스가 연상된다. 가족들도 엄마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가 남긴 유언을 보고 사진작가와의 사랑을 알게 된다. <흑설탕 캔디>도 할머니 일기장에서 발견되는 구도가 <매디슨 카운터의 다리>랑 닮았다.


 손녀는 할머니 일기 중 파리 생활에 해당하는 일기를 본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을 졸라 대학에 들어갔지만 선을 보고 결혼하면서 자퇴를 한다. 손녀 눈에 할머니는 세련된 분으로 묘사된다. 할머니는 일본어도 능숙했고, 일본식 계란찜도 잘 만들었다. 에델바이스를 영어로 부를 줄 아는 할머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음악학부에 진학했던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바이엘 상하권을 가르쳐준다.  둘째 아들 손주들을 돌보면서 노년을 보냈을 할머니. 프랑스어도 모르는데 파리에서 고독하게 지냈을 할머니. 그러나 1년 정도 일층 할아버지와 각설탕처럼 달콤한 연애를 한다.


  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봄, 여름 계절이 많이 나온다.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의 시기를 통과하는 어른들. 그들이 겪는 나름대로의 고민과 어려움이 작품에 일관되게 연결된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고, 미래가 막막한 그들에게 백수린 작가는 조용히 말을 건다.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선택해서 살면 된다고. 30대가 되면 근사한 세계가 펼쳐지고 기반도 집히고 안정된 생활이 시작될 거 같지만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내가 원했던 게 정말 이것인지 갈등한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막막하고 뒤로 가자니 온 길이 아깝다. 이에 작가는 <폭설>의 엄마처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의 다미처럼, <흑설탕 캔디>의 할머니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거 같다. <시간의 궤적>에서 주재원 언니가 화자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p.23).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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