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길에 퇴임사를 떠올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하며 청와대를 떠나던 날,
마지막에 남긴 말이 있다. 길고 장엄한 연설이
아니라 뜻밖에도 이런 말이었 다.
“야아, 기분 좋다.”
권력의 중심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가 내뱉은 말은
놀랄 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그 짧은 말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말로 다못할 책임감을 내려놓으며 드디어 자연인으
로 돌아가는 해방감이 함께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함께 근무한 교장선생님의 퇴임식에서도
비슷한 울림의 말을 들었다.
“이제는 '척'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
인품 있는 어른인 척, 너그러운 사람인 척, 다 아는
척, 늘 이해하는 사람인 척하며 그 자리에 있는
동안은 그런 얼굴들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살아야
했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었지만 이후로도 '척'하느라
힘들었다는 교장선생님의 겸손어린 고해성사는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그분은 '척'하지도 않았고 누가 봐도 이해심
많고 지혜롭고 합리적이며 리더다운 리더였다.
나는 '척'했다'는 조금은 희화된 그 말을 다르게 이해해 본다.
어떤 자리는 사람에게 여러 겹의 얼굴을 요구한다.
어느 집단이든 관리자라는 자리는 더욱 그렇다.
관리자는 한편으로는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품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때로는 단호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한없이 너그
러워야 할 것이다.
학교 안의 수많은 이해와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기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관리자는 조금씩 ‘척’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잘 모르는 일 앞에서도 침착한 얼굴을 해야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평정한 목소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위선이라기보다 그 자리에 맡겨진 책임감으
로 모두를 위해 요구되는 태도 같은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척' 하기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덧대어져 조금 다른
'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풋내기 교장이 첫출근길에 문득 두 분의 퇴임사가
떠오른 건, 한편 무섭게 느껴지는 첫날의 무게감과
두려움으로 차를 돌려 달아나 버릴까 싶어지는
탓이었을 것이다.
“야아, 기분 좋다.”
“이제는 척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두 분의 이 말이 단순한 해방의 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의 시간들이 정직했기 때문이다.
책임을 회피하며 버틴 시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다하려 애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겨진 질문은 이것이다.
언젠가 나도 그런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으
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해야한다.
거창한 답은 없다.
다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보다 함께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학교는 누군가가 위에서 완성된 답을 내려주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람을 먼저 보는 것이다.
학교의 일은 대부분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학교에 온다.
행정과 규칙은 필요하지만, 그 위에 있어야 할 것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척’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관리자라는 이유로 완벽한 사람인 척하기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척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은 퇴임
때만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덜 완벽해 보여도 괜찮다.
대신 더 솔직하고, 더 공정하고, 더 따뜻하려 애쓰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 역시 홀가분하게 그
자리를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정말로 나도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
기분 좋게 웃으며 학교를...
하며 첫날 첫 출근길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를
보면서 두근두근 올라오는 마음에게 속삭여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