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리프트)
암스테르담에 왔다.
맑고 화창한 날씨, 기온은 적당하다.
자전거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지나간다.
도로 위엔 자동차보다 자전거의 물결이 가득하다.
햇살은 운하 위로 모였다 흩어지고, 물 위로는 아름다운 건물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운하는 거울처럼 도시를 비추고, 그 속에 시간은 흐르고 있다.
옛 상인들의 배가 지나다녔을 물길은 이제 관광 보트에 길을 내어주고 있다.
다리를 건널 때, 시원한 바다와 아름다운 풍경들에 시야가 열리고, 물 위로 이어진 아치들은 파도처럼 겹쳐진다. 운하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도시의 숨결을 담는 긴 호흡 같다.
도시의 건물과 외벽들 곳곳에 검은 띠 위에 세 개의 하얀 십자가 XXX 가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경고처럼 보이는 이 문양들의 의미가 궁금하다.
암스테르담의 ‘XXX 깃발’은 성 안드레아스의 십자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세기 시 문장에서 비롯되어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X는 로마 숫자가 아니라 성 안드레아스의 순교를 기리는 표식이다. 세 개의 X는 용기, 결단, 자비를 뜻하며, 이는 1920년대 시의 공식 표어로 채택되었다.
이 세 덕목은 암스테르담이 대화재, 홍수, 흑사병, 전쟁 등을 견뎌온 회복력을 상징한다.
오늘날 이 깃발은 고난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도시의 정신을 보여준다.
또 다른 깃발도 있다. 여섯색깔 무지개깃발이다.
무지개 깃발은 여섯 가지 색으로 구성된 다양성과 평등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1978년 예술가 길버트 베이커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위해 디자인했으며, 각 색은 생명(빨강), 치유(주황), 햇빛(노랑), 자연(초록), 조화(파랑), 영혼(보라)을 의미한다.
이 깃발은 개인의 자유와 정체성을 존중하는 사랑과 포용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퍼져있다.
네덜란드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며 무지개 깃발의 정신을 실천한 나라이다.
요르단 지구 골목을 지날 때는 성소수자 지지자인듯한 사람들이 육색 무지개꽃으로 치장한 자전거를 타고 일렬로 지나가며 손을 흔든다.
그들의 환한 미소와 환대에 나도 손을 흔든다. 이 도시에선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성안드레아스 XXX깃발과 무지개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암스테르담의 풍경은, 이 도시가 지켜온 개방성과 용기를 보여준다.
안네프랑크하우스 가는 길목에 특이한 조형물을 만난다.
성당 앞 광장에 거대한 삼각형의 핑크색 화강암이 햇살을 반사하며 펼쳐진다.
이것은 1987년 카린 단이 설계한 세계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 기념물 호모모뉴먼트이다.
과거 나치 박해 속에서 핑크 삼각형이 성소수자를 구분하는 낙인으로 쓰였던 역사,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차별과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기념물은 세 개의 삼각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운하 쪽으로 계단처럼 내려가 과거의 희생을 추모하고, 하나는 광장 쪽으로 현재의 행동을 다짐하며, 또 하나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한 면엔 시인 야코프 이스라엘 더 한의 문장,
“Naar vriendschap zulk een mateloos verlangen(우정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
이 새겨져 있다.
이 도시의 기억은 현재형이다.
반 고흐 미술관, 한 전시실에서는 고흐의 색다른 그림 한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피에타 Pietà, after Delacroix"
원작은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석판화라고 한다. 고흐는 이를 반전된 이미지로 보고,
자신만의 색과 질감으로 다시 그려냈다.
깊은 푸른색의 마리아와 그 위로 노란빛 하늘이 한층 슬픔을 극대화한다. 어두운 예수의 몸은 차갑지만 거친 붓의 물결 속에서 꺼지지 않는 체온이 느껴진다.
마리아의 얼굴에 고흐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색으로 감당한 고백 같다.
암스테르담은 대단한 도시다
과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일,
오늘의 다름을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도려내고 환대하는 일, 그리고 예술로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일, 그런 것이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일이라고 계속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