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다른 시간이 되어간다

테세우스의 배와 사건의 지평선 사이에서

by 뭉클

조금씩 다른 시간이 되어간다

— 테세우스의 배와 사건의 지평선 사이에서


학교는 말이 늘어난다.

아이의 말, 보호자의 말, 교사의 말,

그리고 그 말을 다시 설명해야 하는 말, 말, 말들.

말은 쌓이는데 이해와 존중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점점 더 말은 많아지고, 마음은 바빠지며 그럴수록

관계는 더욱 예민해진다.

아이들은 날마다 자라고, 어른들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말보다 먼저 움직인다.


요즘 학교는 설명해야 할 일이 유난히 많다.

아동학대와 학교폭력을 이야기하는 항의들.

설명해야 할 말은 쌓여가는데, 설명은 점점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공염불이 된다.

누군가를 쉽게 탓할 수도 없다.

내 아이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부모들은 좀처럼 공정해지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자기 자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입학할 때만 해도 아이들은 서로를 가리지 않았다.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이 자연스러웠고, 같이 어울 리는 일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무리를 짓고

선을 긋고, 서로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너무 조용해서

언제부터였는지 누구도 정확히 눈치채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로 귀환할 때 탔던 배에서 비롯된

철학적 사고 실험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배를 오랫동안 보존했다.

배의 판자가 썩으면 낡은 판자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더 튼튼한 새 판자를 끼워 넣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

어느 순간에는 처음의 판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다.

그렇다면 이제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고대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등장하며,

이후 정체성·변화·지속성을 묻는 대표적인 철학적

질문이 되었다.

썩은 판자를 하나씩 새 판자로 갈아 끼워가며 배를 보존했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판자 하나를 바꿨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두 개, 세 개를 바꿔도 배는 여전히 그 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이 되돌아온다.

"이 배는 언제부터 다른 배가 되었는가?."


학교라는 공간도 이 질문을 반복한다.

말 한마디에 판단 하나, 기준 하나가

판자처럼 조금씩 바뀌어왔다.

“이번 한 번만 바꿔보자."
“요즘은 이 정도도 문제 될 수 있어요.”“보호자들이 민감하니까 조심합시다.”......

판자가 덧대어지거나 삭제되거나 추가 보충하는

런 때에도 학교는 변화 없는 듯 학교처럼 보인다.

여전히 수업은 이어지고, 시종벨은 울리며, 교사도

아이들도 웃고 떠든다.

그래서 그 변화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처음 우리들의 학교는 존재하는가?


물리학에는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개념이 있다.

블랙홀의 경계.

그 선을 넘으면 빛조차 되돌아오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그 선을 넘는 순간에 조차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나서야 알게 된다.

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학교에서 벌어지는 갈등에도

비슷한 순간을 지난다.

어느 날부터 설명은 해명 아닌 변명이 되고,

대화는 설득 아닌 강요로 받아들이며

의도는 늘 의심의 대상이 된다.

상담은 지원이 아니라 간섭으로 읽히고

지도를 위한 남김은 통제로 오해되며

훈육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언어로 번역된다.

사실보다 해석이 앞서고

해석은 점점 더 날카로운 말을 선택한다.

그 지점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조용히

사건의 지평선을 넘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라”는 요구다.

그러나 진심은 문장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서는

사과조차 기록의 언어가 된다.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증명되어야 할 문장이 된다.

그래서 서로가 고개를 숙여도

사과는 쉽게 닿지 않는다.

이미 그 말은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책임을 묻는 도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배운다.

말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침묵이 가장 안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이들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른들이 바꿔 온 판자 위에서 자랐다.

불안이 먼저였고

의심이 그다음이었으며

고발의 언어가 마지막 판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 모든 변화를

환경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한다.

"왜 우리가 문제인가요".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이 말은 변명이기보다

관찰에 가깝다.

모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변화가 아니라

멈춰 서서 묻는 시간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우리는 테세우스의 배처럼

조금씩 바뀌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학교라는 공간은

사건의 지평선을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때부터 설명은 오해가 되고

개입은 폭력이 되며

책임은 고발의 언어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글은 특정 학교나

어떤 하나의 사건을 전제로 한 기록이 아니다.

현장에서 오래 머문 한 사람이

그 시간 속에서 느낀 사유에 가깝다.

답을 제시하려는 글도 아니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글도 아니다.

다만 기록하고 싶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해하려 하기보다

증명하려 들었는지를.

학교는 하나의 배이고

우리는 그 배를 함께 관리해 온 사람들이다.

판자 하나를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숱한 판자들이 모여

되돌릴 수 없는 전혀 다른 배가 되어버렸다.

어느 면에서 학교는 이제 다른 시간을 항해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 멈췄어야 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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